“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나타나엘은 예수님에 대해 편견적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것만 놓고 보면 나타나엘이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편견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어지는 얘기를 보면
꽉 막힌 사람이나 완전히 닫힌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필립보의 제의랄까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주님께 갔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타나엘은 꽉 막히거나 닫힌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 신비에 열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도 여느 이스라엘 사람처럼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고 믿기도 하였지만 자기의 인간적인 생각에
하느님 신비의 문까지 닫는 사람은 아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칭찬을 그가 받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믿음의 눈이 있는 사람이요 열려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사건이나 역사를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하나 들면 이스라엘은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 간 것을 야곱의 편애와
이에 대한 형제들의 시기 질투가 만든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역사로 보는 것입니다.
아무튼 나타나엘은 이런 믿음의 눈을 가졌기에 필립보가 찾아가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자기를 주님께서 먼저 보셨다고 했을 때
똥고집 부리지 않고 즉시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믿는 사람에게는 관상이 교환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고 계심을 믿는 이도 보는 것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는 사람의 입에서는 시편 139편의 찬미가 절로 나옵니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시나이다.”
이렇게 나타나엘처럼 주님께서 알고 계심을 알고,
보고 계심을 관상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위선자라고 나무라신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는 다르겠지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고 자선하고 단식하지 않고,
숨은 일도 다 보시는 주님의 눈앞에서 뭐든지 다 하겠지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주님의 눈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내 어려운 사정을 다 아시는 주님의 아심에 사랑을 또한 느끼겠지요.
그래서 엇길로 가지 않고,
그래서 행복의 길로 가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서 나를 보고 계심을 나도 보고,
알고 계심을 나도 아는 또 다른 나타나엘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첫댓글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