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사랑은 우리 신앙의 정수랍니다.
어려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면 참 엉터리로 만들고도 항상 자랑스럽고 애착이 갔습니다. 무엇 하나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없는 것이었으면서도 내가 만든 것만큼은 항상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은 가장 완벽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보시고 좋은 것이 이 세상이고,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부족해도 애착이 가는 것을 완벽한 것에 어찌 애착이 가지 않겠습니까? 어찌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은 그 사랑을 ‘너무나 사랑하신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누구를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표현할 수 있습니까? 정말 사랑한다는 것은 표현할 수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것을 문학가들은 잘도 표현하고 그 감정을 잘도 묘사하지만 항상 완벽하지 못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오묘하고 아름다운 것이랍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너무나 사랑하셨다고 썼나봅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는 말도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사랑에 합당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외아들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중국어 성경에 보면 독생자(獨生子)라고 외아들을 표현하였습니다. 외아들은 흔히 獨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독생자라고 하는 말은 조금 그 의미가 다른 표현이랍니다. 외아들이면서도 혼자서 나신 분이라는 표현이기도 하답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면서 스스로 사람이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의 표현대로(only begotten Son) '하느님 스스로 사람이 되신 유일한 아들'이라는 말이고, 또한 아들은 하느님의 분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사람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시고, 우리에게 멸망을 없애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는 말이 됩니다.
심판하려는 것과 구원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우리는 자주 심판하고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잘했고, 못했고,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누구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 잘잘못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고 집에서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그렇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심판하고 살았답니다. 나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항상 따져보고 옳다고 생각하면 그게 반드시 옳은 줄 알고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없는 자격을 행사한 것이지요.
예수님은 심판할 자격이 있으신 분이고 세상을 심판하러 언제인가는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구원을 위해서 오셨다고 강조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하실 계획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救援)은 구(求)하는 것과 조금 다르답니다. 내가 내 목숨은 구할 수는 있어도 구원할 수는 없답니다. 구원(salvation)은 "누가 남을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아울러 먼저 상태로 회복시키거나 보다 나은 상태에 놓은 것을 말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도와 건져 준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죄에서 나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나를 도와주시고 죄와 악에서 건져 주시어 내가 원죄와 본죄로 얼룩진 상태에서 모든 죄를 없애주시고 하느님의 품에 받다 더 나은 상태로 올려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고, 믿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리고 가르친 것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항상 고백합니다. 그런데도 그 가르치심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고 선교하는 것에는 어려워합니다. 그러면 믿고 있다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데 게으르다면 나는 헛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선생이 되어 지식을 전수하듯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모범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모범이 되어 살지 못합니다. 좋은 표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좋지 않은 표양으로 하느님과 교회에 먹칠을 하고 비난을 받게 합니다.
말은 아주 쉽게 하면서도 내가 지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이렇게 하면 잘 할 수 있다고 코치를 하면서도 나는 항상 그렇게 못해서 문제가 됩니다. 모범을 보이는 삶은 그렇게 어렵답니다. 어려우면서도 우리가 반드시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산답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의 완성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생활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는 일보다 사회적인 일로 교회에서 일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답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합니다. 용서한다고 합니다. 미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옹졸한 내 마음을 활짝 열어 놓는다면 나는 아주 검게, 시커먼 속내를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커먼 속내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감추고 살 수도 있겠지만 심판자로 계시는 그 분 앞에서는 이 시커먼 모습에 나 스스로도 놀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사도는 다시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멀리하고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빛을 선이라고 한다면 어둠은 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빛이고, 선이라고 한다면 악마의 세력에 들어 있는 것을 어둠이며 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어의 kakos라는 악을 가르치는 말은 '인간의 책임에 귀속하는 해로운 행위'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모든 악의 책임은 우리 인간에게 있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는지 모릅니다. 양심에 의해 살기는 참 어려운 것이 이 사회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어두운 악의 표징들은 뉴스에 나옵니다. 그러나 선의 사랑의 실천에 대하여는 아주 조금 비칠 뿐입니다.
항상 선을 행한다고 선한 빛의 세계에 살겠다고, 그리고 하느님과 같이 살겠다고 하루에도 서너 번씩 결심합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전부 무시하고 내 의향대로 악에 묻혀서 살아갑니다. 당연히 우리가 있어야 할 빛의 세계이며, 자연 질서에 속하는 선을 우리가 간직하지 못했을 때 악으로의 경향으로 떨어져 내립니다. 당연히 간직해야 할선에서 왜 그렇게 부족함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을 두려워합니다. 햇빛 알러지가 있는 사람들은 밖에 나갈 때 자외선을 차단하는 sun cream을 바릅니다. 그래야 피부를 보호하고 주름살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모자를 쓰고 양산을 쓰고 나갑니다. 피부를 손상시키지 않게 장치를 하고 밖으로 나갑니다.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성덕의 크림을 바르고 나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아름답게 꾸미고 마음을 열고 빛으로 나가야 합니다. 흡혈귀처럼 빛을 미워하면 결국 우리를 어둠에 숨어있게 하고 악으로 치장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 신앙의 정수랍니다.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8,1ㄴ-8
1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3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4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축일4월 17일 성 스테파노 하딩 (Stephen Harding)
신분 : 수도원장, 설립자
활동 연도 : +1134년
같은 이름 : 스더왕, 스테파누스, 스테판, 하르딩
영국 남부 도싯셔(Dorsetshire) 지방 쉐르본(Sherborne) 태생인 성 스테파누스 하딩(Stephanus Harding, 또는 스테파노 하딩)은 젊은 나이에 고향의 한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스코틀랜드와 파리(Paris) 그리고 로마(Roma)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몰렘(Molesme)의 은수자 공동체에 들어갔다. 이때 그는 성 로베르투스(Robertus, 4월 29일)와 성 알베리쿠스(Albericus, 1월 26일)의 지도를 받는 행운을 얻었다.
그런데 몰렘 수도원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많은 기부금으로 수도원이 부유해지고 수도자들이 나태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성 로베르투스는 베네딕투스의 수도 규칙과 청빈 생활을 더욱 철저히 실천하는 은수 생활을 위해 1098년 초 성 알베리쿠스와 성 스테파누스 하딩 및 20여 명의 수도자와 함께 몰렘의 수도원을 떠나 본(Beaune)의 자작(子爵)인 르노(Renaud)가 마련해 준 시토(Cteaux) 계곡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몰렘 수도원과 문제가 발생해 1099년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교황의 중재로 성 로베르투스가 몰렘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성 알베리쿠스가 1099년 시토 수도원의 제2대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109년 제3대 수도원장으로 성 스테파누스 하딩이 선출되었다. 그는 재임 초기에 수도 성소의 감소와 재정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112년 4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8월 20일)가 30명의 형제 · 친척 · 친구들과 함께 시토회에 합류하면서 상황이 개선되었다.
그는 효율적인 시토회 운영을 위해 제도를 정비하고 회칙 마련을 위한 작업을 시작해 1119년 교황 칼리스투스 2세(Callistus II)로부터 수도회 회칙인 “사랑의 헌장”(Carta Caritatis)을 승인받았다. 25년간 원장으로 헌신하며 시토회의 이상을 실현했던 그는 1133년 연만한 나이와 병약한 몸 때문에 사임하고 이듬해 3월 28일 선종하여 전임자인 성 알베리쿠스의 무덤에 묻혔다. 1623년에 시성된 성 스테파누스 하딩은 성 로베르투스, 성 알베리쿠스와 함께 시토회의 공동 설립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스테파노 하딩 (Stephen Harding)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