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서 피다 (외 2편)
권귀순
꽃차 봉지를 열고 말린 꽃을 꺼낸다
꽃잎마다 눈을 쓸어 감긴 듯
단단히 걸어둔 겹겹의 문
적막을 물에 넣는다
환히 반기는 물
적막을 깨우려고 가만가만 쓰다듬는
물의 자애로운 손
잔뜩 오므린 꽃잎을 부드럽게 핥아주는
물의 둥근 입
잠긴 기억의 빗장을 풀어보려고
소곤소곤 이름 불러주는데
방싯대며 나풀거리며
사부작, 사부작 물의 품에서 눈을 뜨는
재스민이 피어난다, 노랗게 피어난다
내 안에도 저런 물이 있다면
사랑도 시들기 전 꽃인 듯 말려두었다
다시 피웠으면 싶은데
생각을 툭, 치며 흩어지는
아, 재스민 향기
향나무 상자 속 울음 하나
상자를 열고 가는 목걸이를 집는데
섬세한 사슬이 흔들리며
브로치에 달린 작은 핀을 건드렸다
문득 그가 울었다
작은 현의 울림처럼
외로운 음 하나 툭, 떨어트리듯
가냘픈 은빛 몸을 떨며 울었다
순간에 사라지는 그 짧은 울음
향나무 냄새 나는 울음
그도 우는 법을 알고 있구나
일생에 단 한번 운다는
가시나무새는 죽을 때 울고 간다는데
누구도 우는 법을 잊지 않는다
슬픔은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울음은 몸이 먼저 알기 때문이다
존재는 모두 우는 법을 알고 있다
오래 울고 나면
찬 개울물에 발을 담근 것처럼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느낌
비에 씻긴 산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잡히는 것처럼
눈물에 씻긴 세상이
부시게 다가오는 느낌
마른 흐느낌이 간간이 어깨를 흔들어
남은 눈물을 털고
슬펐던 것들이 바닥에 가라앉아
더없이 고요해지면
참 맑은 힘이
내 안에서 나를 떠민다
아직 아무도 두레박을 내리지 않은
새벽 우물처럼 고일 일만 남은
길어 올릴 일만 남은
그 시린 힘
— 시집 『백년 만에 오시는 비』(2017. 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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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귀순 /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0년 《펜과 문학》2회 추천완료로 등단. 2002년 시집『오래된 편지』발간. 현재 메릴랜드 Rockville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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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피다 (외 2편)/ 권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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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06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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