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나이에 용감하게 적진으로 뛰어들어 목이 잘린 채 돌아온 화랑 관창의 기백과 임전무퇴의 정신이 없었다면 신라는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라의 화랑들은 수련과정을 통해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벗을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배웠다. 또 부귀영화에 구애받지 않고 정의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오직 대의(大義)를 따르는 인격을 연마했다.
신라 진흥왕 때 현재의 사관학교와 같은 국가의 군대를 양성하는 화랑 제도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배출된 화랑들은 물러섬을 수치로 여겨 저돌적인 용맹성으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러한 화랑들의 활약에 힘입어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발전하고 지리적으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한반도를 통일한 국가가 됐다.
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제정한 세속오계는 화랑이 지켜야 할 덕목일 뿐만 아니라 호국적인 교육 이념을 담았다. 화랑도의 세속오계는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이다. 이것은 화랑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율법으로 귀산·추항 두 화랑에게 다섯 가지 계율을 정해 준 것에서 비롯, 이후 화랑들이 지켜야 할 지표가 됐다.
신라 시대 화랑이란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골·성골로 이루어진 귀족의 자손으로 300명에서 5000명의 낭인을 거느리며 수려한 산이나 강에서 단체 생활을 통해 심신을 수련하고 단결력을 도모했다. 화랑들은 향가와 가무로 정서 교육과 도덕을 함양했고 무술·궁술 등을 익혀 용맹한 전사가 돼 국가에 충성했다.
화랑도는 후세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통일 신라 초기 역사가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배출되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평가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자는 화랑이다…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을 말하려 함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마찬가지인 우책이다”라고 말했다. 이로 미뤄 볼 때 화랑도는 신라인의 중요한 정신 덕목을 담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원류라 할 수 있다.
화랑도는 독특한 무사도로 유명한데 화랑뿐만 아니라 낭도나 일반 병사까지 국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무사도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랑 출신의 장군들은 언제나 솔선수범을 보였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루게 된 원동력은 바로 화랑정신 때문이라고 반대로 패망하게 된 것은 화랑정신이 쇠퇴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화랑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군인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정신 근본이라 할 수 있다. 화랑 제도는 철저히 위로부터의 솔선수범과 희생정신을 중시했다.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훌륭한 전통을 우리는 일찍이 삼국 시대부터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자랑스러운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은 철저히 우리들의 몫이라 할 수 있다. 즉, 화랑정신을 민족을 상징하는 정신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일본은 무사도, 영국은 신사도, 미국은 프런티어 정신, 유대인은 시오니즘 등 나라별로 대표하는 정신 사조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내세울 만한 뚜렷한 것이 없다. 신채호 선생이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을 말하지 말라”고 말한 바와 같이 화랑정신을 잘 연구해 민족을 상징하는 정신 사조로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중요 과제일 것이다.
16세 나이에 용감하게 적진으로 뛰어들어 목이 잘린 채 돌아온 화랑 관창의 기백과 임전무퇴의 정신이 없었다면 신라는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라의 화랑들은 수련과정을 통해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벗을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배웠다. 또 부귀영화에 구애받지 않고 정의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오직 대의(大義)를 따르는 인격을 연마했다.
신라 진흥왕 때 현재의 사관학교와 같은 국가의 군대를 양성하는 화랑 제도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배출된 화랑들은 물러섬을 수치로 여겨 저돌적인 용맹성으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러한 화랑들의 활약에 힘입어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발전하고 지리적으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한반도를 통일한 국가가 됐다.
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제정한 세속오계는 화랑이 지켜야 할 덕목일 뿐만 아니라 호국적인 교육 이념을 담았다. 화랑도의 세속오계는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이다. 이것은 화랑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율법으로 귀산·추항 두 화랑에게 다섯 가지 계율을 정해 준 것에서 비롯, 이후 화랑들이 지켜야 할 지표가 됐다.
신라 시대 화랑이란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골·성골로 이루어진 귀족의 자손으로 300명에서 5000명의 낭인을 거느리며 수려한 산이나 강에서 단체 생활을 통해 심신을 수련하고 단결력을 도모했다. 화랑들은 향가와 가무로 정서 교육과 도덕을 함양했고 무술·궁술 등을 익혀 용맹한 전사가 돼 국가에 충성했다.
화랑도는 후세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통일 신라 초기 역사가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배출되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평가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자는 화랑이다…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을 말하려 함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마찬가지인 우책이다”라고 말했다. 이로 미뤄 볼 때 화랑도는 신라인의 중요한 정신 덕목을 담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원류라 할 수 있다.
화랑도는 독특한 무사도로 유명한데 화랑뿐만 아니라 낭도나 일반 병사까지 국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무사도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랑 출신의 장군들은 언제나 솔선수범을 보였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루게 된 원동력은 바로 화랑정신 때문이라고 반대로 패망하게 된 것은 화랑정신이 쇠퇴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화랑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군인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정신 근본이라 할 수 있다. 화랑 제도는 철저히 위로부터의 솔선수범과 희생정신을 중시했다.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훌륭한 전통을 우리는 일찍이 삼국 시대부터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자랑스러운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은 철저히 우리들의 몫이라 할 수 있다. 즉, 화랑정신을 민족을 상징하는 정신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일본은 무사도, 영국은 신사도, 미국은 프런티어 정신, 유대인은 시오니즘 등 나라별로 대표하는 정신 사조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내세울 만한 뚜렷한 것이 없다. 신채호 선생이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을 말하지 말라”고 말한 바와 같이 화랑정신을 잘 연구해 민족을 상징하는 정신 사조로 발전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중요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