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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200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의 역사를 새로 쓴 히딩크 감독이 없었더라면 박지성의 신화도 없었다. 히딩크와 함께 한 '월드컵 4강 신화'는 '박지성 전설'의 본격적인 서막이다.
글 한준
박지성은 2001년 1월,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고 가진 첫 번째 대표팀 소집 훈련부터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 무대까지 500여 일 간 줄곧 대표팀과 함께 했다. 이천수 합류 전까지 대표팀의 막내였던 박지성은 본선 개막 직전까지 거의 주목 받지 못하는 선수였다. 누구보다도 히딩크호에서 꾸준한 부름을 받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누구도 그의 진가를 알지 못했다. 박지성은 히딩크의 계획 안에 있었다. 그리고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을 만난 것이 인생에 찾아오는 세 번의 기회 중 하나라고 말한다.
“히딩크 감독님은 내 속에 숨어 있던 잠재력을 현실로 끌어내 주셨다”- 박지성
히딩크 감독은 울산에서의 첫 번째 소집 훈련 당시 꽁꽁 얼어있던 강동 구장 그라운드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상대의 볼을 향해 달려들던 박지성을 보고 “정신력 하나는 좋네”라는 혼잣말을 던졌다. 박지성은 대표팀과 함께한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가차없이 불호령을 내리던 히딩크 감독이 자신에게만은 단 한번도 꾸중을 한 적이 없다고 회고한다. 그라운드에서 언제나 전력을 다하는 박지성을 향해서라면 어떤 감독이라도 만족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박지성은 2001년 1월 24일 홍콩과의 칼스버그컵 경기를 시작으로 터키와의 월드컵 3/4위전 경기까지 히딩크 감독이 치른 총 38차례 A매치 중 26경기에 출전했고, 대부분이 풀타임 출전이었다. 특히 실전 대비 무대인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3경기에 풀타임으로 출전한 몇 안 되는 선수이며. 2002년 북중미 골드컵 대회에서도 발목 부상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주전으로 뛰었다. 부상과 소속팀 문제로 차출이 되지 못한 시기를 제외하면 박지성은 처음부터 히딩크 감독에게 중용 받고 있었다. 히딩크 감독은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도 일찌감치 박지성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었음을 밝혔다. 2001년 4월 이집트에서 치른 LG컵을 통해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완벽한(complete) 선수다. 처음엔 체격도 작고 약해 보여 그리 기대하지 않았는데, 회복력도 좋고 체력과 볼 감각까지 갖췄다. 수비 위주의 플레이에서 공격을 맡겼는데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경기 후 언론과 인터뷰에서도 박지성을 칭찬했다. 사실 나는 특정 선수를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박지성은 오늘 활약뿐 아니라 그간 팀 훈련에서 성실하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거스 히딩크
그 동안 대표팀에서 수비형 미드필더와 윙백 포지션을 소화하던 박지성은 왜소한 체구에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강한 끈기를 앞세운 투박한 선수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히딩크 체제 하에서도 초기에는 오른쪽 윙백과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을 오가며 출전 기회를 부여 받았다. 히딩크 감독이 포백 전형을 시험하면서 그는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 포지션을 맡아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선 개막을 2개월 밖에 남겨두지 않았던 2002년 4월,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박지성은 스리톱 공격진의 오른쪽 윙포워드로 선발 출전했다. 청소년 대표와 올림픽 대표, 국가 대표를 거치며 대부분의 시간을 ‘많이 뛰는’ 미드필더로 활약해 온 박지성은 태극마크를 단 후 처음으로 공격 최전선에 투입됐다.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한 결정이었다. 경기는 실망스런 0-0으로 끝났지만 히딩크 감독은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답을 얻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1년 만에 또 다시 박지성의 이름을 거론했다.
“박지성은 최전방과 미드필더 라인 사이에서 교묘하게 움직이며 상대를 괴롭힐 줄 아는 선수다” - 거스 히딩크
모든 이들이 박지성의 진가를 알아보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히딩크 감독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프랑스 등 유럽의 열강을 상대로 본선 조별리그 일정처럼 평가전을 마련했다. 2002년 5월 16일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거둔 4-1 승리는 아직까지도 내용과 결과 면에서 가장 화려했던 경기로 기억된다. 박지성은 황선홍, 이천수와 스리톱으로 선발 출전했고, 상대 측면을 공략하며 대량 득점의 숨은 주역으로 활약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 개막을 5일 앞둔 5월 26일, 수원에서 치른 프랑스와의 경기가 하이라이트였다. 1년 전 0-5의 참패를 허용했던 프랑스를 상대로 한국은 180도 달라진 팀으로 거듭나 있었다. 그리고 박지성은 누구보다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프랑스는 전반 13분 만에 티에리 앙리의 크로스 패스를 다비 트레제게가 밀어 넣으며 앞서갔지만 한국은 전반 26분과 전반 41분에 박지성과 설기현이 연속 골을 터트리며 리드를 잡았다. 결국 후반전에 크리스토프 뒤가리와 프랑크 르뵈프가 골을 터트려 프랑스가 3-2 승리를 거뒀지만, 이 날 경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박지성의 득점 장면이었다. 중원에서 김남일이 길게 찔러준 패스를 페널티 박스 전방에서 이어받은 박지성은 마르셀 데사이와 릴리앙 튀랑이라는 유럽 최고의 수비수들 사이에서 깔끔하게 볼을 트래핑 한 뒤 파비앵 바르테스 골키퍼가 손 쓸 수 없는 골문 구석으로 득점을 성공시켰다. 이젠 모두가 박지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물 한 살에 불과한 박지성이 너무 침착하게 골을 넣자 경기장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거스 히딩크
‘밀레니엄 특급’으로 불리던 이천수와 폭발적인 스피드를 자랑하는 차두리는 박지성의 백업 요원으로 밀려났고, 이동국은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박지성은 황선홍, 설기현과 함께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월드컵 본선에 나섰고, 폴란드 전에서 역사적인 월드컵 첫 승을 함께 했다. 미국과의 조별리그 2차전 경기에서 부상으로 38분 만에 교체 당하며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16강 여부를 결정 짓는 ‘강호’ 포르투갈과의 일전을 통해 다시 한번 해결사로서의 면모를 발휘한다.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과 이영표의 출격 여부를 두고 연막전을 쓸만큼 두 선수의 콤비네이션에 기대를 걸었다. 나란히 선발 출전한 둘은 히딩크 감독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했다. 박지성은 전반 27분 현란한 중앙 돌파로 주앙 핀투의 거친 태클을 유도해 그를 퇴장시켰고, 후반 21분에는 이영표가 측면에서 특유의 드리블 돌파로 베투에게서 두 차례 경고를 이끌어내며 퇴장을 유도했다. 그리고 후반 25분, 왼쪽 측면에서 이어진 이영표의 크로스를 문전 우측에서 박지성이 가슴으로 깔끔하게 트래핑 했고, 수비수의 키를 넘기는 볼 터치에 이은 하프 발리 슛으로 포르투갈의 골문을 열었다. 박지성의 이 골은 대회에서 가장 멋진 골 중 하나로 꼽혔고, 박지성과 히딩크의 포옹 장면 역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아직까지 축구팬들에게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첫 16강은 박지성의 발 끝에서 쓰여졌고 많은 유럽 축구팬들도 박지성의 ‘기술력’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박지성은 이어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스페인과의 8강전 모두 연장전으로 이어진 접전을 풀타임으로 소화했다. 특히 박지성은 유럽 선수들과의 힘 겨루기와 기술 대결에서 전혀 뒤지지 않는 당찬 모습을 보였다. 당시 그는 21살에 불과했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만만하게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경기를 거듭할수록 눈에 띄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히딩크 감독은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 박지성을 다섯 명의 키커 중 하나로 내세웠고, 그는 침착하게 성공시켰다. 그리고 한국은 마침내 4강 신화의 위업을 썼다. 내친김에 결승 진출까지 노리던 한국은 독일과의 경기에서 결국 체력 소진과 부상 등으로 인한 전력 누수를 넘지 못했다. 발락의 골로 결국 독일이 브라질과 결승에서 맞붙게 됐고, 꿈만 같던 한국의 월드컵은 터키와의 3/4위전 경기를 통해 마무리됐다.
“지금도 나는 2002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과 세계 최강을 다투었던 팀이 독일이 아닌 한국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만큼 독일과의 경기는 아쉬웠고, 나의 자랑스러운 동료들은 잘 싸웠다”박지성
필드 플레이어 중 유일하게 한일 월드컵 본선 7경기를 다 소화한 것은 송종국이 유일하다. 하지만 박지성 역시 부상으로 미국전에 교체 아웃된 것을 제외하면 풀타임 기용되며 대표팀 부동의 공격수로 활약했다.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대회를 결산하는 기사에서 “박지성이 세계 축구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됐다”고 전했다. 그리고 박지성은 이후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유럽 축구계에 충격을 던지게 된다.
:::한국 축구의 ‘슈퍼 에이스’ 박지성:::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뒤 황선홍과 홍명보의 뒤를 이어 누가 국가 대표팀의 에이스가 될 것인지가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이동국이 부진을 떨치고 부활했고, 이천수가 K-리그를 휘저었으며, 유상철과 최진철도 묵묵히 활약했지만 결론은 박지성이었다. 히딩크의 부름을 받아 PSV 에인트호벤으로 건너간 박지성은 한동안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으나, 04/05 시즌을 통해 유럽 축구의 중심부로 향했다. 2005년에 유럽 최고의 명문팀 중 하나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이 됐고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 무대에 임했다. 그는 한국을 상대하는 모든 팀들의 집중 견제 대상이 됐다.
하지만 박지성의 해결사적 면모는 그대로였다. 토고와의 조별리그 1차전 경기에서 이천수의 프리킥 동점골 상황에서 파울을 얻어낸 것이 박지성이며, 안정환의 결승골 상황에서 허슬 플레이로 수비수들을 달고 나가 공간을 열어준 것도 박지성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2차전 경기에서 종료 직전에 극적인 동점골을 터트려 또 한번 ‘강팀 킬러 본능’을 발휘해 그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2010년 월드컵을 준비하는 한국 대표팀에서 박지성은 이름만으로도 상대 팀을 긴장시킬 수 있는 네임 밸류를 지닌 선수로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