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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의 신도비. 이징옥 장군의 고향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부산 인근의 양산에 이징옥 장군(李澄玉 1399 정종1년 ∼ 1453 단종1)의 마을이 있다.
양산시 상북면 석계에서 양산천을 건느는 다리를 건너 5분여 북쪽으로 올라가면 양산군 하북면 삼수리가 나오는데 이 마을이 유명한 삼장군 마을, 즉 삼수리(三帥里)이다.
마을입구에 신도비가 있으니 이징옥 장군과 이징석 장군, 이징규 장군을 추모한 유적비이다. 이 3형제는 모두 조선초에 크게 현달하여 나라에 크게 쓰인 바가 되었는데 이중 중씨(仲氏)인 이징옥 장군은 불세출의 인물이었다.
그가 김종서의 심복으로서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김종서의 심복이라 하여 부당하게 파직당하자 후임자인 박호문(朴好問)을 죽이고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하며 난을 일으켰는데, 방심하는 사이 종성판관(鍾城判官) 정종(鄭種) 등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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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의 이징옥 장군 생가. 원래는 99칸 대가였다고 전하나 지금은 퇴락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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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 장군은 본관은 양산(梁山)이며 1416년(태종 16) 친시무과(親試武科)에 장원급제하여 사복소윤(司僕少尹)에 임명되었고, 1423년(세종 5) 경원첨절제사(慶源僉節制使)로 아산(阿山)에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하여 1425년 절제사로 승진하였다.
그 뒤 병조참판 · 영북진절제사(寧北鎭節制使) ·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등을 지내면서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북방경비를 담당하였다.
천성이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여진족에게 두려운 존재였으며, 청렴결백하여 일반백성을 수탈하거나 여진족의 물건에 손대지 않았다.
대저 실록에 나타난 이징옥 장군의 면모를 살피면 이렇다. (이징옥 장군 사후에 역적에 대한 평가이므로 객관적인 것이다.)
◆성종 15년(1484) 4월11일
이조 정랑 이복선의 상소
이조 정랑(吏曹正郞) 이복선(李復善)이 상서(上書)하여 아뢰기를,
“삼가 근간에 내리신 교지(敎旨)를 보건대............. 이징옥(李澄玉)은 장수의 혈통으로서 양계(兩界)의 절도사(節度使)가 되었을 적에 여진족 추장에게 매질하기를 마치 종을 다루듯 하였습니다.
여진 야인들이 그의 사람 됨됨이에 굴복하여 이징옥을 이영공(李令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야인에게 인망(人望)이 두터움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에게 더 큰 일을 맡기지 않고 한 지방만을 맡기는 것은 잘못 된 것이며..... "
이렇게 이징옥 장군이 여진족들을 매질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여진족의 존경과 신망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 이징옥을 존경했고 따랐기 때문에 진심으로 여진인들은 굴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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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마을과 다름 없어 보이는 삼수리 마을. 양산이씨 집성촌으로서 특성은 이미 사라졌다.
◆성종 18년(1487년) 5월 17일
영안북도 절도사 이극균의 상소
영안북도 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임금을 뵙고 아뢰기를,
“지금 적(賊 여진족)이 함경도 종성(鍾城)사람을 사로잡았는데, 이는 반드시 성밑에 사는 야인(野人 여진인)이 향도(嚮導 길안내)한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세종조(世宗朝)에 이징옥(李澄玉)이 절도사가 되어 있을 때 여진족이 국경을 침범하면 성밑에 사는 야인(여진족)을 엄하게 징계하였기 때문에 변경에 그런 사태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사로잡힌 자가 있으면 쇄환(刷還)해 온다고 일컫고 스스로 그 공을 자랑하면서 내조하여 상(賞)을 받기 때문에 노략질하기를 그치지 아니합니다............"
이징옥 장군은 만주 여진족과 함경도 여진족을 함께 연좌하여 다스린 것이다. 그들이 서로 내통하고 침입한 것을 확신하고 연좌하니 야인의 침입이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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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삼수리 마을에는 펜션형의 새로운 집도 많이 들어서 역사의 마을다운 고풍이 사라지고 있다.
◆성종 19년(1488년) 2월 2일
특진관(特進官) 유자광(柳子光)의 상소
경연에서 특진관 유자광이 아뢰기를,
“변장(邊將)은 오래 그 자리에 머무는 구임(久任)이 있어야 합니다. 이징옥(李澄玉)은 10년을 변방에 있어 큰 성과를 냈습니다. 자주 변장을 바꾸면 성과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이징옥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 대저 그 직위에 상당기간 동안 오래 있어야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잦은 교체는 결국 약화를 불러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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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22년(1491년) 5월 12일
승지 권경희의 상소
우부승지(右副承旨) 권경희(權景禧)가 아뢰기를,
“신(臣)이 이염의(李念義)에게 들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지난 경오년(1450년 세종 32년)에 경원(慶源)에 귀양가서 있을 때 이징옥(李澄玉)이 절도사(節度使)가 되었는데, 회령성(會寧城) 밑에 거주하는 야인(野人) 소로가무(所老加茂)가 회령(會寧)의 나장(羅將)을 때려 죽이고는 여진 추장 니마거 올적합(尼麻車兀狄哈)의 거주하는 곳으로 도망해 들어갔습니다. 이징옥이 그를 잡기 위해 5백여 명을 거느리고 저들의 땅인 만주에 들어갔는데, 이염의(李念義)도 따라갔습니다.
혹은 사냥도 하면서 천천히 걸어서 3일을 만주에 묵은 후에 한 수풀에 이르니, 수풀 사이가 30리(里) 정도나 될 만한 곳이 나타났습니다.
산이 높고 가파르지 않은데, 그 산의 서북쪽에 펀펀한 들이 있는데, 니마거 올적합(尼麻車兀狄哈)의 일족이 그 아래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수풀을 경유하지 않고 펀펀한 들을 경유하여 걸어가서 4일 아침에 니마거(尼麻車)가 사는 곳에 이르러 소로가무(所老加茂)를 잡았습니다.
거기서 1일을 묵은 후에 경원(慶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의 길은 험준한 곳은 없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길은 험하고 멀지는 않은 듯하다. 그 때의 변장(邊將)처럼 지금도 저들 여진의 땅에 드나들 수가 있겠는가?”
하니, 권경희가 아뢰기를,
“그 때의 일은 지금 때와는 다른 듯합니다. 이염의(李念義)가 말하기를, ‘이징옥(李澄玉)이 항상 말하기를, 「변장(邊將)이 된 사람은 적(賊)이 침입하는 길을 몰라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종성(鍾城)으로부터, 혹은 회령(會寧)으로부터, 혹은 경원(慶源)으로부터, 저들의 땅에 부지런히 드나들면서 길의 평탄하고 험준한 것을 상세히 알았다.’고 했습니다. "
이징옥 장군이 죽은 뒤 그 만주땅의 지리 통달은 대가 끊어진 것이다.
아무도 이징옥 장군처럼 만주로 부지런히 다니며 적정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만주땅을 내왕하며 그 사정을 미리 잘 알았다면 여진족의 흥기를 막아 병자호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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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24년(1493년) 11월 8일
특진관 유자광의 상소
경연에서 특진관(特進官) 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영안도(永安道 함경도) 육진(六鎭)의 수령(守令) 등이 모두 여기(女妓)와 관비(官婢)로 작첩(作妾)한다고 합니다.
이런 퇴폐한 작첩을 처벌해야 합니다.
일찌기 이징옥(李澄玉)이 회령 부사(會寧府使)가 되었을 때 야인(野人)들이 그 위세에 복종하여 10리 밖에서 모두 말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이징옥이 작첩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진인들이 이징옥 장군에게 복종한 것입니다.
고금이 어찌 다를까?
현대인들도 이징옥 장군에게 배울 일이다!
(흔히 간신으로 알려진 유자광이지만 그는 실제 현실을 직시하고 분석했던 훈구파 특유의 유능한 면도 있었던 것이다)
◆연산군 3년(1497년) 1월 27일
지평 강숙돌의 상소
지평(持平) 강숙돌(姜叔突)이 아뢰기를,
“요즘 변장들은 나약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선왕조의 이징옥(李澄玉)·유응부(兪應浮)·박형(朴亨) 등은 모두 장략(將略)이 있어 항상 변경을 지켰습니다.그런데 지금 심형은 당상관에 승진된 다음부터는 곧 면하려고 하는 마음을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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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징옥 장군의 고향인 삼수리를 찾았을 때는 따가운 여름햇살도 사위어 가는 오후 나절이었다.
마을에는 무논의 나락이 소록소록 익어가고 매미소리만 온통 가득하다.
마을 안쪽의 푸른 기와집이 이징옥 장군 종부의 집이었다. 멀리서 보기보다 초라한 집이었다.
마당에 들어서서 인기척이 없어 불러보니
"아이고 옷도 벗었는데 왠 손님이고~"
비명소리와 함께 후다닥 옷 입는 소리가 들리고 곧 3명의 70대~80대 할머니들이 나타났다.
금년 80세의 소석댁이 양산이씨 가문의 종부였다.
동래정씨가 친정으로서 인근 상북면 소석 마을에서 60여년전 이곳 양산이씨로 시집온 소석댁은, 이징옥 장군의 집안을 지키며 평생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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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양산이씨 종가를 지켜온 소석댁 동래정씨 (8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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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내려오는 교지등 가문의 보물은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면서 찾아간 필자에게 시원한 단술 한 잔을 권한다.
(필자는 혈당이 높아 단물을 못 먹는데 종부의 강권에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징옥 장군을 재조명코저 하는 움직임은 근년에 들어 활발히 일기 시작했다.
이징옥 장군의 직계 후손으로 가문의 일을 도맡고 있는 이원호 박사는 이징옥 장군이 17살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18세에 도절제사를 지낸 뛰어난 분으로서, 이징옥 장군은 여진족을 고구려의 후손으로 보고 각별히 아꼈다는 전언을 해준다.
이징옥 장군은 여진족들이 식량이 부족해 찾아오면 군량미를 아껴서 내어 주었는데 이는 그들을 고구려 유민들로 본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얘기는 역사에도 나타나지 않는 처음 듣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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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를 지켜온 소석댁이 그간의 집안 역사를 말해 준다
북방에서 30여년 동안 국경을 지킨 이징옥 장군은 무혈(無血)과 신망으로 여진족을 다스렸고 나중 대금국(大金國) 황제 칭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사실 건주여진이나 생여진 등 여진족 중에도 함경도와 압록강, 두만강 일원에 살던 여진족은 고구려 유민들이다.
그들이 고구려 유민들이 아니라면 고구려 유민들은 모두 어디에 갔겠는가?
당나라사에 따르면 고구려가 망하자 많은 고구려인들이 말갈속에 섞여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중 후금을 세운 누루하치가 중원의 명나라를 친 팔기전법 같은 것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전법을 응용한 것이다.
또 그들의 통치와 행정의 모범은 이징옥 장군이었다.
이징옥 장군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부패 없이 깨끗한 조직 운용을 가르친 이는 오직 이징옥 장군이다.
누르하치의 모델은 이징옥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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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태조 누르하치의 초상. 그의 조상 여진추장
애신각라씨는 대대로 이징옥 장군을 추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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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 장군이 대금국 황제로 호칭된 것은 청나라 누르하치의 형님격이 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금나라 왕실이 고려인 함보의 후손으로 기록한 것도 이징옥 장군의 영향이 있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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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 대해 뛰어난 탁견을 가졌던 이징옥 장군은 고구려 유민인 여진족에 적대적이지 않았고, 그들을 보살피고 통치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이징옥 장군은 한양정벌을 추진했다.
수양대군을 응징할 무력과 통치력이 있었던 이징옥 장군이었다.
현재 전국 여러 곳에서 제향되는 이징옥 장군이다.
양산 하북 삼수리의 생가마을에는 유허비가 서 있고, 경주시 외동읍 입실 불국사 입구 새길 우측 마을인 신계리에도 신도비와 재실도 있다. 이 마을은 이상주 전 한림대 총장의 고향으로 이징옥 장군의 직계후손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양산이씨는 기골이 장대한 것이 이징옥 장군의 피를 이어 그렇다고 전한다)
강원도 영월 단종능의 장릉의 배신(陪臣)단에도 이징옥 장군은 모셔져 있고 대전 동학사 숭모전에 단종충신으로 모셔져 있기도 하다.
이징옥 장군은 역적으로 일가가 적몰한데 어찌 후손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일가 한 분이 8살 막내를 업고 달아나 후손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징옥 장군의 아들 3형제중 2명은 현지에서 아버지와 운명을 함께 하여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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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리의 노인들은 이징옥 장군과 관련된 마을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징옥 장군 본인은 역적이 되었지만, 그의 형인 이징석 장군과 동생 이징규 장군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실록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세조 2년( 1456년 이징옥 장군이 죽은 지 3년 뒤이다) 4월 15일
세조가 경회루에서 이징석의 활솜씨를 칭찬하다
왕이 경회루 아래에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하니, 종친·재추(宰樞)·승지(承旨) 등이 입시하였다. 재추(宰樞)로서 무재(武才)가 있는 자인 이징석(李澄石)·윤암(尹巖)·박강(朴薑)·유응부(兪應孚)·이수의(李守義)·홍윤성(洪允成)·박거겸(朴居謙)·민발(閔發) 등과 내금위 겸사복관(內禁衛兼司僕官) 등을 뽑아 과녁을 쏘아 승부(勝負)를 겨루게 하고, 또 습진 훈도(習陣訓導)를 불러 진법(陣法)을 강(講)하게 하였다............
이징석은 나이가 70을 넘었는데도 과녁을 쏘는 것이 오히려 더욱 건장하니, 임금이 그 활을 취하여 당겨보고 이르기를,
“이 활은 강한데 장군은 늙었어도 더욱 건장하니, 그대는 향후 사람을 만날 적마다 선우(單于 흉노 추장)를 참(斬)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내가 이징석(李澄石)의 형제를 왕돈(王敦)·왕도(王導)를 삼겠노라.”말했다.
왕돈(王敦)·왕도(王導)는 중국 진(晉)나라 원제(元帝) 때 사람으로 두 사람 다 나라에 공(功)이 있었다. 그런데 왕도의 종형(從兄) 왕돈이 공을 믿고 전횡(專橫)하다가 마침내 무창(武昌)의 난(亂)을 일으키니, 왕도가 명제(明帝)를 도와 이를 평정하였다. 종제를 종형이 죽인 것이다.
즉 세조는 왕도가 이징석이고, 왕돈은 이징옥 장군으로 비유한 것이다.
세조는 후대의 옹졸대왕들처럼 삼족을 멸하지 않았다.
째째한 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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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마을 삼수리로 가는 길. 삼수리는 통도사가 있는 영취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아 고찰 통도사와의 관련성도 추정케도 한다
이징옥 장군을 그린 역사소설 같은 책도 많다.
어떤 책은 이징옥 장군이 여진족 추장딸과의 사이에 3형제를 두었다고 했다.
과거 3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이징옥 장군이 이순신 장군보다 더 위대하다"고 평가했다.
아산 현충사 등 이순신 장군 관련 유적을 성역화한 후에 다음으로 이징옥 장군 유적을 성역화하겠다고 박대통령은 공언했는데. 1979년에 일어난 10.26사태로 별세한 것이다.
이징옥 장군이 이순신 장군보다 더 위대하다고 평가한 박정희 대통령의 말은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북방에서 여진족과 싸웠다.
충무공도 이징옥 장군만큼의 성과를 올리지 못 했다. 이순신 장군이 북방에서 방수할 때 이징옥 장군의 명망을 들었고 그에 대해서 연구하고 배운 점이 컸다.
깨끗하며 유능한 무인으로서 표상이 이징옥 장군이었다.
조선전기 내내 명장의 모델로 거론된 분이 이징옥 장군이었다.
이징옥 장군은 고구려, 이순신 장군, 후금(청) 건국과 연결되는 존재이다.
마적이 횡행하는 무법천지이자 혼돈의 땅인 만주에서 청태조 누루하치의 스승은 이징옥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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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 장군이 내왕했던 만주땅 지도. 18세기 제작 만리일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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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이 아이신줴뤄(愛新覺羅)인 청태조 누르하치는 옛날 고구려의 구터인 만주 푸순(撫順)과 혼하(渾河), 흥경(興京) 분지에 있던 건주여진의 한 추장에 불과했다. 그들 건주여진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한반도 북부에 살던 여진족들(그들도 건주여진이다)과 자주 내왕했고 그 과정에서 이징옥 장군의 명성을 듣고 흠모하게 된 것이다.

청태조 누르하치는 좌절된 대평원의 황제 이징옥 장군의 유지를 계승해 청나라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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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에서는 고 안종석 씨가 이징옥 장군의 재조명을 위해 노력했지만 84년 교통사고로 별세하였고 양산유지들이 계속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업적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징옥 장군에 대해 나온 책으로는 대평원의 황제가 있다. 소설가 김수용씨의 저작으로 방대한 스케일의 책이다. 만주 대륙을 호령한 이징옥 장군의 면모를 잘 담고 있다.
두 번째로 반역(反逆)이 있다. 수년전 스포츠조선에 연재되었고 출간도 되었다. 이징옥 장군의 후손이 해적이 되어 일본까지 횡행한다는 얘기를 담고 있는데 전혀 황당하다고 할 수도 없다.
세 번 째로 한국일보사 발간으로 소설가 배상열씨가 쓴 "북벌영웅 이징옥 장군"이 상중하 3권으로 2004년 연말 출간되었다.
이 소설들은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읽혀지고 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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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 장군 가문의 보물로서 교지등이 삼수리 종가문서로서 보물 1001호로 지정되어 있다.
600년 가까이 한 곳에 유물이 보존 유지되어 전해오는 점이 각별하다.
현재 통도사성보박물관에 가면 이 문서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징옥 장군은 계속 추모되고 그 역사가 더욱 밝혀져야 한다.
특히 우리의 구강역(舊疆域)인 만주땅 회복을 위해서 그러 하리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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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저기 사진에 나온 배상열 씨는 저와 매우 각별한 사이이자, 제가 존경하는 선배 작가이시기도 하죠. ^ ^ ~
전 그 분의 이순신의 최후의 결전을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싸움질을 많이 해봤지만, 진짜 싸우지 않고 상대를 이기는 것이 마음 속 깊이 상대를 제압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