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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유화부인
~ 여신이 된 고구려의 국모 ~
내 이름은 유화(柳花), 버들꽃이다. 나는 서기전 76년 속아리 강마을에서 부족장 하백(河伯)의 맏딸로 태어났다. 속아리는 ‘나라 안의 큰 강’ 이란 뜻이니 뒷날 사람들이 송화강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강이다. 송화강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흑룡강과 합치는 만주의 젖줄이요, 우리 부여족의 선조들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조선족이 개척한 아리라- 아리수의 하나였다.
단군조선의 유민인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이 그 언저리에 마을을 세우고 모여 사는 강 이름이 모두 아리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아버지 하백은 속아리 언저리의 여러 강마을을 다스리는 유력한 군장(君長)으로서 수신(水神)처럼 존경받던 분이었다.
나에게는 훤화(萱花) ․ 위화(葦花)라는 두 아우가 있으니 곧 우리말로 풀이하면 각각 원추리꽃과 갈대꽃이란 뜻이다. 어머니는 막내 위화를 나은 지 얼마 안 돼 돌아가셔서 우리는 어머니 없이 자라야만 했다.
내가 열여덟 살 나던 해 어떤 여름날이었다. 더위를 못 이겨 나는 두 동생을 데리고 강으로 물놀이를 나갔다. 훤화는 나보다 두 살 적은 열여섯, 위화는 열다섯으로 모두 시집갈 나이였다. 우리 세 자매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물가에 옷을 벗어 놓고 발가벗은 채 물속으로 풍덩풍덩 뛰어들어 미역을 감았다. 물장구도 치고 재잘재잘 지저귀기도 하고 이제 막 봉긋 솟아오르는 서로의 젖가슴을 놀려대며 까르르 웃어대기도 하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물놀이를 즐기느라고 어느 사이에 낯선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난데없이 웬 시커먼 사내 하나가 강가에 다가와서 떡 버티고 선 채 능글맞게 웃으며 우리 자매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불쑥 나타난 그 젊은이 때문에 우리는 기절하도록 놀라 저마다 어머나! 아이구머니나!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첨벙첨벙 물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우리가 놀라고 부끄러워 물속으로 숨어버리는 모습을 보자 그 괴상한 젊은이는 더욱 재미있다는 듯이 큰소리로 와하하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그 젊은이는 번들번들 윤이 나는 매우 질 좋은 가죽옷을 입었고, 머리에는 오우관(烏羽冠)이라는 까마귀의 깃털을 꽂은 관모를 썼으며, 허리에는 한 발도 넘는 자루가 긴 장검을 찼고, 어깨에는 힘센 사람이라야 쏠 수 있는 강궁인 단궁(檀弓)을 메고 있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하든지 아니면 한두 살 더 먹은 듯이 보였다.
어느 모로 보나 비범한 인물인 듯싶은 젊은이는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소개했다.
“아, 어여쁜 아가씨들! 놀라지들 마시라요! 이 사람은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니란 말입네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저 거룩하옵신 천제님의 아들인 천왕랑(天王郞) 해모수(解慕漱)라고 합네다! 기러믄… 이제부터 우리 다 같이 재미있게 놀아볼까요?”
그러더니 자칭 해모수라는 넉살좋은 젊은이는 우리가 뭐라고 말릴 새도 없이 훌훌 옷을 벗어던지더니 강물로 풍덩 뛰어들어 우리를 마음대로 희롱하며 놀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배운 것 없이 무지막지하게 우리 자매의 벌거벗은 몸을 마구 주물러댔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한동안 신나게 놀고 나서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해모수는 우리 세 자매를 자신이 임시로 거처하는 이궁(離宮)인가 별궁(別宮)인가 하는 집으로 초대했다. 해모수가 어디에서 나타난 청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궁이라고 부르는 그 집은 강가 언덕 위에 통나무를 얽어서 지은 집인데 제법 튼튼해보였다. 집 앞에는 사냥한 사슴과 노루와 토끼와 꿩 같은 산짐승, 물에서 잡은 잉어와 쏘가리와 뱀장어와 메기 같은 물고기들도 주렁주렁 걸려 있는 모습을 보니 아마도 이 집을 본거지 삼아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며 지내는 모양이었다.
우리 세 자매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했다. 젊은이가 자칭 천제의 아들이요 천왕랑이라는 바람에 감히 거절을 못 했는지, 아니면 그가 한눈에 반할 만큼 잘 생기고 씩씩한 멋쟁이였기 때문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우리는 서둘러 옷을 찾아 입고 그를 따라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도 처녀의 순결한 정조를 잃으려니 귀신이 씌웠던 것 같기만 하다.
그렇게 해서 그의 집으로 따라 들어가 해모수가 대접하는 갖가지 맛있는 산짐승 고기와 물고기 요리에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날이 캄캄하게 저물고 말았다. 우리 세 자매의 뺨도 술기운으로 저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나는 무서운 아버지의 얼굴이 금세 눈앞에 떠올랐다. 아버지의 천둥 같은 호통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아이구머니, 내 정신 좀 봐! 이렇게 늦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았으니 지금쯤 집에서는 난리가 났겠지! 벌써 아버지가 사람들을 풀어서 찾아다니고 있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노라고 동생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칭 해모수가 문 앞을 가로막으면서 못 가게 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기막힌 경우가 어디 있담! 이건 순 날강도처럼 흉악한 심보가 아닌가 말야!
어머나, 기가 막혀! 그때야 비로소 해모수의 엉큼한 속셈을 눈치 챈 우리 세 자매는 깜짝 놀라 이구동성으로 비명을 지르며 마구 달아나기에 바빴다. 결국 일석삼조는 천제의 아들이라도 힘들었는지 훤화와 위화 두 아우는 천만다행으로 문밖으로 달아나는데 성공했지만 나 유화만은 꼼짝없이 붙잡혀 그날 밤 자칭 해모수에게 정조를 빼앗기고 말았다. 일이 끝난 다음에도 나는 너무나 아파서 누운 채 일어나 옷을 찾아 입을 힘도 없었다. 아랫도리도 아팠지만 이젠 처녀가 아니라는 생각, 이제 큰 일 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아팠다.
한편, 캄캄한 밤중에 허둥지둥 엎어지고 자빠지며 집으로 도망쳐 돌아간 두 동생 훤화와 위화는 울며불며 아버지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일러바쳤다. 아버지가 두 동생의 말을 듣기 무섭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부하들을 이끌고 자칭 해모수라는 자의 이궁인지 별궁인지 하는 통나무집으로 쳐들어왔다. 내가 안에서 들으니 아버지가 부하들을 시켜 집을 포위한 뒤 이렇게 고함쳤다.
“야, 이 천하에 흉악한 오입쟁이에 날강도 놈아! 어서 내 딸을 내놓고 이리 나와 내 칼을 받아라!”
그러자 해모수가 옷을 입더니 집 밖으로 나갔다. 나는 바깥이 소란해질 때 이미 옷을 입고 있었는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해모수가 능글맞게 웃으며 이렇게 아버지에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가시아바지(장인) 어르신네, 어서 오시라요! 사위 해모수의 절을 받으시기요!”
아버지가 기가 막혀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냅다 고함쳤다.
“야 이놈아!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르는 개뼈다귀 같은 놈이 무슨 얼어 죽을 사위란 말이냐? 당치도 않구나! 먼저 내 딸을 내놓고 모가지를 바쳐라!”
그리하여 수십 명의 부하들이 횃불을 들고 주위를 둘러싼 가운데서 두 사람은 대결을 벌였는데, 아무래도 나이 많은 아버지가 젊은 용사 해모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강약이 부동이라, 기력과 무술이 못 미쳐 패배를 인정한 아버지는 마침내 우리 두 사람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 이튿날 아침에 잔치를 베풀고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해모수의 아내가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끝까지 떳떳한 부부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혼모의 설움과 가시밭길이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 부부가 어찌하여 행복하게 잘 살지 못했는가. 비극은 혼인잔치가 끝난 지 반 년도 안 돼 벌어졌던 것이다. 자칭 해모수라는 바람둥이가 결혼하면 3년간 처가에 봉사해야 하는 우리 부여족의 미풍양속과 더불어 점점 배가 불러오는 나 유화를 헌신짝처럼 팽개쳐버린 채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혹시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본부인에게 돌아간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수많은 나날을 눈물로 보내야만 했다.
자칭 해모수 그 바람둥이가 뭐 천제의 자손은 서민과 혼인할 수 없다나, 하는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면서였으니 딸을 버린 아버지는 기가 막혔고 몸을 버린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화를 참지 못한 아버지는 집안의 망신이라면서 나를 백두산 남쪽 우발수로 내쫓아버렸다.
처녀가 아이를 배자 사내는 달아나버리고 아버지는 집에서 쫓아내니 나는 이 세상에서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짧지만 한 많은 이승살이를 스스로 끝내려고 우발수 깊은 물에 풍덩 몸을 던졌는데, 죽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가 나를 물에서 건져 올려 마침 순시 중이던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에게 바쳤던 것이다.
금와왕이 어찌된 일이냐고 묻기에 나는 할 수 없이 해모수라는 사람과 혼인하여 임신을 했는데 남편이 달아나버려 아버지에게 쫓겨난 사정을 이야기했다.
금와왕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자세히 살펴보더니 비록 버림받은 여자라고는 하나 자태가 그지없이 빼어나게 아름답기에 후궁으로 삼을 욕심이 생겼는지 자신의 궁궐로 데리고 가서 방 하나를 주고 머물게 했다.
그리하여 나 유화가 달이 차서 마침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날이 서기전 57년 5월 5일이었다. 내 아들은 골격이 튼튼하고 외모가 영특하게 생겼으며, 태어난 지 겨우 한 달 만에 말을 할 줄 알았다. 금와왕이 이 말을 듣고 이 비범한 아이가 자라면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까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구가(狗加)․저가(猪加)․우가(牛加)․마가(馬加) 같은 여러 대가(大加)가 하나같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혈육이라는 이 기이한 아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므로 어쩌지 못하고 나에게 되돌려주면서 길러도 좋다고 허락했다. 부여는 그때까지 부족장의 힘이 강해 왕도 마음대로 독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흘러 나중에 세상 사람들이 내 아들 추모성왕(鄒牟聖王)이 알을 깨고 나왔다는 신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러한 난생신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추모성왕 또한 신라 시조 박혁거세거서간(朴赫居世居西干), 가락국 시조 김수로대왕(金首露大王)과 마찬가지로 신령스러운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다는 말이다. 알이란 둥근 것이요 하얗게 빛나는 것이니 곧 하늘의 해를 상징하는 것이다. 해모수의 성씨 해(解) 또한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해를 가리키는 것이요, 그 알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것은 하늘의 자손으로 세상을 다스리고자 내려왔다는 천손사상(天孫思想)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금와왕 또한 본래 동부여 임금 해부루(解夫婁)의 양자로서 왕위를 이은 인물이었다. 동부여는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이었고, 북부여는 이미 내우외환으로 멸망한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각지에서 일어난 열국(列國) 가운데 하나였다.
그 열국의 하나인 고리국(藁離國) 사람의 후손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무리 500여 명을 모아 자립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인 47세 단군 고열가(古列加) 57년- 서기전 239년 4월 8일이라고 고려 말기의 학자인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단군세기>와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의 <북부여기>에 나온다. 이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이른바 사학계의 강단파와 재야파 사이에서 위서다 진서다 하는 시비가 끊이지 않는 <환단고기>에 실려 있으니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잘 살펴보기 바란다.
어쨌든, 해모수는 타고난 자태가 위풍당당하고 사람을 쏘아보는 눈길이 신기하게 빛났으므로 두려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스물아홉 살에 5가를 통합해 아스라(아사달, 뒷날의 하얼빈)에 도읍을 정해 북부여를 세우고 스스로 천왕랑이라고 일컬었으니 이는 곧 천제의 아들, 천자라는 뜻이었다.
<북부여기>는 또 이렇게 전한다. 해모수의 뒤는 모수리(慕漱離)가 이었는데, 그때는 중국에서 진왕(秦王) 정(政)이 나라를 통일하고 시황제(始皇帝)라 칭할 무렵이었다. 진 제국이 서자 연․제․조나라의 유민 수만 명이 우리 땅으로 망명 귀화했다. 모수리는 아우 고진(高辰)을 장수로 삼아 위만(衛滿)의 침공에 대비해 요동을 지키도록 했다. 위만은 중국 유민의 우두머리로서 명맥만 남은 조선왕 기준(箕準)을 간계로 속여 나라를 빼앗은 인물이었다.
모수리 다음은 고해사(高奚斯), 그 다음은 고우루(高于婁)가 뒤를 이었다. 서기전 108년 한 무제(漢武帝) 유철(劉澈)의 군대가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멸망시키자, 아리라- 압록강 서쪽 지방에서 고두막(高豆莫 : 高莫婁)이라는 비상한 용사가 마지만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졸본에서 즉위하고 동명왕(東明王)이라고 일컬으며 사람을 시켜 아스라의 고우루에게 전하게 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 장차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그대는 다른 곳으로 떠나라.”
따라서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더 잘 알려진 내 아들 추모성왕에 앞서서 이미 동명왕을 칭한 영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아니라 부여의 시조 동명왕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여의 시조 동명왕 존재의 근거가 되는 기록도 소개한다. 이는 서기 60년께 후한의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에 실려 있다.
- 북쪽 이민족의 탁리국에 왕을 모시는 여자 시종이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여종은 계란과 같은 큰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나중에 아이를 낳아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놓고 말에 밟혀 죽도록 했으나 말들 역시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은 아이가 아마도 천신(天神)의 자식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모친에게 노비로 거두어 기르게 했으며, 동명(東明)이라고 부르며 소나 말을 치게 했다. 동명의 활솜씨가 뛰어나자 왕은 그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 그를 죽이려고 했다.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가다가 엄체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었고,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격하던 병사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그는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에 부여가 생기게 된 유래다. -
부여의 시조 동명왕의 건국설화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추모의 건국설화가 이처럼 매우 비슷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 유화도 뒷날 고구려의 국모였지만 죽은 뒤에 부여신(扶餘神)이란 이름으로 모셔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 유화의 존재가 곧 부여와 고구려를 이어주었다는 뜻이다.
좌우지간, 그렇게 고우루가 겁에 질리고 근심 걱정이 병이 되어 죽으니 후사가 없어 아우 해부루가 뒤를 이었다. 해부루도 동명왕 고두막이 막강한 무력으로 잇달아 핍박하니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동북쪽 가시라, 나중의 두만강가 훈춘으로 쫓겨가 국호를 동부여라고 바꾸었던 것이다.
해부루 또한 형 고우루와 마찬가지로 늙도록 아들이 없었으므로 하루는 산천에 제사올리고 뒤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 주십사 빌었다. 돌아오는 길에 곤연에 이르렀을 때 타고 가던 말이 갑자기 멈추더니 큰 돌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해부루가 괴이하게 여겨 그 돌을 치워보라고 하자 그 밑에 금빛 나는 개구리처럼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다. 해부루가 기뻐하며, “이는 필시 하늘이 내게 주신 자식이 분명하구나!” 하고 데려와 이름을 ‘금개구리(金蛙)‘라고 짓고 길러서 자라나자 태자로 삼았다. 그리하여 해부루가 죽자 양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로소 밝히지만 나의 정조를 빼앗아간 원수이면서도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첫사랑, 해모수를 사칭한 바람둥이의 정체는 구려후(句麗侯) 고진, 요동을 지키던 모수리의 아우 고진의 손자 불리지(弗離之)였다. 고진은 또한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둘째아들이었으니 바람둥이 불리지는 바로 증조부의 위명을 팔아먹은 셈이었다.
나 유화와 해모수 아닌 불리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났는데 어려서부터 활을 매우 좋아했고 잘 쏘았다. 파리가 귀찮게 굴어서 잠을 잘 수 없다면서 나에게 활을 만들어달라고 하여 내가 조그만 장난감 활을 만들어주자 그것으로 파리를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그리고 나이 일곱 살이 되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대궐 안팎으로 돌아다니며 보이는 대로 쏘는데 역시 백발백중의 신기였다.
마침내 신궁(神弓)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고 내 아들은 추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부여말로 ‘활 잘 쏘는 이’, ‘우두머리’라는 뜻이었다. 주몽(朱蒙)이란 이름은 나중에 한문으로 기록하면서 발음 나는 대로 글자를 갖다 붙인 것이다.
내 아들 추모가 그처럼 어려서부터 비상하게 빼어난 재주를 보이자 이내 주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때 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무엇을 하고 놀아도 추모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금와의 맏아들 대소(帶素)가 부왕에게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졸랐다.
“아바지! 저 과부의 새끼 추모 녀석을 하루빨리 죽여 없앱시다! 일찌감치 후환을 없애 버리자구요!”
하지만, 금와왕이 여러 부족의 우두머리인 5가를 무시하고 독재를 할 만큼 왕권을 확립하지 못했으므로 자기 마음대로 죽일 수 없었기에 추모에게 왕궁의 마구간에서 말먹이는 천한 일을 시켰다. 그때 추모의 나이 열아홉, 내 나이 서른여덟 살이었다.
내 아들 추모의 장래가 너무나 걱정되었기에 하루는 내가 추모를 불러 이렇게 조용히 타일렀다.
“얘야, 장차 왕자들이 너를 해코자할 터이니 미리부터 방도를 마련해둠이 좋지 않겠느냐?”
추모가 내 말에 어머님 말씀이 옳소이다, 하고 다른 여러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고 오로지 준마 한 필만은 바늘로 혀 밑을 찔러서 비쩍 마르게 만들었다. 금와왕이 마구간을 둘러보고 추모에게 말을 잘 돌보았다며 칭찬한 뒤 상으로 가장 여윈 그 말을 주었다.
내가 며느리를 본 것도 그해였다. 며느리는 예씨(禮氏)라고 하는데 인물이 곱고 영리하며 홀몸인 이 시어미에게도 효성을 다하고, 남편인 추모에게도 매사에 공순했다.
그해 10월 제천대회(祭天大會)에서 추모가 그 말을 타고 사냥대회에 참가했는데 금와왕은 추모가 혹시 많은 짐승을 잡아 자기 아들들의 기를 죽일까 걱정되어 화살을 한 대밖에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말은 타고난 준마요 탄 사람은 하늘이 내린 신궁인지라 말달리고 짐승을 몰아 쏘면 쏘는 대로 명중시키니 추모 혼자서 화살 한 대로 잡은 짐승이 일곱 왕자가 잡은 짐승을 다 합한 것보다도 많았다.
대소가 참을 수 없는 질투와 분노로 또다시 아우들과 합세하여 추모를 기어코 죽여 없애려고 달려들었다. 내가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추모로 하여금 한시바삐 먼 곳으로 도망치도록 재촉했다.
그해에 추모는 스물한 살. 그때 며느리는 임신 중이었다.
후궁 아닌 후궁으로 대궐 한구석에서 오로지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늙어가는 홀어미와 아직도 신혼이나 마찬가지인 아내, 그리고 그 아내의 뱃속에 든 자식을 남겨두고 떠나는 추모의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사랑하는 아들, 둘도 없는 아들은 일단 목숨부터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했다.
마침내 내 아들 추모는 평소 목숨이라도 대신 바칠 듯이 따르던 오이(烏伊) ․ 마리(摩離) ․ 협보(陜父) 세 명의 심복만을 거느리고 동부여의 도성을 빠져나와 멀리 서남쪽 졸본 땅을 바라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추모가 도망친 사실을 안 금와왕과 대소 부자가 군사들을 풀어 그 뒤를 추격토록 했다. 그러면서 산 채로 잡아도 좋고 죽여도 좋다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추모 일행이 동부여 군사들의 추격을 받으며 달아나다가 그만 엄호수(엄체수;개사수) 큰 강물에 앞길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배도 없었고 다리도 없었다. 벌써 저 멀리 추격군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나중에 들으니 그때 내 아들 추모는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해 이곳에 이르렀나이다! 천지신명은 이 가엽고 외로운 사람을 버리지 마소서!”
그렇게 소리쳐 기도한 뒤 활을 들어 강물을 치니 갑자기 수많은 자라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머리와 꼬리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추모 일행이 건너자 조금 뒤 추격병들이 뒤따라 건너려다가 자라들이 흩어지므로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는 추모가 금와왕의 군사들에게 쫓겨 위험한 지경에 빠졌을 때에 나의 친정아버지, 곧 추모의 외할아버지 하백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강을 건넌 사실이 이런 식으로 신화화하고 전설화한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강을 건넌 추모 일행은 큰 나무 아래에 둘러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때 비둘기 한 쌍이 나무 가까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추모가 활을 들어 쏘자 두 마리가 한꺼번에 날살을 맞고 땅에 떨어졌다. 추모가 비둘기들을 주워들며 이렇게 말했다.
“이 비둘기들은 어머니께서 보내신 사자(使者)가 틀림없어!”
추모가 동부여에서 도망치기 직전에 내가 “이 어미 걱정일랑 말고 어서 가거라!”하면서 보리의 종자를 싸주었는데 경황없이 도망치는 중에 잃어버렸던 것이다. 추모가 비둘기의 부리를 벌리고 보니 과연 입안에 보리씨가 들어 있었다. 추모가 보리씨를 꺼내고 물을 뿜자 비둘기들이 되살아나 다시 날아갔다.
추모 일행이 발길을 재촉해 모둔곡을 지나가다가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은 재사(再思)요, 또 한 사람은 장삼을 입은 무골(武骨)이요, 나머지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은 묵거(黙居)였다. 추모는 이들이 성이 없었으므로 재사에게는 극씨(克氏), 무골에게는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는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을 각각 내려주고 모두에게 일렀다.
“내가 바야흐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창건하고자 하는데 마침 그대들처럼 유능하고 어진 인물 세 명을 만났으니 이 어찌 천우신조라고 아니 하랴!”
그리고 그들을 수하에 거두어들이고 다시 길을 떠나 마침내 졸본천 흘승홀성에 이르렀다. 졸본은 곧 홀본이요 흘승홀이다.
추모가 동부여에서 도망칠 때 목숨을 걸고 따라온 오이․마리․협보 세 명은 동부여에서부터 추모를 추종하던 심복들이요, 모둔곡에서 거두어들인 재사․무골․묵거 세 명은 망명 도중에 포섭한 부족의 우두머리들아었다. 이들은 모두 추모가 졸본부여에서 새나라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에 핵심세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모두 개국 일등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동부여에서 쫓겨온 젊은 망명객에 불과한 추모가 이들 소수의 추종 지지 세력만 거느리고 고구려 건국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이룩할 수는 없었다. 이는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당시 졸본부여 땅에는 소서노(召西努)라는 여장부가 있어서 추모의 건국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그렇게 졸본부여에 다다른 추모의 망명 집단은 비류수 강가에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드는 등 근거지를 마련한 뒤 새로운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고, 나라 이름을 따라 왕성(王姓)을 고씨(高氏)라고 했다.
먼 뒷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조에는 이 대목에서 ‘주몽(추모)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매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였고, 왕이 죽으매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말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때에 주몽의 나이 22세라고 했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에는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이르자 부여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다만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얼마 뒤에 부여 왕이 세상을 떠나므로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그리하여 아들 둘을 낳으니 맏이는 비류(沸流)라 하고 둘째는 온조(溫祚)라 했다’고 하여 추모가 새로 얻은 부인이 졸본부여 임금의 둘째딸이라고 좀 더 자세히 나온다.
그러나 추모의 고구려 건국이 이처럼 오로지 새장가를 잘 간 덕분에 식은 죽 먹듯이 손쉽게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나라 임금과 왕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도망쳐온 불과 21세의 젊은이가 아무 밑천도 없이 그저 인물 하나만 잘난 탓에 아들 없는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되고, 그 왕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고 시조가 되었다는 너무나 단순하고 동화 같은 이야기를 누가 믿으랴.
<삼국사기>에서 말한 졸본부여의 공주라는 여자는 사실은 소서노로서 계루부의 부족장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優台)라는 사람에게 시집가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두었으나 우태가 먼저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온 여자였다. 추모와 소서노가 처음 만났을 때 추모는 21세, 소서노는 29세. 나이도 8세 연상이요, 게다가 두 아들까지 딸린 과부였지만 내 아들 추모가 소서노를 만난 것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었다.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은 졸본부여의 유력한 호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으뜸가는 부자였기 때문이다.
추모로서는 연타발 부녀의 영향력과 재산이 절실히 필요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절세의 영웅이라도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와 재물이 필요한 법인데, 추모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소서노라는 보물단지를 발견한 셈이었다.
비록 연상의 여인이지만 소서노의 미모도 보통은 넘었고, 또한 소서노도 씩씩하게 잘 생긴데다가 배짱도 두둑하고, 백발백중하는 신기의 활솜씨까지 갖춘 불세출의 젊은 영웅인 내 아들 추모를 만나자 그만 첫눈에 완전히 반해버리고 말았다.
연타발도 추모가 천왕랑 해모수의 후손이라는 말에 ‘참으로 피는 못 속여!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으니 저렇게 사람이 준수하고 무술도 빼어난 게 아니겠어!’ 하고 속으로는 흐뭇하게 여겼을 것이다. 좌우간 이렇게 서로의 속셈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추모는 소서노에게 새장가를 들었고, 그녀의 전 남편의 아들 둘도 친자식처럼 귀여워했다.
그런데 내 아들 추모가 그때 소서노에게 동부여에 이미 혼인한 본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는지, 아니면 일단 숨기고 이중혼인을 했는지는 나로서는 물어볼 기회가 없었으니 전혀 알 도리가 없다.
그렇게 해서 추모는 한 해 동안 재물을 풀어 사람들을 모으고 궁실을 짓고 성벽을 쌓는 등 건국사업에 전심전력한 끝에 마침내 새나라 고구려의 건국을 만천하에 선포했으니 그때가 기원전 37년 10월이엇다. 대왕으로 즉위한 추모는 해모수의 후손이므로 자신의 성씨가 해씨였지만 고씨로 창씨하여 왕성으로 삼았다.
추모라는 걸출한 젊은 영웅이 나타나 졸본부여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를 세웠다는 소문은 발 없는 말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가 나날과 다달을 이어 여러 씨족과 부족이 찾아와 신민(臣民)으로서 복속하고 보호받기를 자청하여 백성들은 점점 늘어갔다. 따라서 고구려의 인재와 군사들도 늘어갔다.
내 아들 추모대왕은 건국 직후부터 자신이 오래 전부터 품어오고 키워오던 원대한 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 꿈이란 단군왕검의 대조선과 천왕랑 해모수의 대부여를 잇는 천손의 나라, 부국강병의 대제국 고구려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상의 옛 터전을 되찾아야만 했다. 옛 조선의 유민들이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세운 수십 개의 나라를 다시 하나의 대제국으로 아우르는 것이 내 아들 추모대왕의 꿈이었다. 선조의 고토를 회복하는 ‘다물’, 그것이야말로 대고구려의 건국이념이었던 것이다.
대왕은 안으로는 관직을 정비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백성들이 생업에 전념하여 헐벗고 굶주리지 않도록 하는 한편, 젊고 날랜 무사들을 뽑아 실전과 다름없는 맹렬한 훈련을 통해 하나같이 일당백의 강병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렇게 강한 군사력을 갖춘 대왕은 복속하지 않고 버티는 주변의 부족들은 멀리 쫓아버린 다음, 소국들을 상대로 하나하나 정복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즉위 첫해에 가장 먼저 군사를 이끌고 간 곳이 비류수 상류의 비류국이었다. 그 나라는 다 같은 단군조선의 유민이 세운 나라로서 송양왕(松讓王)이 다스리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추모대왕이 비류수 중류로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상류에 사람이 사는 줄 알고 사냥을 하면서 거슬러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고 했다.
하지만 머리가 비상하게 뛰어난 내 아들 추모대왕인지라 졸본부여에 정착한 뒤 인근 지역의 사정부터 세밀히 살펴보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이미 비류국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준비를 완전히 갖춘 뒤에 겉으로는 사냥행차처럼 꾸며 비류국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송양왕 또한 국경의 경계와 방어를 허술히 하지 않았고, 따라서 인근 졸본부여 땅에 새로 들어선 고구려의 임금이 사전에 아무 통보도 없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자기 나라 국경을 넘었다는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어쨌든 두 나라 임금의 만남은 불가피한 숙명이었다. 양쪽 군사가 맞선 가운데 영토를 침범당한 송양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비류국 대왕 송양이라 하노라. 내 비록 구석진 곳에 외따로 살고 있으므로 그동안 훌륭한 사람을 만나보기 힘들었는데, 이제 우연히 그대와 서로 만나게 되니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노라. 하지만, 그대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궁금하도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신이 누군지 먼저 밝혀주기 바라노라.”
그러자 자랑스러운 내 아들 추모대왕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 천왕랑 해모수의 자손 추모왕이라고 하노라. 비류수 하류 졸본 땅에 도읍을 정하고 대고구려국을 세웠느니라.”
송양왕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그 뒤를 받았다.
“우리 비류국은 이미 오래 전에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여러 대째 이어오고 있노라. 또한 그대 고구려왕이 보다시피 이곳은 땅이 좁아서 두 임금이 나누어 임금 노릇을 할 수는 없느니라. 듣자 하니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는다니 차라리 나에게 복종하여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떻겠는고?”
내 아들 추모대왕이 그 말에 더욱 큰 소리로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더니 활을 꺼내들고 말했다.
“그대도 사나이, 나도 사나이. 아녀자들처럼 입씨름만 하다가는 끝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활로써 재주를 겨루어 지는 쪽이 항복하기로 함이 어떻겠느뇨?”
그리하여 활쏘기 재주를 겨루게 되었는데, 송양왕이 어찌 절세의 신궁인 내 아들 추모대왕의 적수가 될 수 있으랴. 송양왕이 마침내 무릎을 꿇고 고구려의 신민이 되기로 맹세했다. 그는 나라를 정리한 뒤 이듬해 6월에 약속대로 졸본성으로 찾아와 영토와 백성을 바치고 항복했다.
추모대왕은 비류국을 다물도(多勿都)로 개칭한 뒤 송양으로 하여금 다물후로 봉해 그 땅을 그대로 다스리게 했다. 뒷날 다물후 송양의 딸이 바로 내 손자인 고구려 제2대 제왕 유리명왕(琉璃明王)의 황후가 된다.
<삼국사기>는 비류국 정복 기사의 끝에 ‘고구려 말에 고토를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 지방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다물이 곧 추모성왕의 연호이다. 고구려가 건원칭제(建元稱帝)한 사실은 역사책 곳곳에 남아 있으니 이 글을 읽는 후손들은 잘 찾아보기 바란다. 다만 고구려가 중국과 다른 점은 호칭을 황제가 아니라 성왕․명왕․대왕․태왕 등으로 불렀다는 사실이다.
비류국을 정복하여 건국이념인 ‘다물사업’에 힘찬 첫발을 내디딘 추모대왕은 즉위 4년째인 서기전 34년 7월에 도성인 졸본성과 궁궐의 신축을 완공하여 황실과 국가의 권위를 드높인 데에 이어, 재위 6년 10월에는 오이와 부분노(扶芬奴) 두 장수를 보내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을 정복하고 그 땅을 영토로 삼았으며, 재위 10년 11월에는 장수 부위염(扶尉厭)을 보내 북옥저를 쳐서 없애고 그 땅을 영토로 편입시키는 등 쉴 새 없이 국토를 확장하고 백성을 늘려 힘차게 부국강병의 길을 달렸다.
그리하여 건국 10년쯤 되자 고구려는 이제는 보잘것없는 신생 약소국이 아니라 추모대왕의 목숨을 위협해 망명길에 오르게 했던 나라, 모후인 나 유화부인과 본처 예씨부인을 두고 도망쳤던 동부여와 맞먹을 정도의 강국으로 우뚝 서기에 이르렀다.
한편 동부여에 남아 있던 나 유화와 며느리 예씨 두 고부는 그 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그토록 미워하던 추모가 도망쳐버리자 혹시 금와왕과 대소 형제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박해받고 멸시당하며 지내지는 않았을까 걱정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고부가 특별히 학대당한 일은 없다.
하지만 궁성에서는 쫓겨나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금와왕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왕실에서 우리 고부의 생계를 지원해주었다. 이는 나중에 나 유화가 세상을 떠나자 금와왕이 태후의 예절로써 후히 장사지내주었다는 기록이 증명해주는 사실이다.
나 유화는 추모의 아비 불리지, 천왕랑 해모수를 자처하던 천하의 바람둥이, 그리고 이제는 까마득히 먼 옛날의 추억이 되어버린 첫사랑 불리지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배게 하고 집에서도 쫓겨나게 만든 사내, 그래서 한때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게 만든 원수 같은 사내였지만 이제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비록 두 번 다시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첫사랑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는 나의 자랑스러운 외아들 추모대왕의 아비가 아닌가 말이다.
내가 손자를 본 것은 아들이 망명한 지 반년쯤 지난 서기전 37년 초였다. 손자가 태어날 당시 내 나이는 40세였다. 그리고 추모대왕 재위 14년(서기전 24년) 8월에 동부여에서 파란만장했던 한 삶을 마치고 세상을 떠날 때 내 나이 53세였다. 요즘은 한창 나이지만 그대들이 살고 있는 때로부터 2천여 년 전에 55세라면 이미 고령의 할머니였다.
손자 유리(類利 : 孺留)가 태어났을 때 나는 시어머니요 할머니로서 즐거운 마음으로 해산을 도왔고,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나 개구쟁이가 되고, 다시 장가들 나이인 15세의 의젓한 총각으로 자라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유리는 그 옛날 제 아비 추모가 동부여에서 그랬듯이 아비 없는 자식의 설움을 안고 자라났다. 당시의 모습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조 첫머리는 이렇게 전한다.
- 유리가 어려서 거리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쏘다가 물 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잘못 쏘아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기를, “이 아이는 아비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못되게 구는구나!” 하였다.
유리가 부끄러워하며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은 어디에 계시지요?”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니란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남쪽 지방으로 도망가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단다. 떠날 때에 어미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거든 나의 유물이 일곱 모진 돌 위의 소나무 밑에 묻혀 있다고 일러주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이 틀림없을 것’ 이라고 하신 바 있다”하였다.
유리가 이 말을 듣고 곧 산골로 들어가서 찾다가 그것을 찾지 못하고 지쳐서 돌아왔다. 유리가 어느 날 마루 위에 있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 하여 가서 보니 주춧돌이 일곱 모로 되어 있었다. 곧 기둥 밑을 뒤져서 부러진 칼 한 동강이를 찾았다. 드디어 이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부왕을 보고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졌던 부러진 칼 동강이를 꺼내 붙여보았더니 완전한 칼로 연결되었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세워 태자를 삼았던 바, 이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 되었다. -
마지막에 ‘이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 되었다’는 것은 서기전 19년 추모대왕 재위 19년 되던 해를 가리킨다. 이보다 앞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19년 조에는, ‘여름 4월에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돌아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추모대왕이 40세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나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묘호를 동명성왕이라고 했다고 썼다.
그것은 나 유화부인 사후 5년 뒤의 일이고, 추모대왕의 어머니요 고구려의 국모인 나는 꿈에도 그리던 아들의 모습을 한 번 더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어찌 어미로서 자식이 보고 싶지 않았을까. 더구나 인편을 통해 아들이 새 나라 고구려를 세우고 대왕이 되어 천하 사방을 호령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어찌 그 장한 아들의 모습을 죽기 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지 않았으랴. 하지만 나 유화부인은 그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던 것이다.
추모대왕이 비록 창업과 국력신장의 대업으로 분주한 까닭에 동부여에 남겨두고 온 나와 며느리를 고구려로 데려 가지는 못했지만 단 한시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라를 세운 이후에 수시로 사자들을 보내 안부를 주고받았으며, 또한 동부여의 왕실에도 모후인 나와 예씨부인, 그리고 아비 없이 자라고 있는 아들의 안전을 부탁했다.
그런 이유로 내가 세상을 떠나자 전에는 그토록 핍박하고 목숨까지 위협하던 금와왕이었지만 마치 자신의 모친상을 당한 듯 태후의 예를 갖춰 정중하게 장사지내고 신묘(神廟)까지 세워준 것이 아니겠는가.
사신을 통해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추모대왕이 그해 10월에 금와왕에게 사신을 보내 고마운 뜻을 전하고 아울러 졸본지방에서 나는 귀한 토산물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도 그런 친선관계를 전해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내 아들 추모대왕이 동부여에 있는 아내 예씨와 친아들 유리를 빨리 데려가지 못한 데에는 자신의 건국사업의 기반이 된 졸본지역의 기존세력인 연타발과 새 부인으로 그 동안 황후 노릇을 하고 있는 소서노와 그녀의 출신 부족인 계루부를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정은 소서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갔다. 즉, 추모대왕이 동부여에서 친아들 유리가 제 어미를 모시고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를 태자로 책봉했으며,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본부인 예씨는 황후로, 그때까지 황후 노릇을 하던 소서노는 소후로 강등하고 말았던 것이다.
의붓자식보다 친자식을 후계자로 삼는 것도 그렇고, 제2부인 대신 본부인을 황후로 삼는 것도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막상 배신당한 입장이 되면 누군들 즐겨 따르랴. 졸지에 소후로 강등당한 소서노와 더부살이 혹 같은 신세로 전락한 비류․온조 형제는 기가 막혔을 것이고, 또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을 것이다.
대왕이 붕어하고 태자 유리가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면 정권안보를 위해 숙청을 단행, 더부살이들은 모조리 목을 치거나 멀리 내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렇고, 나 유화의 파란만장했던 이승살이는 그렇게 막을 내렸는데, 비록 인간 유화의 일생은 그것으로 끝났지만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여신으로 고구려 백성들의 가슴 속에서 거듭 태어나게 된다. 고구려는 추모대왕이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하백의 외손이라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천손국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히 컸다.
그러한 천손사상이 또한 백성들의 정신무장을 튼튼히 하고 결속력을 뒷받침했다. 그래서 그들은 추모대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에게 성왕, 곧 ‘성스러운 대왕’이란 묘호를 바치고 신상을 만들어 신묘에 모시며 고등신(高等神)이라는 칭호의 시조신으로 받들었다. 또한 추모성왕- 시조신의 어머니 나 유화부인도 여신상을 만들어 신묘에 모시고 부여신(扶餘神)이라고 부르며 자자손손 받들어 모셨다. 그렇다. 나 유화는 고구려의 국모였으며, 고구려와 부여를 잇는 다리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해마다 음력 10월이면 동맹(東盟)이라는 거국적 축하잔치를 베풀어 천신과 지신, 그리고 고등신과 부여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위로는 대왕에서부터 아래로는 하부의 천민에 이르기까지 즐겁게 어울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며칠 밤낮을 두고 신명나게 놀았다. 이는 한 해의 수확을 천지신명과 조상신에게 감사드리고 새로운 한 해의 번성과 안전을 기원하며 부족 간의 유대를 다지는 최대 규모의 한마당 잔치였다.
중국 오랑캐의 책 <예기>에 이르기를 ‘천자는 천지에 제사를 올리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를 지낸다(天子祭天地 諸侯祭社稷)’고 했다. 이와 같은 기준으로 볼 때 대왕이 친히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린 우리 고구려는 중국의 제후국도 아니요 변방의 소국도 아니라, 아시아의 종주국이며 천하의 중심국이라는 강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 당당한 천자의 나라였다.
<삼국사기>가 소개한 기록뿐 아니라 <삼국지>와 <주서> 같은 중국의 사서에도 고구려가 하백의 딸 나 유화를 부여신으로, 나의 아들 추모를 고등신으로 섬겨 국동대혈(國東大穴), 곧 나라 동쪽의 큰 굴에 신상을 모셔두고 해마다 10월 동맹에 대왕이 몸소 제사를 올렸다고 전하고 있지 않은가.
요즘으로 치면 미혼모에 불과했던 나 유화는 이렇게 해서 대제국 고구려의 여신으로 신성화․신격화될 수 있었다. 그러니 나 유화가 그 어떤 여왕을 부러워하랴!
내가 여신으로 영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시조 추모성왕의 어머니라는 사실에도 있지만, 내가 물의 신인 하백의 딸이라는 신분도 크게 작용했다. 또한 망명 직전에 오곡의 종자를 챙겨주었다는 설화는 이미 나의 존재가 백성들의 의식 속에서는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수확의 여신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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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유화부인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성왕의 어머니이니 곧 고구려의 국모이다. 사후 부여신(扶餘神)이라는 이름으로 신격화되어 고구려 군신과 백성들의 지극한 섬김을 받은 고대의 여걸이다.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부인은 어떤 여성이었는가. 얼마나 장한 여걸이기에 추모성왕의 아버지로 알려진 해모수는 버려두고 어머니인 그녀가 부여신이 되어 고구려의 여신으로 추앙받게 되었을까.
버림받은 미혼모에서 대제국 고구려의 국모로, 또 사후에는 여신으로 신격화한 유화부인의 파란만장했던 한 삶을 되짚어보기 위해서 나는 수년 전부터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그리고 이른바 강단 사학계에서 위서(僞書)라고 천대하고 무시하는 <환단고기> 및 중국의 여러 사서에 실린 기록들을 샅샅이 찾아서 읽고 또 읽어보았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중국 동북 3성의 여러 지역의 유적과 유허를 답사하며 취재를 했다. 고구려 초기의 도읍이었던 요녕성 환인시와 길림성 집안시는 물론이요, 추모성왕과 유화부인의 출생지 동부여가 있던 곳으로 비정되는 흑룡강성 하얼빈시와 인근 송화강 유역 곳곳을 찾아다녔다.
이 소설에서 나는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주몽이 아니라 추모로 썼다. 왜냐하면 이는 고구려 사람들 스스로 그들의 시조 이름을 주몽이 아니라 추모로 불렀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없는 두 가지 증거를 들겠다.
고구려의 황성이 있었던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영락태왕(永樂太王), 시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훈적비 첫머리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예전에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를 세우실 때에 북부여로부터 나오셨는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날 때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娘 剖卵降世 生而有聖)’.
또 같은 지역에 있는 대사자(大使者) 모두루(牟頭婁)의 묘지명에도 시조 추모성왕은 ‘본래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하백의 외손이며 일월신의 아들이다(元出北夫餘 河泊之孫 日月之子).’라고 했다. 이처럼 고구려 사람들 자신이 새긴 기록을 믿지 않고 그로부터 700년이나 뒤에 쓰인 <삼국사기>나 중국의 기록을 더 믿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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