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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로마에 입성하다
사도행전 28:11-2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이며, 부활절 마지막 주일로 주님의 승천주일이다. 다음주일은 성령강림주일이다.
승천일은 부활 후 40일 째 되는 목요일인데 이 날에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과 작별하고, 하늘에 오르신 사건을 기억한다. 그날 목요일에 십자가에 걸린 흰 천을 내린다.
어제 한국정교회 대주교좌교회를 방문하였다. 이번 성지순례 중 이스탄불에서 세계정교회를 총대주교를 예방할 일정을 주선해 준데 대해 대주교에게 감사를 드리고, 그리스 방문 소감도 나누었다. 마당에서 외국인 신자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서로 “크리스토스 아네스티”, “알리토스 아네스티”라고 인사하였다. 나는 미국 텍사스에서 온 남자와 그렇게 인사하였다.
우리도 정교회 사람들처럼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정교회 서점에 주문한 이콘을 찾으러 들렀다가 <아토스 성산의 수도사들>이란 책을 구입하였다. 이름 없는 남자 수도사들에 대한 전설 같은 일화를 담은 이야기책이다. 거기에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네”라고 말하기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 사례가 담겨있었다.
아토스 섬 쿠트루무시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평생 영적인 삶을 살던 하랄람보스 수도사가 독감에 걸려 몸져누웠다. 나이든 그는 점점 일손이 부족해진 수도원에서 무리하게 일을 하였다. 수도원에서 도서관과 나무를 심고 관리하는 일과 성가대원을 맡았다. 그를 진찰한 의사는 곁을 지키던 수도사들에게 몇 시간 후면 그가 세상을 떠날 것이니, 그를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자 침대에 누워있던 하랄람보스 수도사가 말하였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이번 부활절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네’를 말하기 전까지 결코 이 세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두 달이 다 되도록 더 살았고 마침내 부활절을 맞았을 때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네”라고 말하였고, 성체성혈(성찬)을 받은 다음 다른 세상을 향해 떠났다.
오늘은 부활절 마지막주일이다. 우리도 마지막 날까지 주님의 부활과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심을 고백하며 찬양하길 바란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1)
오늘 설교제목 ‘바울이 로마에 입성하다’는 마치 로마일보의 1면 타이틀 기사와 같다. 실제로 당시 뉴스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사도 바울의 로마 행 여정은 남다른 화제였다. 그는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가까스로 로마에 도착했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류감옥 마메르티눔이었다.
사도행전 27-28장은 사도 바울이 얼마나 큰 고난 끝에 로마로 압송되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체포되었는데,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모함하고, 심지어 살인을 음모하자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그래서 죄인의 몸으로 로마로 향하였다.
로마로 가는 뱃길은 멀었다. 종착지 로마에서는 희망은커녕 죽음이 기다릴 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 지중해에 겨울이 닥쳐 항해가 어려웠다. 그래서 선주와 바울을 호송하는 관리들은 그레데 섬 서쪽 뵈닉스 항으로 가서 겨울을 지낸 후 봄에 지중해를 건너기로 했다. 그런데 그레데 섬 남쪽으로 가까이 붙어서 조심조심 뵈닉스 항으로 항해하는 도중, 졸지에 겨울광풍 유라굴라를 만났다.
배는 광풍에 휩쓸렸고, 지중해 한복판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끝없이 밀려갔다. 결국 알렉산드리아호는 무려 14일 동안 표류한다. 별도 달도 볼 수 없는 그 캄캄한 절망의 순간이 13일 동안 지속되면서 모두가 희망을 잃었다.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한탕 큰 몫을 꿈꾸는 상인, 공무로 로마에 가는 고급관리, 죄수를 호송하는 군인들 그리고 쇠사슬에 매인 채 호송되는 죄수가 있었다.
비록 사람들 중에 가장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죄수에 불과했으나 바울은 오직 바울만 희망을 품고 있었다. 표류 13일 째,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27:24).
그리하여 바울은 14일째 되는 날, 풍랑과 함께 씨름해 온 사람들을 향해 담대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7:25).
얼마나 간결하고 위대한 선언인가?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네!”
바울은 자신의 목숨이 선장이나 선주가 아닌, 호송부대를 지휘하는 로마 백부장이 아닌, 광풍과 어두운 밤바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의 고백은 자기의 삶에서 그 어둠과 그 풍랑과 그 겨울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람은 인생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인생의 겨울 한복판에서도 다가올 부활의 봄을 기다린다. 그것이 믿음이다.
2)
바울의 로마 행은 이미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 같았다. 목적지 로마는 재판을 받을 곳이었고, 바울의 신분은 더 이상 미래를 알 수 없는 매인 몸이었다. 로마라는 도시는 압도적이었다. 죄인인 바울은 얼마나 기가 죽었을까?
성지순례에서 이탈리아 여정을 안내해 준 로마연합교회 홍기석 목사는 바울의 로마 행을 여러 차례 답사하여 기록한 <몰타에서 몽블랑까지>를 썼다. 이 책에서 그는 바울의 로마 행을 ‘제4차 전도여행’이라고 불렀다.
14일의 풍랑에서 겨우 구조된 멜리데가 지금의 몰타 섬이다. 섬 전체가 사도 바울을 기념하는 유적지라고 한다. 그곳에서 겨울을 난 바울 일행은 이제 ‘수라구사(시칠리아 섬)- 레기온- 보디올- 압비오 광장- 트레이스 타베르네’를 거쳐 로마로 들어온다.
바울이 탄 배는 이탈리아 반도 최남단 레기온을 거쳐 마침내 지금의 나폴리 북쪽에 위치한 보디올 항구에 정박하였다. 바울은 그곳에서 내렸다. 사도행전 본문에 그 감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14).
바울은 보디올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처음 만났지만, 소문만 듣고도 그를 진심으로 환대하였다. 게다가 더 머물다 떠날 것을 간청해 7일을 함께 하였다. 바울은 크게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과 동행하신 증거였다.
그리고 압비오 국도를 따라 로마로 올라가는 데, 로마의 교인들이 바울을 맞으러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나왔다. 로마가 점점 가까워 올수록 바울인들 두려움이 없었을까? 그는 자신을 마중한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 덕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였고, 점점 용기가 생기고 담대해졌다.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15).
이렇게 손님을 환대하는 사람, 믿음과 사랑으로 서로 격려하는 사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성지순례 중에 로마에서 ‘바울 참수터- 베드로가 돌아 선 쿼바디스 도미네 교회- 카타콤 무덤교회- 바울이 걸어 온 아피오 거리- 구류 감옥 마메르티눔’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여행 중 가장 숙연한 시간이었다. 바울의 참수터는 지금 로마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이 관리한다.
바울 참수터에서 우리 일행 중 대표로 기도한 분이 바울의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디모데후서 4장에 있는 말씀은 바울의 묘비명에 어울릴만하다. 마침내 내 생명이 희생 제물로 드려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바울의 고백 속에 그가 살아온 고난의 생애가 함축되어 있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들어 보자.
“나는 이미 피를 부어서 희생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가 왔습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딤후 4:6-8).
여기에서 바울이 고백한 ‘떠난다’는 의미는 세 가지 뜻을 담고 있다. 첫째는 평생 자신이 메었던 멍에를 벗긴다는 뜻이고, 두 번째는 종의 발목에 묶인 족쇄를 늦춘다는 뜻이며, 셋째는 이동을 위해 천막의 로프를 푼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이제 자유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죽음은 ‘떠남, 자유, 해방, 새로운 길’ 그리고 다른 세상을 의미하고 있다. 로마에서 사도 바울처럼 그는 재판을 앞둔 죄수의 신분임에도, 미래를 모르는 감옥에서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싶다.
바울은 마침내 로마에 도착한 직후에 로마 유대인 유지들을 초청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다. 비록 부자유한 몸이지만, 바울은 자유인보다 더 자유롭게 행동하였다. 자기가 죄인이 된 것은 바로 우리 민족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고 담대히 말하였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바울의 행적을 이렇게 보고하면서 마무리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28:31).
3)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며, 모든 세계를 향한 선교사이다.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나지만, 바울의 희망마저 끝을 맺은 것은 아니다. 만약 28장이 끝이라면 색동교회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의 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모든 교회는 사도행전 29장을 기록하는 교회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새로운 믿음의 장을 기록한다는 희망으로 살아간다.
성지순례를 진행하면서 가장 신경 쓴 일 중 하나가 예배였다. 성지순례의 바쁜 일정을 핑계로 예배를 대강대강 해치우듯 드리는 팀이 많다고 들었다. 일부러 주일예배를 로마연합감리교회에서 드리도록 일정을 짰다.
미리 모든 참가자가 함께 부를 특송을 연습하면서 자주 웃고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주일 오전에 막 바울의 고난의 현장을 보고 온 터라 모두 숙연해졌다. 찬양곡이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 성’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목이 메었다고 했다.
바울처럼, 또 아토스 섬의 하랄람보스 수도사처럼, 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간 사람들처럼 누구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들은 삶의 멍에를 후회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할 것이다. 사실 우리도 누구나 자기 고유의 멍에를 메고 산다.
신학교 입학하면서부터 감리교 목사는 세 가지 준비를 잘해야 한다고 누누이 들었다. ‘설교할 준비, 이사할 준비, 죽을 준비’이다.
처음 미국으로 건너간 감리교 전도자들은 서부 개척시대에 맨 앞장에 있었다고 한다. 서쪽으로 새로 깔리는 철도와 함께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출하는 서부개척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위험을 무릅쓴 이런 개척자들 덕분에 감리교회는 미국전역으로 확장되는 결과를 얻었다. 얼마나 위험하고 또 위험한 프로티어의 삶이었던가!
그래서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교단이 되었다. 감리교 목사들은 1년에 한 번씩 연회 때마다 모여 이런 찬송을 불렀다. 유감스럽게도 이번 찬송가에는 사라졌다. 찰스 웨슬리가 작사한 ‘생전에 우리가’(통일찬송가 280장)이다.
“생전에 우리가 또 다시 모였네. 예수의 보호하심을 다 찬송하리라/ 주 예수 은혜를 힘입어 살 동안 싸움터 같은 세상에 두려움 없었네/ 주 예수 변찮는 큰 사랑 베푸사 이때껏 인도하셨고 늘 인도하시리/ 구주의 권능을 힘입고 살았네 그 은혜 찬송하려고 이곳에 모였네.”
참 비감한 찬송이다. 그들은 살아서 다시 모인 일에 대해 감사한다. 그리고 내년에도 살아남아 연회에서 다시 만나자는 그런 가사이다. 예수께서 보호하시고 은혜 베푸시길 간절히 사모한다. 초기 감리교 전도자인 조지 화이트필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의 삶을 책임지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의 죽음을 책임지실 것이다.”
바울의 말년을 보라. 그는 우리에게 기쁨, 겸손, 영광의 길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 역시 부활을 전할 증인의 사명, 복음 전도와 평화를 전할 사명을 지닌 사람이다. 고난당한 이웃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풀만한 그리스도인이다.
바울은 우리를 향해 도전한다. 먼저 하나님의 복음에 참여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살아가라. 가장 큰 기쁨은 가장 위대한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런 하나님의 은총이 색동교회와 또 나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