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바람에 낙엽 한 잎이 또르르 소리를 내며 내 발길에 날려 와 멈춘다.
다른 잎은 어디가고 꼴랑 한 잎이 날려 왔을까 하고 가던 발길을 멈추고 한참을 내려다보니 낙엽은 이미 어미와 작별을 하고 험한 세상을 유랑했는지 상처투성이다.
같은 나무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갈 곳은 각자 다르다.
바람이 어디로 실어 가느냐에 따라 인간이 없는 곳으로 가기도 하고 그냥 휩쓸려 냇물에 정처 없이 유랑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바다에 이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마지막 한 몸도 맘대로 못하고 물을 머금고 이내 곧 강바닥에 내려앉아 썩어가고 있을게다.
내 발길에 멈춘 낙엽은 윤회의 법칙대로라면 아마 몰라도 인연이 존재했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어떤 관계였을까?
나무와 나뭇잎의 관계처럼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가끔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기도 하고, 남보다 못한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더러는 있다.
관계는 늘 서로가 만들어 간다.
별일 없을 거라고 무관심해지면 흔히 말하는 남보다도 못하는 관계로 남을 것이요. 작은 관심을 가지고 산다면 그리움의 대상으로 따듯한 느낌이 존재하는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흔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아무 일 없으면 잘 살고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하고 살게다.
부모나 자식이나 다들 마찬가지로.
우린 이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 무관심이 서로를 잊어가는 줄도 모르고 가끔 생각이 나도 잘 있겠지 하는 대수롭지 않은 생각으로 망설이다보면 그것이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OUT OF SIGHT OUT OF MINE 이라는 얘기가 있듯이 눈에서 멀어지면 결국은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짧은 자구의 얘기가 가만히 살면서 겪어보면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이니까 관심이 갖게 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면서도 항상 생각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음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친구건 가족이건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룰인 것 같다.
자주 만나는 사람은 항상 내속에 존재하지만 자주 만나지 않는 사람은 물론 간혹 어떻게 살까 하고 궁금증이 들기도 하지만 이내 곧 잘 살고 있겠지 단정하고 관심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굳이 사는데 큰 불편함이 없다면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들의 보편적인 생각 일게다.
나 또한 그렇다.
가끔 한잔 술이라도 먹으면 괜스레 용기백배하여 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곤 하지만 맨 정신으로 보고 싶다는 얘기도 잘있냐는 인사도 잘하지 못하고 산다.
산다는 것이 다 그런 거겠지 하는 나만의 어리석은 생각이 이미 체질화되어 전화 걸어 잘 있냐고 물어봐도 상관없는 일임에도 그냥 잘 살고 있을 거라는 짐작만으로 단념하기가 일쑤라는 얘기다.
사람마다 특색이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간혹 짬을 내어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하고 혹은 카톡으로도 잘 살고 있냐고 궁금증을 표시하고 사는데 어찌된 일인지 관심은 항상 있으면서도 전화나 카톡으로 안부를 묻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잘 있을 거라는 작은 신념만 믿고 무심하게 지나치며 살고 있다.
아내가 수술하고 입원을 했을 때도 아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모르니 궁금해 하지도 않고 나름대로 잘 살고 있고 거리가 너무 멀어 현실적으로 코로나가 만연해서 오고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 그냥 부부끼리 알아서 일을 처리하려 하다가 닷새쯤 지났을 때 아들에게 알렸다.
“엄마가 수술을 하고 입원하고 있으니 전화라도 해서 위로의 말을 전했으면 좋겠다.”라고.
사실 아들은 살갑게 아내한테 전화도 자주했었는데 요즘 들어 회사일이 바쁜지 코로나로 스트레스를 받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한동안 전화가 없어도 으레 잘 살고 있을 거라는 짐작만 하면서 살아오고 있다.
같은 부모라지만 아이들은 특히 아버지에게는 전화를 잘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몰라도 껍데기이다 보니 조금은 대화하기 껄끄럽거나 아니면 그냥 편한 어머니한테 여쭤보면 다 알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게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라고 일러주고 며칠이 지나도 나에게 전화가 없다.
가만히 혼자 생각하지 서럽기도 하고 용심이 생겨 전화를 했다.
“너희는 늙은 애비는 어찌 지내고 있는지 관심이 없는 거니 아니면 무시하는 거니?” 하며 노골적으로 화를 내고서 전화를 끊었다.
사실말해 법적으로도 엄연히 노인네인 아버지인데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면 혼자서 식사는 어찌하고 계신지 혹은 굶지는 않는지 등등 걱정이 되어 한번쯤은 전화로 물어보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 같은데 소식이 없어 속내를 드러내고 나니 괜히 했다는 후회도 들지만 말 안하면 모른다는 진리가 생각나서 잘했다며 혼자 웃기도 한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이것은 드라마의 대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흔히 부부사이에도 오래 살았으니 어련히 알 것이라고 믿지만 모르는 것이 태반이다.
우리네가 독심술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그 사람의 마음을 완전하게 알 길은 사실 없다.
그런데도 알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 속에서 착각하게 되고 어느 날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르면 야속하다 무심하다 등등의 표현을 하면서 혼란스러워 한다는 얘기다.
사실 나도 40년을 살았지만 아내의 마음을 잘 모른다.
그것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사실을 감추거나 생각을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짐작만 존재했을 뿐이지 사실적이지는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겠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수긍하다보니 오랜 기간동안 별탈없이 살아가는 것이고 서로에게 감사할 수 있는 구실로도 존재함을 안다.
다 알면 좋겠지만 굳이 몰라도 되는 부분까지 다 알 필요 또한 없는 것이 우리네의 관계이다.
숨겨진 부분이 나로 하여금 상처받거나 손해를 끼치는 일이 아닐 바엔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것이 속편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자식의 무관심은 때론 화나게 만들고 서운하니까 그냥 소리 내어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그들이 가진 생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전화를 한 후 거의 매일 전화가 온다.
굳이 크게 할 얘기는 물론 없지만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고 있는 늙은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무척 기쁜 것은 사실이다.
물론 너무 멀리 떨어져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와서 케어해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지만 걱정하는 느낌이 존재하는 전화통화는 외롭고 쓸쓸하게 혼자 맞이하는 밤을 따듯하고 평온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아이들의 전화를 받으면 물론 식식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치지만 텅 빈 냉장고속 반찬을 보며 내일은 또 뭘로 한 끼를 떼울까 하고 고민하는 어쩔 수 없는 홀아비 노인 같은 꼴임은 틀림이 없다.
그래도 용기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자식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큰 배경 때문에 아무렇게 먹어도 배부르고 신이 나는지 모를 일이다.
우린 가끔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살 필요가 있다.
그것이 가족 간이건 친구이든 상관없이 솔직한 생각을 드러내야만 상대방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전화를 받고 느낀 점은 나처럼 걱정과 관심은 가지고 있지만 선뜻 표현하지 못하는 애비의 성격을 닮았다며 웃게 만드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표현하면서 살아야겠다.
그 마음을 마음속에만 간직하면 이 세상 누구나 내 속에 있는 진실을 알 수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