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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 의원은 시원시원한 이미지의 정치인으로 한때 여성 총리설이 나왔을 정도의 여걸이다.
195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여성으로만 구성돼 오랫동안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극단 다카라즈카(寶塚)에 입단했고, 이후 연극·영화 배우를 거쳐 TV 사회자로서도 큰 활약을 한 연예인 출신 의원이다. 연예인들의 정계 진출이 활발하던 1977년, 당시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총리 등 자민당의 거물 의원들이 직접 스카우트에 나설 정도로 지명도 있는 인물이었다. 이때 참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후 5선(選) 의원이 됐다. 본명은 하야시 히로코(林寬子)로 ‘오기 지카게’라는 이름은 출신지인 고베(神戶)항의 별명인 오기(扇)와 존경하는 배우인 아와시마 지카게(淡島千景)에서 따온 예명이다.
1994년 자민당을 탈당해 신생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이후 신진당·자유당을 거쳐 2000년 4월 보수당을 결성, 당수를 지내다 그해 7월 제2차 모리(森) 연립 내각에 건설상으로 첫 입각했다. 고이즈미(小泉)내각 발족 후에도 유임, 3년 넘게 건설상과 국토교통상을 지냈다.
2002년 12월 보수신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작년 11월 중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보수신당이 자민당과 합당하면서 자민당에 복귀했다./조선
[1998년] 오부치 게이조 일본 제84대 총리에 선출
← 오부치 게이조
오부치 게이조(일본어: 小渕 恵三, おぶち けいぞう, 1937년 6월 25일 ~ 2000년 5월 14일)는 일본의 정치가, 총리다. 12선의 중의원이며, 1998년 7월 30일 부터 2000년 4월 5일까지 재임한 제84대 내각총리대신이었다. 그는 재임 중이던 2000년 4월 1일 뇌경색으로 갑자기 쓰려져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수상의 직위는 4월 5일 모리 요시로가 승계, 64세의 나이로 5월 14일 사망하였다.
1998년 7월 내각이 발족할 당시 일본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왜냐하면 국민들은 침체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총리를 원했지만 오부치는 그 동안에 맡은 관직이 관방장관(정부 대변인)과 외무장관이 고작일뿐 경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치권에서조차 "3일이면 오래간다"는 소리를 듣는 한편, "식은 피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정작 오부치 본인은 이런 부정적인 의견에 별로 개의치 않고 각계 각층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의견을 듣는가 하면, 빼곡한 일정 속에서도 거리로 나가 국민들의 의견을 듣는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 결과 부정적인 의견이 점차 사라져갔으며, 강력한 경제회생 정책이 빛을 발하면서 최악의 위기에 빠졌던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해 취임 1년만에 지지율이 50%를 넘는 반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나치게 일에만 몰두하고 휴식을 모르는 평소 습관으로 인해 건강 관리에 소홀한데다, 당시 연립 정권을 이루고 있던 자유당의 연정 탈퇴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은 오부치는 2000년 4월 뇌경색으로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결국 회복하지 못한채 사망하였다./위키백과
[1994년] 영국의 추리 소설가 로빈 쿡 암으로 사망
← '로빈 쿡' <복제인간>》(원제 SHOCK)
영국의 인기 추리소설가인 로빈 쿡(63)이 1994년 7월 30일 암으로 사망했다. 뉴욕 태생인 쿡은 의학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의사 출신 작가. 의학정보와 의료계 비리에 정통한 그의 작품들은 최근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지난달 교보문고 집계결과 의학 스릴러 바이러스 (원제 outbreak), 돌연변이 (mutation) 브레인 (brain) 코마 (coma) 등 4작품이 추리소설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들었다.
웨슬리언대학과 콜롬비아의대를 졸업한 쿡은 하버드의대에서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72년 인턴시절을 발표하면서 데뷔했으며, 77년 장기이식과 뇌사문제를 다룬 장편 코마로 본격적인 의학소설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들은 현대사회에서 의료계가 비양심과 결합할 때 얼마나 무서운 해악이 초래될 수 있는가를 섬뜩한 필치로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그가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은 모두 15권으로 작품마다 각기 다른 소재를 사용해 독자들에게 끊임없는 흥미를 유발했다./조선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 발표
국보위는 1980년 7월 30일 과외의 금지를 주안점으로한 교육정상화및 과열과외 해소 방안을 발표. '7.30조치'로 불리는 이방안의 주요내용은 '81학년도부터 대학 본고사를 폐지하고 예비고사성적및 고교내신성적만으로 신임생을 선발' '대학정원 10만명 증원' '졸업정원제 실시' '중-고교 교육과정 축소' '방송통신대학 확충' '교육방송 실시'등이었다.
과외금지방안은 처음에는 규제대상을 모든 공직자를 포함한 사회 지도층 인사의 자녀로 한정했고, 학원수강 금지대상도 중-고교생으로 규정했다가 세부 시행과 정상에서 모든 과외의 금지 및 입시목적의 재학생 학원수강금지로 확대됐다. 국보위가 이날 발표한 방안은 국가적 차원의 과제로 등장한 지 오래된 과외수업의 과열현상을 이번 기회에 뿌리뽑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바타으로 했다./조선
[1971년] 서울외곽에 그린벨트 첫 지정
1971년 7월 30일, 건설부 고시로 서울 외곽지역에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가 처음 지정됐다. 서울 중심부에서 반경 15km를 따라 폭 2∼10km 지역의 서울·경기 땅 454.2㎢(첫 발표 때는 467㎢)의 개발을 묶는다는 내용이었다. 도시의 무분별한 확산과 토지 투기 억제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공식 발표하지 않고 슬그머니 관보에만 실어 밀실행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 사실이 슬금슬금 알려져 해당 지역의 땅값이 폭락하기 시작하자 토지 소유자들이 사유재산권 침해라며 반발하고 나섰으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었다. 정부는 부산·대구·광주 등을 시작으로 1977년 전남 여천 일대에 마지막 그린벨트를 지정할 때까지 총 8차례에 걸쳐 그린벨트를 확대해 갔다. 그 결과 전 국토의 5.4%(16억평)가 그린벨트로 편입됐다.
불만이 많았던 만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겼다. 관리근거가 도시계획법 시행규칙에 불과한데도 이를 개정할 때는 반드시 사전 재가를 받도록 해 결과적으로 군사정권 정책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성공사례’로 남았다./조선
[1977년] 백건우ㆍ윤정희 부부 피랍 중 탈출
← 파리의 이응로 화백집에서 올린 결혼식 당시의 윤정희, 백건우, 박인경씨(왼쪽부터).
1977년 7월초, 재불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박인경을 통해 스위스 취리히의 한 부호가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한다는 제의를 받는다. 박인경은 고 이응로 화백의 두번째 아내로, 이응로와 함께 프랑스에서 생활하다가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인물이다. 백건우는 한 해 전, 이응로의 주례로 영화배우 윤정희와 결혼식을 올린 바 있어 평소 이ㆍ박 부부와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백건우는 윤정희와 5개월된 딸, 그리고 박씨와 함께 1977년 7월29일 취리히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는 부호의 여비서라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여자는 부호의 양친이 유고 자그레브에 있다며 연주지 변경을 요청했다. 공산국가라 내심 찜찜했으나 자그레브행 비행기를 탔다. 백건우 가족과 박씨가 찾아간 곳은 한적한 시골에 있는 3층 집. 있어야 할 부호는 없고 동양인 남자만이 보이자 백건우는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웨이트, 웨이트” 소리를 뒤로한 채 타고온 택시를 타고 유고 주재 미국 영사관으로 달렸다.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투숙했으나 이튿날 아침 객실 문앞에는 북한사람으로 보이는 3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영사관 직원의 도움으로 자그레브 공항을 벗어나 파리 오를리 공항에 내린 것은 30일 정오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다. 이 사건은 박씨가 3차례에 걸친 파리 주재 한국 대사관의 조사요구에 응하지 않아 아직도 미완이다./조선
[1965년]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사망
← 일본 문학에 있어 탐미주의의 선구자였던 다니자키 준이치로.
1965년 7월30일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가 79세로 사망했다. 도쿄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학비 부족으로 중퇴하고 24세 때인 1910년에 와쓰지 데쓰로 등과 함께 제2차 ‘신사조’를 창간한 후 단편 ‘문신(文身)’과 ‘기린’을 발표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에는 ‘스바루’에 희곡 ‘신서(信西)’, 단편 ‘소년’을 발표해 문단의 격찬을 받았다.
문신을 한 뒤 갑자기 몸이 변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문신’은 다니자키 문학을 특징짓는 탐미주의의 신호탄이었다. 그의 작품은 당시 일본에 유행하던 자연주의 테두리를 벗어나 여체를 찬미하고 성의 신비를 응시하여 변태성욕의 세계까지를 파헤쳐 탐미주의·예술지상주의·악마주의의 천재적 신인으로까지 지목됐다. 장편소설 ‘치인(痴人)의 사랑’에서는 ‘인습적 정조 관념이 없는 여성의 변태성욕적 연애’를 뜻하는 ‘나오미즘’이라는 말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후반기에는 고전적인 경향이 강해져서 ‘장님 이야기’ ‘춘금초(春琴抄)’ 등의 원숙한 작품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의 11세기 소설인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현대어로 번역했다, 전쟁 후에는 ‘세설(細雪)’로 아사히문화상을 수상했다.
[1953년] 이승엽 일파 간첩혐의로 기소
1953년 7월 30일 남조선노동당 계열을 비롯한 이승엽·임화·이강국 등 12명을 기소했다. 기소장에는 이들이 미제국주의를 위해 간첩행위를 했으며 남반부 민주역량을 파괴하고 약화시키는 음모를 꾸미는 것과 동시에 테러·학살 행위를 자행하고 공화국 정권 전복을 위해 무장폭동 행위를 했다고 적혀 있었다. 남로당 출신에 대한 숙청은 1952년 12월 15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당의 조직적·사상적 강화는 우리 승리의 기초'라는 보고를 통해 당의 강화와 종파주의의 청산을 강조하면서 표면화되었다. 이승엽일파간첩사건으로 체포된 자들 중 이원조가 징역 12년형, 윤순달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승엽을 비롯한 나머지 10명은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브리태니커
[1935년] 문고본 대명사 ‘펭귄북스’ 출간
← 1935년 최초로 선보인 펭귄북스 10권
1935년 7월30일, 문고본의 대명사 ‘펭귄북스(Penguin Books)’가 세상에 모습을 처음 드러냈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있거라’를 포함한 10권이 이날 발간된 첫 시리즈였다.
당시 영국 노동자 하루 임금의 20분의 1에 불과한 권당 6펜스라는 저렴한 가격에 품위까지 갖춘 펭귄북스의 등장은 초판 2만부를 순식간에 동 낼 정도로 대중의 독서열을 자극했다. 읽을 만한 책은 으레 고급 양장본인데다 가격도 부담스러웠고, 값싼 문고본은 주로 모험소설이나 싸구려 대중소설만을 취급해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펭귄북스는 이듬해 말까지 70여권에 300만부 이상이나 팔려나가 구텐베르크 활자 이래 전례가 없는 독서의 대중화를 촉진시켰고, 문턱이 높은 서점을 피해 주로 가게 등에서 판매하는 새로운 마케팅 기법도 선보였다. ‘종이표지의 보급판 책’이라는 뜻을 가진 ‘페이퍼백(Paper Back)’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펭귄북스의 성공은 미국의 포켓북(1937년)ㆍ프랑스 쿠세즈(1941년)ㆍ독일의 로로로(1950년)로 발전돼 세계는 바야흐로 문고본 시대를 맞았다./조선
[1934년] 부민관 기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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