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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 김대호 / 2011-07-29)
※ 편집자의 辯 :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께서 많은 시간을 들여 작성하신 글 앞에서 서프 편집진의 고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뿐만 아니라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의 무성의하고 부적절한 태도가 지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한편 우리는 ‘희망버스’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일 못지않게 한진중공업 문제가 슬기롭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중지를 모아야 하고 그 역시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희망버스'가 야5당을 한 자리에 앉아 논의의 장을 만들게 하고 與를 압박하여 '조남호 청문회'를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무언가 해법을 찾아야만 하는 이 시점, 김대호 소장의 깊은 고민을 함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결과는 신통찮았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국민 전체를 책임지려고 노력한 김대중, 노무현으로부터 진보가 너무 후퇴해 버렸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사태가 오래가고, 더 큰 쟁점으로 부각되면 한나라당에 환멸을 느끼고 진보를 기웃거리는 민심을, 다시 말해 웬만하면 진보에게 2012년에 기회를 주고자 하는 민심의 뺨을 후려갈겨서 ‘미워도 다시 한 번 한나라당에게 5년만 기회를 더 주자’는 쪽으로 몰아갈 것 같아서 이 글을 쓴다.” - 본문 중 -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처절한 투쟁과 이에 공감하고 연대하려는 ‘희망버스’를 바라보면 나는 솔직히 안타깝고 답답한 느낌이 먼저다.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나는 안도현 시인의 시를 되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남김없이 태운 연탄재 앞에서도 숙연해야 마땅하거늘,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득 실은 ‘희망버스’와 ‘85호 크레인’을 어떻게 함부로 폄하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꿈틀거리는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안도현 시로 눌러왔다. 하지만 ‘희망버스’와 ‘85호 크레인’에서는 한국 자본주의와 조남호에 대한 뜨거운 분노는 선명하게 보였지만, 중국발 구조조정 태풍 앞에 선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와 한국 조선산업과 1700만 노동자와 괜찮은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2000만 명의 희망과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따뜻한 마음과 냉철한 이성과 진보 집권의 한을 품은 ‘희망버스’ 탑승자들은 부산을 오가는 긴 시간 동안 이 문제를 한번 진지하게 논의해 주기를 바란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문제는 작게 보면 악덕기업주의 무자비한 정리해고 문제지만, 크게 보면 중국 조선산업의 일취월장에 따른 한국 조선산업의 구조조정 문제이다. 사실 일본과 한국 조선 산업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노르웨이, 스웨덴, 폴란드 등 유럽 조선산업을 몰락시켰다. 지난 10년 동안은 한국 조선산업이 일본 조선산업을 코너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중국 조선산업이 전 세계 조선산업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중국 조선산업은 근 10년간 건조량과 수주잔량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한 한국을 제쳤거나 제치기 직전이다. 무서운 기세로 한국과 일본의 조선 산업을 위협하고 있다. 산업의 특성상 고부가가치화에 한계가 있기에 생산성이 떨어지는 기업이나 사업장이 먼저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 이렇게 본다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한진중공업의 해외(수빅 조선소) 진출과 도크 규모 및 부지가 매우 작은(8만 평, 현대중공업은 250만 평) 영도조선소의 인력·사업 구조조정은 피하기가 쉽지 않다. 과거에 벌어놓은 돈이 4천억 원-물론 쌓아놓지는 않았겠지만-의 상당 부분을 영도조선소에 쏟아 부어 설비, 장비를 최신으로 깐다고 해도 경쟁력이 바로 생기지 않는다. 설비·장비 투자, 숙련도 향상 등 기술 우위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유럽 조선산업이 왜 망했겠나? 일본 조선산업이 왜 한국에 밀리겠나? 유럽 조선 산업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많은 사양산업(사업장)의 경험을 반추해 보면 한진중공업과 영도조선소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명확하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톤수(규모)는 작아도 부가가치가 높은 배(군함?)를 되도록 많이 수주하고 일부 노동자들은 능력을 키워 필리핀 수빅 조선소의 관리, 감독직으로 가고(이미 한국 노동자 1000명이 가 있다고 한다), 그것도 안 되면 임금삭감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도 하고, 그것도 안되면 해고·전직시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또 전직 관련한 부담은 기업과 정부(지자체 포함)와 노동자(당사자) 3자가 분담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아무튼, 최대 10만 톤을 건조하는 도크에서 20만 톤 배를 수주할 수 없고, 만들어 봐야 밑지는 배를 계속 수주할 수는 없고, 3년이고 4년이고 수주를 못 하면 문 닫는 것 외에 무슨 수가 있는가? 또 건조, 수주 물량이 기존 인력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선진국에서 많이 하는, 노동시간 단축-임금 삭감 등을 통한 일부 고용 유지와 일부 감원 등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물론 물량 부족 내지 가동률 저하가 일시적일 것 같으면 무급순환 휴직으로도 대응할 수 있겠지만, 영도조선소의 물량 부족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일 것 같지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쨌든 중국과 비용을 겨룰 수 있는 필리핀에 조선소를 건설, 운영하는 것은 회사문을 닫는 것보다야 백번 잘한 일 아닌가? 이는 한진중공업의 자본, 사무기술직, 관리감독직, 협력업체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이해관계자들에게 좋은 것 아닌가?
김진숙 위원은 자신의 투쟁의 근거를 이렇게 정리했다. “지금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의 본질은 사측이 이 공장(영도조선소)을 정리를 하고 필리핀 수빅조선소로 옮겨가려는 겁니다. 3년 동안 영도조선소는 수주가 한 척도 없었어요. 필리핀 수빅조선소에서는 63척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단협(단체협약) 위반입니다. 필리핀 공장을 건설을 할 때 노사가 합의를 했어요. ‘필리핀으로 수주를 일방적으로 받지 않는다.’ 그건 영도하고 같이 받는다는 얘기였지요. 그리고 그걸(필리핀 수빅조선소 건설) 빌미로 구조조정하지 않는다는 걸 합의를 했어요. 그것조차 어겼습니다. 170명을 정리해고하고 그 명단을 발표한 다음 날, 이른바 그 수주를 한 척도 못 받았던 무능한 경영진은 174억 원의 주식배당을 챙겨갔습니다. 제가 어떻게 내려갈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요컨대 영도조선소 폐쇄를 막고, 악덕기업주의 단협(약속) 위반 및 제 뱃속 채우기 행태를 고발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기업주의 악덕을 고발하고 항의하는 것은 사회(경제)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악덕 기업주에 대한 항의보다 영도조선소를 유지, 존속시키는 것이다. 그것도 더 많은 고용을 더 오래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결사항전이 이 목적에 보탬이 되는지는 정녕 모르겠다. 2000년~2001년 대우자동차 김일섭 집행부가 구조조정 동의서 거부 등 강경 투쟁을 전개할 때, 핵심 명분은 해외매각으로 인한 부평공장 폐쇄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부평공장은 지금 잘 돌아간다. 하지만, 당시 미처 방어할 생각을 못한 대우브랜드가 죽어 버렸다. GM대우에서 쉐보레로 바뀌었다는 얘기다. 이 투쟁을 반추해 보면 당시 김일섭 집행부의 투쟁노선은 부평공장을 위기에 빠뜨리는 노선이었지, 부평공장 유지·발전에는 보탬이 되는 노선은 아니었다. 부평공장은 2002년 GM의 인수 시 제외되어 2006년 인수될 때까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이때 GM을 설득한 것은 당시 이성재 집행부의 무파업, 온건 노선이었다. 역사적으로 장기 대형 노사분규는 사양화되는 산업(석탄 산업 등) 혹은 사업장(탄광 등)에서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이 1959~60년 일본 좌파의 성지처럼 된 미쓰이 미이케(三井三池) 탄광 쟁의와 영국 노조의 강경파가 주도한 1984년 탄광노조 쟁의다. 이유는 뻔하다. 그곳에서는 대규모 해고가 있고, 결사 항전이 있으며, 진보(좌파) 진영은 이 투쟁을 자본주의의 야만성이나 보수 정치의 모순을 폭로하는 계기로 삼고 아낌없는 지원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업 입장에서도 사양화되는 산업이나 사업장은 어차피 주문 물량도 없고, 공장 돌려봐야 이익도 별로 생기지 않기에 굳이 노조에게 많은 양보를 해 가면서까지 타결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도 이런 측면이 있다. 이런 싸움은 대체로 노조 강경파가 큰 피해를 입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런 점에서 노조의 타협은 이해할만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등극하면서, 한국을 포함한 중국 주변국에서 사양화된 산업과 사업장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조가 강해도 이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명색이 노조인데, 어떻게 대규모 정리해고를 순순히 받아들이겠는가? 당연히 한진중공업 노조는 투쟁을 했고, 비록 굴욕적 타협을 했지만 주객관적인 조건상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는 아직도 700명의 현장직을 포함하여 1400명의 직원과 이보다 더 많은 협력업체(비정규직 포함) 직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85호 크레인’의 목소리는 엄청나게 크고, ‘3자 개입’ 운운하는 말도 안 되는 목소리도 크지만, 이들 목소리만큼이나 경청할 만한 현장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 어디서도 들려주는 매체가 없다. 내가 아는 한, 노사 분규는 절대악과 절대선의 싸움이 아니다. 항시 타협과 절충이 필요한 싸움이다. 그런데 대체로 회사의 처지, 조건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그 내막을 잘 아는 당사자들은 현실적이고, 타협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현장 사람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며, 당장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영혼을 팔아먹는 속물은 아니라고 알고 있다. 한국에서 한진중공업 같은 좋은 기업에서 쫓겨나면 다시는 그 비슷한 수준의 임금과 복지를 보장하는 직장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40~50대 중년 노동자들이 희망퇴직에 응한 것은 조남호의 폭력 때문만은 아니라고 알고 있다. 산업이나 사업장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 때문이 아닐까?
악 소리도 한번 못 지르고 잘려나간 1000명이 넘는 한진중공업 비정규직도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사실 2009년 쌍용차 투쟁 때도 그랬다. 일반적으로 원청대기업에서 1000명을 정리해고 하면, 그 몇 개월 전에 이미 모기업 비정규직에서 최소 1000~2000명, 협력업체에서는 4000~6000명이 일자리를 잃게 되어 있다. 그런데 정리해고가 살인이라는 얘기는 원청대기업 1000명에게만 해당된다. 이유는 뻔하다. 복지매트리스가 얇긴 다 마찬가진데, 원청대기업 1000명은 평소 근로조건이 워낙 높아서 그 낙차가 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은연중에 우리의 머릿속에는 이미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이 되어 있지 않나 싶다. 원청대기업 1000명은 육식동물이라 고기 공급이 끊기지 않도록 신경 많이 써야 하고, 그 10배가 넘는 하청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초식동물이라 신경 안 써도 다 살아가는 존재로! 실제 비정규직과 협력업체에서 일하다가 원청대기업의 경영악화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해고는 큰 고통인 것은 분명하지만 살인도 가정파탄도 아니다. 다른 직장으로 옮겨가는 기회일 뿐이다. 어느 쪽이 정상인가? 선진국은 어느 쪽인가?
내가 아는 한 진보(좌파)의 정치·정책적 헛발질을 양산하는 공장은 취업자(노동) 구조와 실업률과 조직 노동의 위상이다. 한국 취업자 구조의 가장 큰 특징은 2008년 기준 선진국에 비해 7~12%p 낮은 고용률과 20~25%p 낮은 임금근로자(높은 자영업자) 비율이다. 이는 일하고 싶은데 일자리가 너무 없고, 임금 근로자가 되고 싶은데 기업들이 취업 기회를 잘 안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낮은 고용률이 자발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일자리 부족 내지 실망 실업의 산물이라는 증거는 비경제활동 인구 조사에서 드러난다. 이상 비대한 자영업비율도 비자발적인 선택이라는 것은 한국은행 국민계정에서 임금근로자 소득의 총합인 피용자 보수와 자영업자의 소득의 총합인 개인영업 잉여를 각 종사자 비중으로 나눠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높은 자영업 비율은 외환위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1987년 이후 급격히 강화된 노동권과 약화된 자본의 고용 흡수력(자영업자 분해 능력)의 산물이다. 자영업자는 1980년대 내내 착실히 줄어들던 자영업자 비율은 1991년 19.8%를 기록한 후 답보 상태로 되었다. 1997년 20.1%, 1998년 21.2%, 1999년 21.4%로 정점에 달한 후, 점차 떨어져 2004년 19.6%, 2007년 19.1%로 떨어졌다. 한국의 실업률이 항상 완전 고용 수준으로 나오는 이유는 조사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첫째, 실업자로 등록해도 복지혜택이 거의 없기에 조사원에게 굳이 실업자라고 얘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자영업자나 무급 가족종사자로 스며들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군입대, 대학생(휴학생 포함), 고시, 공시를 준비하는 시험 준비생 등으로 경제활동인구에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여성 일자리의 열악함과 육아의 어려움(비용)을 저울질하여 역시 경제활동인구에서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한국 취업자 구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구조적으로 안정되기 힘든 영세기업 근로자 비중이 너무 높다는 사실이다. 2009년 현재 전체 임금근로자 1,680만 명 1~4인 기업 근로자가 30%, 5~9인은 12.5%다. 300인 이상은 14.1%에 불과하다. 비정규직의 압도적 다수는 영세기업에 있고, 여기서는 숙련도와 근속연수 등을 감안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도 별로 없다. 어쨌든 낮은 고용률=비경제활동인구 속에 숨어 있는 수백만 명의 실업자, 낮은 임금근로자 비율=높은 자영업자 비율, 너무 많은 영세기업 근로자 비율을 종합하면 한국은 노동자의 나라라기보다는 실업자, 자영업자, 취약근로자의 나라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의 이해와 요구의 핵심은 고용 안정=정리해고 반대, 임금 인상, 시장(경쟁) 배제, 노동3권 보장 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업자, 자영업자, 취약근로자의 이해와 요구의 핵심은 취업, (도전)기회, 공정 경쟁-공평 보상, 적정한 자본권, 경제 활력(경기 활성화)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직노동은 전적으로 전자를 대변한다. 한국에서 진보적 가치의 핵심이 고용률, 임금근로자 비율의 상향, 노동의 양, 질에 상응하는 처우 체계 구축이 아니라, 정리해고 반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노동의 최저기준(최저임금제 등) 대폭 상향으로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진보(좌파) 정당이 오랜 활동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저조한 지지율을 보이는 것 아닐까? 한국의 정치, 경제적 급격한 쏠림 현상은 소득도 변변찮고 시장의 충격에도 그대로 노출된 자영업자, 영세기업 근로자, (사실상) 실업자의 거대한 규모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커피전문점’ ‘지입제 화물자동차 사업’ ‘노래방’ 등 돈 좀 벌리는 자영업이 생기면 하겠다는 사람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살인적인 경쟁이 일어나는 이유도 높은 소득을 절실히 원하는 유동화된 노동과 고학력 인구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다. 심야시간에 단돈 1만 원이라도 벌겠다는 대리운전자들이 넘치고, 원래 고졸자를 전제로 직무가 설계된 9급 공무원 자리 하나를 놓고 대졸자 수백 명이 경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구조를 뜯어고쳐야 진정한 진보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나는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그렇게 큰 악덕인지 모르겠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는 사실만큼이나 분명한 것은 정리해고를 극악한 악덕으로 여긴다면 기존 고용은 어찌어찌 유지될지 모르지만, 신규 고용은 여간해서 창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정리해고를 순순히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다. 노동권과 자본권(후세대 노동권과 상당히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진보(좌파)는 극단적으로 현 세대 노동권 보호에 치중하고 있다. 당연히 주력 산업의 생산현장은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되어 있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그 어떤 노동조합도-내가 노조위원장이라하더라도-정리해고에 맞서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고 싸워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자본도, 그것이 북유럽 자본이든, 사랑과 자비로 뭉친 종교 자본이든, 외부노동시장 수준보다 월등히 높은 임금을 지불하는 기업이라면, 신규로 정규직=정년보장직을 채용하는 일은 극도로 신중히 할 수밖에 없다. 사실 20여 년 전에는 고졸자라도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같은 좋은 직장에 들어갈 기회가 많았다. 실제 지금 40대의 경우, 공고 나와서 현대차, 현대중공업 생산직으로 들어간 사람이 세칭 일류대 나와서 대우차, 기아차, 삼성차, 쌍용차에 엔지니어나 관리자로 들어간 사람보다 생애 소득이 더 많다. 그런데 이젠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 그곳은 대졸 관리기술직은 드문드문 뽑아도 고졸 생산직은 거의 뽑지를 않으니까! 청년 고용할당제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혹시 고졸 생산직 공채를 한다면 채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사권자나 노조간부에게 수천만 원의 뒷돈을 써서라도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줄을 설 것이다. 진보가 집권을 꿈꾼다면 이 황당한 현실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 대안을 내 놔야 하지 않는가?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철폐가 대안인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은 인간의 수명을 제외한 모든 존재들의 수명이 짧아졌다. 그렇다면 현대자동차, 포항제철 같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영원할 것 같은 기업도 언젠가는 ‘구조조정(정리해고)’이나 파산위기가 닥친다고 보아야 한다. 유럽의 경우 1만 명짜리 원청대기업이나 그 직원이 5명도 안 되는 3차, 4차 협력업체나 생산직 평균 임금 수준은 1인당 GDP의 1~1.5배 수준으로 비슷하기에 구조조정(정리해고)의 충격이 덜하다. 유사시 구조조정이 어렵지 않기에 정규직=정년보장직도 어렵지 않다. 복지 매트리스도 비교적 두텁다. 그러나 한국은 원청대기업과 3~4차 중소기업의 임금 수준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원청대기업의 생산직 평균임금 수준은 1인당 GDP의 2.5(대략 5천만 원)~4배(8천만 원)다. 중소기업은 1인당 GDP의 1~2배 수준이다. 전체 노동자의 30%를 차지하는 1~4인 기업(5~9인은 12.5%)은 이보다 더 낮을 것이다. 복지매트리스도 얇다. 이렇게 낙차가 크니 괜찮은 직장의 정리해고가 일종의 살인행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상향평준화가 가능만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비정규직과 저임금 근로자의 80~90%가 영세한 기업에 있기에, 영세한 기업을 아예 못하게 막아버리면 500만~1000만 명의 실업자는 생길지언정 비정규직도 없어지고, 저임금 노동자도 없어질 것이다. 한마디로 노동자 1700만 명을 700만 명 수준으로 줄이면 상향평준화가 가능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반인륜범죄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어쨌든 한국에만 있는 이 불합리하고도 큰 격차를 문제 삼는 시각을 진보 동네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기껏 들려오는 것은 복지매트리스를 좀 두꺼운 것으로 깔고, 우리나라 최고의 직업인 공무원 숫자 늘리자는 얘기 정도! 나는 노동의 양, 질이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나는 처우 격차를 문제 삼지 않는 자가 과연 진보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1700만 노동자의 최상위 10~20%에 속하는 조직노동과 공무원의 처우가 정상이고 나머지 80%는 (자본에 너무 많이 빨려)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자, 선진국에 비해 10%p, 20%p 낮은 고용률과 임금근로자비율을 끌어올리는 대안 없이, 모든 일자리는 채용과 동시에 정년이 보장이 되는 공무원 수준의 일자리(정규직)를 정상으로 여기는 자도 진보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이 악덕기업주라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수만 명이 ‘희망버스’를 타고 가서 응징할 만큼 ‘극악한’ 악덕기업주인가? 단적으로 그가 실정법이 엄금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검찰에 고발을 하면 될 터인데, 조남호는 사법적으로 단죄할 행위를 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실정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해서 악덕기업주 반열에서 빠지는 것은 아니다. 악덕과 보통을 가르는 기준은 국민정서법이 더 결정적일 지도 모른다. 아무튼, 진보 매체가 주장하는 조남호의 악덕은 다음과 같다. 1) 2010년 12월15일 생산직 1100명의 36%인 400명에 대해 감원(희망퇴직) 계획을 발표한 다음 날, 한진중공업 주식을 주주들에게 100주당 1주(총 48만주)씩 배당했다는 것이다. 당시 1주당 시가 3만 5천 원을 곱해보니 대략 174억에 해당됐다고 한다. 어쨌든 그 며칠 뒤 노조는 전면 파업을 전개했고, 몇 차례 협상을 거쳐서 400명 중 228명이 희망퇴직에 응했고 172명은 지난 2월 정리해고 되었다. (이후 6.27 타협 이후 도합 300명가량이 희망퇴직에 응했다) 2) 한진중공업의 지주회사인 한진중공업홀딩스-그 산하에 한진중공업, 대륜E&S, 한국종합기술, 한일레저, 집단에너지 5개 회사가 있다-가 2011년 2월 52억 원의 주주(현금)배당을 했는데, 그 절반은 대주주인 조남호 회장과 그 아들인 조원국 상무에게 갔다는 것이다. 또 그 며칠 후 조 회장 등 임원 봉급을 2억 원에서 3억 원으로 올렸다는 것이다. 3) 경영상의 긴박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정리해고를 했다는 것이다. 이 외에 근거가 좀 부실한 악덕이 수두룩하다. 영도조선소가 2년간 수주를 못 한 것은 영도 조선소 폐쇄 의도라는 것, 필리핀 수빅조선소는 산재가 특별히 많고, 노무관리도 후진적이라는 것 등이다. 물론 근거는 충분하지만 잘 거론이 안 된 악덕도 있을 것이다. 나도 조남호 일가와 한진중공업이 비록 합법이라 할지라도, 국민 정서상 지탄을 받을만한 경영 행위를 했다는데 대해서 이견은 없다. 아무리 팔지 못하면 소용없고, 회사 망하면 휴지가 되는 주식 배당이라고 해도, 구조조정 계획 발표로 인해 노동자들이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있는 상황에서 이를 발표한 것은 잘못이다. 한진중공업 임원 연봉 평균 2억 원이 동종업계에서 매우 낮은 수준이라 할지라도,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인데 경솔했다. 그러나 지주회사인 홀딩스의 52억 원 배당은 그렇게까지 비난을 받을만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룹 전체적으로 흑자라고 해서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없다면 이는 과거 그토록 문제가 많던 선단식 경영을 하라는 얘긴데…. 사업부(수빅조선소, 영도조선소)별로 가동률이나 수익의 차이가 심하면, 일차적으로 인력 배치전환을 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인력사업 구조조정을 하는 것은 악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경영상의 긴박한 사유’ 문제는 노동위원회와 법원이 비교적 상식적인 판단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조남호가 이들의 판단을 완전히 깔아뭉개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조남호의 악덕 정도를 묻는 것은, 조남호가 용인할 수 없는 파렴치한 경영 행위를 했고, 이를 진보가 정의의 투쟁으로 응징한다면 국민 다수는 말할 것도 없고, 적지 않은 기업주들 조차 이 투쟁을 ‘한국 사회의 희망’이라고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조남호가 그런대로 용인할 수 있는 경영 행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진보가 지금처럼 질기게, 그것도 노조의 고뇌 어린 타협과 영도조선소에 목을 맨 수천 명의 이해관계자들의 판단을 무시한다면, 국민 다수와 대부분의 기업주들은 진보의 집권을 ‘한국의 재앙’이자 ‘절망’으로 여기지 않겠는가? 이는 내막을 비교적 잘 아는 부산 시민들과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스윙(swing)하는 중소기업가들 및 화이트칼라(사무, 관리, 기술직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여론 조사는 왜 없나 모르겠다.
선진국 사례를 보면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반대 투쟁도 전개하지만 동시에 고용유지를 위한 임금삭감안도 제시하고, 지방자치단체는 행정, 재정적 권능으로 고용 유지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물론 노사정이 합심하여 해고와 전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Out Placement)도 기울인다. 이 과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사택 주거권 문제도 해고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처리한다. 그런데 한진중공업 투쟁은 다양한 해고 노동자 보호 대책은 어디론가 묻혀버리고, 무슨 선과 악의 대결처럼 되어 버렸다. 나는 진보가 2012년 대회전에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자신이 섬기는 5천만 국민과 일자리를 원하는 3천만 명, 경제활동인구 2천 5백만 명, 비임금근로자 7백만 명, 임금근로자 1천7백만 명과 이들을 업고 있는 수백만 개의 기업, 산업, 부문의 처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용률과 임금근로자 비율을 어떻게 높이고, 노동 내 격차를 어떻게 작고도 합리적으로 유지할 것인지? 유연하면서도 안정적인 고용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중국 조선산업의 일취월장에 따른 구조조정 충격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지에 대한 장기 비전과 현실적인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세계화, 지식정보화로 인한 시장의 불확실성과 국가의 보호 장벽의 해체로 인한 기업들의 보수적 투자, 고용은 어찌할 수 없어도, 한국 특유의 부채에 대한 과도한 공포(금융기관의 행태와 능력에 대한 불신)와 구조조정이 꼭 필요할 때 기업을 존폐의 기로에 서게 하는 노조에 대한 과도한 공포는 확실히 경감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재벌대기업이 자행하는 인재, 기술 탈취 등 불공정거래에 대한 공포도…. 분명한 것은 조직노동뿐만 아니라 미조직노동도, 노동이 되고 싶은데 못된 사람도 (더 세심하게) 배려하고, 노동을 업고 있는 다양한 처지의 기업도 세심하게 배려하여 과감하게 투자와 고용을 할 수 있도록 해야 진짜 집권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한국 보수도, 진보도 집권 자격에 미달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결과는 신통찮았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국민 전체를 책임지려고 노력한 김대중, 노무현으로부터 진보가 너무 후퇴해 버렸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누구는 좌클릭했다고 하겠지만!) 그래서 이 사태가 오래가고, 더 큰 쟁점으로 부각되면 한나라당에 환멸을 느끼고 진보를 기웃거리는 민심을, 다시 말해 웬만하면 진보에게 2012년에 기회를 주고자 하는 민심의 뺨을 후려 갈겨서 “미워도 다시 한 번 한나라당에게 5년만 기회를 더 주자”는 쪽으로 몰아갈 것 같아서 이 글을 쓴다. 내가 아는 20세기 인류의 역사는 길(과학)을 잃은 뜨거운 사랑, 연대, 신념이 만든 야만의 기념비들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다. 북쪽의 2천만 동포의 신음,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라도 한번 가열차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괜찮은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수백만 명의 청년들, “이렇게 살아 뭐하나”하며 자살을 시도하는 수많은 노인들의 한탄 등은 바로 지금 내 코앞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야만의 기념비다. 나는 ‘희망버스’와 ‘85크레인’이 의도와 달리 우리 시대의 야만, 한마디로 보수 재집권을 위해 복무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제발 내 생각이 잘못됐음을 지적해 달라.
김대호 /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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