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 – 와일드 로봇
오랜만의 영화감상평이다. 딸이 2회차 관람을 했다기에 영화관을 찾았다. 상영기간이 끝나가기 때문인지 극장에는 대여섯명의 관객만이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이다. 진짜 사람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의 이야기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마치 영어로 된 영화이지만 한글 자막이 있었기에 영화를 관람한 후에는 언어는 잊어버리고 오직 내용만이 각인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애니메이션 영화의 특징이 그런 것 아닐까?
영화 와일드 로봇을 보면서 목사로서 내가 느낀 소감은 이 전체 이야기가 마치 성경 이야기를 패러디한 것 같다는 것이다. 우선 야생의 땅은 한편으로는 그토록 찬란하게 아름답고 다른 한편으로는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서 생존을 위한 치열하고 냉랭한 마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지구와 인간 사회를 가장 잘 보여준다. 바로 그곳에 ‘어떤 사명’을 위하여 지음받은 존재가 왔다.
그 사명은 오직 하나, 섬김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모습이기에 배척을 받는다. 그리고 한 영혼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희생한다. 그것은 그의 본래적인 사명이다. 그 한 사람의 희생으로 결국 생태계는 보존되고 회복되고 마침내 화해한다. 그렇게 피조세계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딸은 이 영화를 보면서 오열했다고 한다. 어떤 부분에서 그랬는지 짐작은 간다. 하지만 딸보다 삼십년이나 먼저 태어난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신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리고 성경이 들려주는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런 것이며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았다.
내가 딸과 비슷한 나이에 본 영화가 문득 생각난다. 그것은 예수님의 일생을 다룬 것으로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예수님께 그렇게 고백했다. 그때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오열했다.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을 베드로가 하는 것이었다. 청춘은 그렇게 시리도록 아플 때를 지나가는 시절이다.
요새 들은 교회 음악 중에 이런 가사를 가진 노래가 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많이 아픈데, 내가 노래할 수 있는 건 예수님 때문에…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음이 아름다울 만큼 지쳐도 일어설 수 있는 건, 예수님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이 노래는 청춘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그런데 이 노랫말이 오십대 중반이 된 나의 뱃속 깊이 아리게 하는 것을 보면 고난은 청춘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예수님 영화야!’ 정글의 법칙이 상식인 곳에서 친절이 가장 큰 능력이라고 믿는 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한 인내와 희생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경 이야기의 핵심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성경의 이야기가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어쩌면 그 이야기가 이스라엘 땅에 국한된 그들만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만인의 마음에 울림과 감동을 줄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들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진리는 인종과 종교, 세대를 초월하여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감동과 용기를 준다. 그것이 성경의 진리다.
그런데 이토록 찬란한 진리의 빛이 왜곡되고 일그러질 때가 있다. 그때는 교리의 갑옷이 진리의 생명력을 질식하게 할 경우다. 그런데 그런 갑옷은 때로는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갑옷 때문에 자신이 제대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다윗처럼 사울의 갑옷을 버릴 수 있는 믿음과 청결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과 구원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다.
진리는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서로 공동의 선을 위해서 연대하고 하나되게 한다. 그럴 때 세상은 새로운 질서와 회복을 위한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시청 앞 광장이나 광화문에서 세상을 바꿀 만한 집회가 열릴 때가 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종식시킬 연대가 4.19혁명이었고, 제5공화국의 군부독재를 종식시킬 연대가 1987년 6월 항쟁이었으며, 그리고 박근혜 탄핵을 위한 시민연대가 2016년과 그 이듬해 초까지 열린 촛불집회였다.
2024년 10월 27일 기독교계는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기 위하여 홍보를 하고 있다. 나는 그 모임이 진리에 감동을 받은 국민적 연대가 아니라 진리의 빛이 갑옷에 질식되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전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집회는 한 사람을 살리고 기리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그런데 집단의 이익을 위한 집회는 전국민에게 공감과 호소력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진리를 가슴에 품고 공동체를 살리고자 하는 사람의 헌신이기 때문이다. 두꺼운 갑옷 속에 갇혀 두려움에 떨면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소리는 결코 국민들의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오늘의 교회가 진리를 붙들고 있다면 이런 종류의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이 만든 애니메이션이 세계인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 속에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진리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교회라면 얼마나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겠는가!
진리는 공기나 물처럼 특정한 집단이나 나라에 갇히지 않고 누구에게나 희망과 생명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오늘도 묵묵히 그 길을 따를 것을 다짐해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