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2025.03.23. 사순절 셋째주 예배)
본문 말씀 : 마태복음 27:11-26
주 제 :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라.
1. 사순절 셋째 주일
오늘이 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사순절도 이제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지요. 사순절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며칠 후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리라는 것을 모릅니다. 다만 예수님 혼자서 그것을 알고 있고, 혼자서 그 죽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죽음의 길을 혼자서 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 길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혼자서라도 가시는 거지요. 이런 것이 바로 좁은길일 것입니다. 좁은 길을 혼자서 가야 하기에 더 힘이 듭니다.
예수님만 혼자서 이런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 모두 이렇게 좁은 길을 걸어갑니다. 그 길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혼자서 가셨지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좁은 길일지라도 힘차게 걸어가십시다.
2.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다.
예수님은 유다가 데려온 군인들에게 잡힌 뒤,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 갔다가 이어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넘겨져서 그의 심문을 받은 뒤, 빌라도에게 넘겨졌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고 고발합니다. 빌라도가 실제로 예수가 그렇게 말했는지 예수께 묻지만 예수님은 전혀 대답하지 않습니다.
보통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데 예수님이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자 빌라도가 ’놀라워합니다.‘ 자기 기준으로 봐서는 이상한 것이지요. 이때 빌라도는 이미 예수가 대제사장 부류의 사람들이 시기로 예수를 고발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의 아내도 꿈이 이상하다고 그 사람을 놓아주라고 전갈을 보내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때 빌라도는 명절이 되면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그 관례에 의지해서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지요. 요즈음으로 말하면 국경일에 행하는 일반 사면 특별사면 같은 것이지요. 그 당시 유명한 바라바라는 죄수가 있었는데 예수와 이 사람 중에 누구를 놓아줄까? 물었지요. 당연히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달라고 할 줄 알았겠지요. 그런데 백성들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한번 놀랍니다.
23절을 보시면 어찜이냐?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어의없어 묻지만 잘못하면 민란이 일어날 수고 있겠다 싶어서 얼른 손을 씻으면서 ’나는 무죄하다. 너희가 당하라.‘ 하는데 백성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는 엄청난 대답을 합니다. 그때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인데,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3. 세 가지 사건
성경을 보시면 이 사건을 중심으로 세 가지 사건이 얽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27장 앞 부분에 가롯유다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어요. 예수님을 판 유다가 예수님이 실제로 죄인이 되어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뉘우쳐서 자기가 받은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놓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건이 있었고,
누가복음 23장에 보시면 빌라도가 심문을 하다가 예수가 갈릴리 사람인 것을 알고서 예수님을 헤롯에게로 넘겨버렸습니다. 자기는 심문을 해보니까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겠는데 고소인들이 강경하게 나오니까 자기는 그런 일에 말려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헤롯에게 넘겼어요. 그랬더니 헤롯은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서 혹시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을까 기대하고서 심문을 했지만 예수님이 전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헤롯도 자기도 이런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으니까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이런 사건들이 있었어요.
4. 자기 목적을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는 사람들
이 세가지 사건이 일어나는 중에 그 중심 인물들이 어떤 사람인가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가룟 유다는 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을까요. 가룟 유다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입니다. 그는 아주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그룹의 회계를 맡을 만큼 신실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게 신실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지요. 자신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독립‘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에 따르려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서 예수를 따라다녔어요. 그런데 3년이나 예수를 따랐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독립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고 그에 대해서는 말씀 한마디 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꿈이 무너지니까 그는 그만 예수를 팔아버렸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서 보니까 자기가 한 일이 너무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두번째 대제상과 장로들을 보십시다. 이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현재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그 지위를 누리고 싶었어요. 지금 그대로가 좋은데 그들이 볼 때 예수는 아슬아슬한 인간이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일을 낼 것 같았어요. 그들이 생각할 때는 예수가 백성들을 선동해서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세계 최강의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면 예수가 아무리 신통력이 있다고 해도 도저히 로마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참하게 짓밟힐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은 어느 정도는 자치권을 얻고 있는데 그것마져 빼앗길 것이고, 덩달아 자기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지위도 날라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 예수는 자기들의 지위를 흔들리게 하는 위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세번째로 민중들은 어땠을까요. 그들도 예수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반겼던 것은 예수님이 그 기적과 같은 힘을 일으켜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켜서 자기들에게 자유를 주고, 지금의 지옥 같은 삶에서 건져주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이 바라던 것과는 정반대로 아무 힘도 없이 로마의 군인들에게 붙잡혔어요.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로마 군인들을 물리치던지 아니면 도망이라고 갔으면 좋을 텐데 도망도 가지 못하고 잡혀 있어요. 그래서 화가 나서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도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들의 목표를 이루고 싶어했던 사람들입니다.
헤롯은 더 심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아예 예수가 무슨 기적을 일으키지 않나 해서 기적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이었어요. 예수님을 단지 자기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사람으로밖에 여기지 않았습니다.
5. 그들의 운명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은 전부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조금 섬뜩하지 않습니까?
우선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창자가 터져서 죽었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비참한 죽음을 죽었습니다.
빌라도는 성경에 더 이상 기록이 없어서 모르지만 그후로 빌라도는 바로 로마로 소환되어서 그 지위를 잃어버렸고,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전해지는 소문에 의하면 그후로 그는 떠돌다가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헤롯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나라 자체가 없어져 버리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만든 대제사장과 장로 그리고 민중들이 가장 비참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못박아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어요.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했지요. 그들의 말대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약 30년이 흐르고 난 뒤에 ad 64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렸습니다. 그 전쟁은 3년이나 끌었지만 로마의 디도 장군이 와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무참하게 짓밟아버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맛사다 라는 곳으로 가서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그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전부 자결해야 했습니다. 그 전쟁에서 성전은 완전히 불타서 없어져 버렸고, 그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살 수 없었어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예루살렘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에는 아랍사람들이 들어와서 살았습니다. 아랍 사람들은 그곳이 그들의 고향이 되었는데, 이제 와서 이스라엘이 나가라고 하니까 전쟁이 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부 나라 없는 떠돌이가 되었어요.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말했던대로 ’그 피가 그들과 그 자손에게로 간 것입니다.‘ 그후로 그들은 유럽으로 들어갔지만 그 사람들은 유럽 어디를 가도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는 어디를 가도 냉대를 받았습니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일을 당합니까? 예수를 자기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렇게 이용 당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크리스챤입니다.
6. 내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지 맙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의 삶을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결코 내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나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주님께 간구할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예수를 믿고 그것 때문에 예수를 따라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삶은 좁은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그런 진리의 길 좁은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 간구합니다. 힘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이상한 방향으로 예수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예수를 가져와요. 예수를 잠시 빌려와요. 지금도 광화문에서 여의도에서 집회가 있어요. 텔레비젼을 보면 그곳에서 예배를 드려요. 말씀도 전하고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합니다. 저는 아무리 봐도 이상해요. 저게 뭔가 싶어요. 나도 우파고 나도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건 좀 잘못 되었다 싶어요. 열심히 구호를 외치시는 분에게는 좀 미안하기는 한데 그래도 이상해요.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좋지만, 예수의 이름을 빙자해서 사람을 모읍니까?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사람을 모읍니까? 아니면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 예수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것입니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왜 그곳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합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탄핵 반대 집회를 하는 것입니까? 둘 중에 하나만 해야지요. 예배를 드리던가 아니면 탄핵 반대 집회를 하던가? 결코 탄핵 반대 집회를 위한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