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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수풀孝在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 앞에 서려면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사람의 아들 앞에 서는 것.
이것이 종말에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주님 앞에 설 수 있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이 왜 필요할까요?
주님 앞에 서는 데도 힘이 필요한가요?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일에서 벗어나야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는” 힘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앞에서 종말은 누구에게나 오는데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져서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종말을 맞이하게 해서는 안 됨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은
방탕에 빠져,
술독에 빠져,
이 세상의 근심 걱정에 빠져,
한 마디로 세상에 풍덩 빠져 살다가
느닷없이 세상의 종말과 함께 휩쓸려 사라지지 말고
세상에서 빠져나와 주님 앞에 서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깨어 기도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기도”야말로
세상 것들에 깨어있고 거기서 벗어나게 하는 힘이요,
하느님 앞에서 설 수 있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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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스테파노신부님
- 아줌마가 무서워
로마에 있는 대학들의 정문 앞에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그만 깡통 하나를 앞에 놓고 구걸을 하는 집시 아줌마들을 볼 수 있다. 내가 다니는 라떼란 대학 앞에도 덩치는 투포환 선수만 하고 이빨은 모두 금니로 해 넣고는 ‘배고파요’라는 푯말을 들고 앉아 있는 아줌마가 한 분 있다.
아침에 등교할 때마다 동전 한 닢씩을 준비했다가 드리면서 춥지 않느냐, 덥지 않느냐 인사를 하곤 했는데 그러는 사이에 친해져서 이제는 ‘사람들 지나갈 때는 금니 좀 안 보이게 하라’는 둥 ‘직업의식이 없이 살이 너무 찐 거 아니냐’는 둥 농담까지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최근 며칠 동안 동전을 준비하지 못해서 계속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결국 삼일 째 되는 날 점심을 먹으러 학교 밖으로 나가는데 아줌마가 ‘왜 요즘 이렇게 뜸해?’하면서 따지듯 물어 와서 점심 먹고 다시 학교에 올 때 꼭 챙겨드리겠노라는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하게도 잔돈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시 동전 한 닢도 없이 학교 앞에서 버스를 내려서 눈치를 살피다가 아줌마가 다른 사람하고 잡담을 하고 있을 때 몰래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만 들키고 말았다. 그 큰 덩치를 이끌고 나를 잡으러 달려오는데 빠르기가 이건 완전히 단거리 선수다.
“하하하, 나 봤어요? 아줌마 바쁜 것 같아서......”
“버스 내릴 때부터 보고 있었어. 그런데 살짝 도망가?”
“누가 도망을 갔다가 그래요? 바쁜 것 같아서 그냥 지나친 거지.”
“당신 그렇게 거짓말하는 거 저 위에 계신 하느님은 다 알고 계셔.”
“누가 신부인지 모르겠네. 그런 멘트는 신부인 내가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신부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약속도 안 지키면서 무슨 신부야.”
나는 그 ‘약속’이라는 말에 꼼짝없이 1유로짜리 동전을 그 아줌마에게 건네 줄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참 많은 약속들을 하고 살아왔다.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영원 하자던 그 어린 시절의 철없던 약속부터 사춘기 시절 손가락을 칼로 베어 피를 빨아가면서 내 자신과 맺었던 약속들, 돌아가신 아버지께 드린 약속, 그리고 평생을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겠다는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약속까지 내 지나간 시간들이 이제는 다 기억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약속들로 채워져 있다.
그 수많은 약속들이 얼마나 잘 지켜졌을까? 특별히 ‘종신토록 주님의 삶의 모범을 따르겠다’는 하느님과 교회와의 약속이 순간순간 얼마나 낯설고 무겁게만 느껴졌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약속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순전히 무한한 인내를 가지신 하느님 자비의 덕이다.
혹자들은 ‘약속은 깨기 위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약속은 깨지는 그 순간 다른 이름을 갖는다. 거짓말, 지켜지지 않은 약속은 거짓말에 불과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다. 사람들 사이의 약속은 지켜지는 순간까지만 그 이름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유한한 사람들 사이의 약속은 더욱 신중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맺은 모든 약속을 잘 지키고 싶다. 특히 어린이와 또는 가난한 상대와 맺은 약속에 대해서는 특히 정성을 들여서 지키고 싶다. 혹 나에 의해서 깨진 약속이 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이라도 지고 가고 싶다. 무서운 집시 아줌마 덕분에 머릿속 기억들을 들춰 해묵은 약속들까지 하나하나 떠올리고 지금 다시 그 의미들을 물으니 정말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주께서는 약속하신 말씀을 신속히 그리고 엄격히 이 세상에서 다 이루시리라.”(로마9,28)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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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정호 신부
제 수첩에 기록된 것을 보면, 95년 여름 신학생 5학년이었을 때 여름방학을 하고 모든 신학생들이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주교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세상은 거센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물질주의와 사치, 향락, 쾌락 등 찰나주의의 거센 소용돌이에 쉽게 휩쓸리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면서 거센 물결을 거슬러 갈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늘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돌아가신 이갑수 주교님께서 10년 전에 말씀하셨던 그때의 상황보다 더 어두워진 듯 합니다. 돈의 위력 앞에 힘없이 무너지면서 하느님의 영역인 생명까지, 고귀한 인격까지 사고파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지금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흥청대며 먹고 마시면서,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해 주고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수녀님께서 이런 권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아무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오로지 하느님으로 충분합니다. .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 마음이 현혹되어 스쳐 지나갈 것을 놓지 못해서 연연하고, 붙들고 결국 영혼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중심을 잃고 흔들리게 되는 것을 데레사 수녀님은 분명하게 인식하셨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늘 깨어 기도하면서 하느님 안에서 사셨던 성녀 데레사 수녀님은 세상 일에 맘을 빼앗기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넓은 문으로 몰려갈 때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좁은 문으로 가실 수 있었던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이분처럼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을 신앙인답게 달리생각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기를 쓰고 살고 있는 이 세상 이후에 대해서 누가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까?
인간의 마지막에 관해서 누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습니까?
인간 죽음 이후에 관해서는 누가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까?
인간의 처음과 세상의 근원에 대해서 누가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까?
교회가 아니면 누가 해 줍니까?
이 교회 안에서 깨어있을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 안에서 사제로 사셨던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는 감옥에 있으면서 교우들에게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가지고 있어도 쓸데없다”고 말입니다.
오늘 아침 주님은 우리들에게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복음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흔들리며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마냥 휩쓸려 가고 있는 듯한 우리들 삶을 돌아봤으면 합니다.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수많은 장난감, 모두들 값비싼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싶어하는데.......그렇지만 맞으면 맞을수록 더욱더 중심을 잡고 있는 팽이가 유난히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 부산교구 도정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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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영배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다시 오실 날을 준비하여 늘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우리에게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하겠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노아의 방주와 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회개하지 않은 채 일상의 일에 몰입하고 있다가 멸망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애청자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성향이 잘 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사람마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겠지만 어떤 사람이 하루아침에 마음을 고쳐먹고 새롭게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평소에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가득차 있다면 이러한 습관에서 벗어나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가 결심을 단단히 하여 하루아침에 술을 끊거나 마약을 끊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분명 한 생의 짧은 여정을 살아갈 유한한 존재입니다. 문제는 이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세상살이 자체에 몰입한 나머지 종말의 순간을 맞는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과 그 때, 곧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를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 회개하고 그 때에 잘 맞추어 준비할 것입니다. 저희 성당에서 이주일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그 때가 아마도 금요일 새벽인걸로 기억됩니다. 늦은 새벽시간 인적이 드문 때를 이용해서 도둑이 들었는데 그는 스댄으로 만들어진 정문의 대문을 훔쳐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정문이 휑하고 허전했습니다. 만일 그 도둑이 언제 올지 알았더라면 그 시간에 맞추어 그를 제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역시 그 도둑처럼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항상 우리의 생활을 살펴보고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기도는 예수님과 나를 이어주는 편안하고 독보적인 대화의 장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매순간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기도를 통하여 나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 관철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나의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간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종말의 시간이 슬픔과 공포의 시간이 아니라, 기쁨과 영광의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처럼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소서! 하고 외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맙시다.
그날이 오면 두 사람이 같은 침상에 있더라도, 두 사람이 등산을 같이 하더라도 두 사람이 일상에 평범한 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내버려 둘 것을 말입니다.
정말 필요하고 꼭 해야 할 것은 매일 우리의 삶을 점검하여 기도하는 습관을 지니는 데 있습니다. 하루에 기도할 수 있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도록 합시다.
그것도 어려우면 적어도 아침에 일어나서 정성껏 십자성호를 긋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하루를 당신 안에서 충실히 해 나갈 수 있도록 단 몇 분간만이라도 도우심을 구합시다. 또한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며 주님의 뜻에 어긋난 것에 대해 단 몇 분간만이라도 용서를 청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기도를 많이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순간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은 도둑처럼 닥칠 것입니다.
그러니 늘 회개하고, 늘 새롭게 살며, 늘 깨어 기다리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불어 회개와 새로움과 깨어있음의 은총을 달라고 성령께 청하도록 합시다.
- 부산교구 손영배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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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광현 신부님
예수님은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일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 어떤 것을 올바로 바라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집착과 애착 안에서 사는 삶은 눈을 밝혀 주지 못하기 때문에 주변을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음악을 잘 알지 못하지만 한때 클래식을 좋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걸어 다니거나 차를 타거나 노상 베토벤의 심포니를 듣곤 했습니다. 음악에 빠져 있을 때 옆에 누가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행여나 이 멋진 순간을 방해받지나 않을까 오히려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인 한 분이 제게 “너 베토벤의 심포니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네가 사람들이 사랑하면서 만들어내는 심포니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달으면 더 좋겠어”라는 말을 던졌습니다.
그 순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이 만들어 내는 가장 완벽한 심포니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심포니가 울려 퍼집니다. 오늘 이 심포니를 들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 백광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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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대 신부님
알파요 오메가의 하느님
“늘 깨어 기도하라.”(36절) 이것이 한해 전례달력의 마지막 날에 선포되는 메시지이다.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이를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기 위함이며,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재림하시는 인자(人子)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기 위함이다.
우리가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매일미사의 복음을 묵상한 바에 의하면 인자의 재림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재림의 순간이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묵시적(黙示的) 징조나 표징과 함께 장엄하게 다가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도둑(마태 24,43; 루가 12,39)이나 덫(35절)처럼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거나 어느 것일까 하고 점치려 하지 말라. 잘 못 골랐다간 낭패를 본다. 그러므로 둘 다를 염두에 두는 것이 상책이다.
인자의 재림은 준비된 ‘바로 그 날’에 일어날 사건이 되겠지만, 사실상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데 매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듯이(루가 17,21) 인자의 재림도 반드시 미래의 어떤 사건만은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영광의 몸으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마태 28,20), 인자의 재림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된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더 이상 옛적의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 새 창조를 향하여 그 여정을 시작하였고,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자의 재림은 예수님 편에서 볼 때, 별다른 사건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이 사건은 나자렛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계획이 완성됨을 증명하는 사건이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우주 계시적 사건이며, 영광의 그분 앞에 서게 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독서와 복음말씀을 통하여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의 발췌된 성서를 읽음으로써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성서는 누구에게나 그를 읽는 사람에게 필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그렇다고 성서가 자신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으로 세상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정형(定形)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처음이 어떤 모양이었으며, 그 마지막 또한 어떤 모양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서 또한 인간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그 모양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가 서 있는 극히 제한된 그 자리와 시간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시키며, 전역사의 차원으로 극대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성서는 세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알파(Α)요, 오메가(Ω)이시기 때문이다.
더러는 길게 살고, 더러는 짧게 사는 것이 세상이지만, 누구에게나 탄생과 죽음은 세상의 창조와 종말의 의미를 가지며,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한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는 세상 전역사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 사람들 앞에서는 비록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내가 없으면 창조도 없고 종말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그러기에 스스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나만의 삶을 소중함과 자랑스러움으로 살도록 하자.
그리고 그 삶을 사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들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 그 일을 당신 뜻에 맞게 질서 지워주시고, 용기와 지혜로써 진보하도록 이끌어 주시며, 은총과 자비하심으로 그 마침을 채워주실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