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진 한 장 -44회-
“그러셨군요. 사실 처음에는 가슴이 덜컥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소설의 내용 중에 딸 이야기가
나와서 제가 아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라고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박 시인은 왜 결혼을?”
“결혼이요?”
박 시인은 내 질문을 들으면서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 한다. 그의 눈빛을 보니 전혀 술 마신 사
람 같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가 긴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요. 비록 그런 사연이 있다 할지라도 이제 나이가 사십을 넘어 오십 고개로 가는 중인데, 더
구나 지난 번 그 편집장 같은 여류 작가는 박 시인을 거부하지 않더라 하던데,”
나는 지금 박시인이 말하는 삼인칭의 그가 바로 박시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듯 물었다.
“아! 결혼을 할 수 없었지요. 한 여자는 교통사고로 죽었지만 다른 한 여자는 그 후 어찌 되었는지
모르니까요. 물론 어디에선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의 인생을 살아갈 것은 확실하지만, 더구
나 생활력이 있던 여자였으니까요. 내가 아는 그 여자는 어떤 역경이 와도 충분히 이겨 나갈 수 있
는 그런 여자였으니까요. 하지만 내게 누가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가, 누가 내게 여자를 소개시
켜 준다는 말을 하면 나는 그 여자를 떠올립니다. 아니, 아주 자연스럽게 그 여자가 내 마음을 주장
하는 것 같이 다른 여자를 거부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그렇지요. 십칠 년인지 십팔 년인가 되었네요. 그러니까,”
그의 얼굴에 어둠이 짖어진다. 가로등에서 비추는 불빛의 그림자가 그의 등 뒤에 비쳐서 그런지 그
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 보였다. 나는 두 개나 남아있던 캔 맥주를 따서 하나를 그의 곁에 놓고 하나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이상하지요. 그 여자의 아파트에 가서 그 여자가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 한 후부터 나는 여자
에 대한 그 어떤 욕구나 바람이 없어져 버린 겁니다. 여자가 여자로 보이지가 않더군요. 그러니 여자
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이 무슨 결혼을 생각하겠습니까?”
시간이 꽤 많이 흘렀는지 공원 가까운 도로를 지나가는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는 분명 그에
게 무엇인가 말을 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가 정리되
지 않는다.
“밤이 깊었군요. 시인님 많이 피곤하실 텐데, 이런 말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말을 시인님
께라도 하고나니 속이 조금은 후련해지는 군요.”
12
출판 기념회는 박 시인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문학지를 출간하는 단체들이 많아지면서 몇몇 문학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문학지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무심문학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물
론 곽 시인의 뚝심이 처음 무심문학을 시작하면서부터 계속되고 있었으며, 그 뚝심은 스스로 문인이
라는 자부심으로부터 출발하는 뚝심이었다. 내가 처음 무심문학에 몸을 담게 된 것도 바로 곽 시인의
그와 같은 열정과 사명감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는 말이요. 공장에서 마구 찍어내는 그런 문인을 양산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어요. 많은 문학
지들이 우선 등단이라는 명제아래 수많은 신인들을 배출하고 있지만 때로는 서글프게도 작품성이라던
가. 장래성이 라는 것을 핑계로 문학적 소양이 전혀 보이지 않는 문인들을 제품 찍어내는 것처럼 그렇
게 등단을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 나름의 정당성이야 있겠지만 문제는 그 정당성이 객관
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