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법대 동문, 조성기와 윤석열의 라하트 하헤렙
1970년대 경제성장으로 늘어난 중산층과 지식인층의 교회 유입이 늘어나자 여러 선교단체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기성 교회는 갑자기 성장한 이들을 흡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을 교회로 유인하는데 성공한 ‘온누리’, ‘사랑의 교회’ 등은 아직 나타나기 전이었다. 네비게이토 선교회 , 대학생 선교회(CCC), 구원파 등은 1960년대에는 눈에 띄는 활동을 보이지 못하다가 1970년대의 ‘경제성장’과 ‘대학진학율 확대’가 그들의 선교에 좋은 토양이 되어 주었다. .
기성 교회는 긴장했다. 젊은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많은 젊은이들이 매혹되어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구원파는 자신들의 교회로 끌어들였지만 CCC나 네비게이토는 교회론이 약했다. 그들의 수련회에는 ‘주일성수’를 안하고 교회 밖으로 나간 젊은이들로 가득했지만 기성 교회는 ‘유신철폐’ 보다는 ‘예수님 찬양’을 선택한 젊은이들의 안전한 결정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학생성경읽기 선교회 (UBF)'라는 새로운 선교단체가 부상했다. 창립은 1961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들이 대학가에 나타난 것은 1970년 전후해서 였다. 이들의 등장에 기성 교회도 기성 선교단체도 긴장했다. 무엇보다도 이 단체는 다른 선교단체와 달리 한국 토종이었다. 배사라(Sarah Barry, 미 남장로교 소속)선교사와 한국의 이창우라는 사람이 만나 설립했지만 미국 남장로교가 승인하거나 후원한 단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토종 선교단체라고 부를만 했다. 동시에 한국에서 교세가 가장 큰 장로교의 모교회인 미국 장로교 선교사가 관여한 것도 긴장의 충분한 요인이 되었다.
기성 단체 및 교회의 긴장은 이들을 향한 이단 공격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이단 시비를 거의 벗어났으나 1970년대 UBF는 이단의 대명사였다. 이 시기는 다소 진보적인 미국 북장로교와 보수적인 남장로교가 미국에서 한창 연합을 논의하던 때라 배사라 선교사는 한국에서 그의 보수적인 선교 활동에 더욱 전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설립자 이창우 목사의 독선적인 운영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면서 UBF는 몇 번의 분열을 겪었다. 결국 그는 1977년 미국 시카고로 건너갔다가 2000년 화재로 사망했다. 71세의 많지 않은 나이였다. 1970년대 이후 부정적 평가와 긍정적 평가가 교차하지만 어쨌든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던 인물은 이렇게 허무하게, 그러나 종교적(혹은 극적이거나)으로 세상과 이별했다.
기독교 선교단체의 내부 문제가 일반 소설에 등장하면서 UBF와 이창우의 이름이 세간에 알려졌다. 물론 소설에서는 단체 이름과 이창우의 이름이 다르게 처리되어 있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UBF 이야기였다.
작가 조성기는 85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중편 ‘라하트 하헤렙’과 장편 ‘야훼의 밤’을 통해 UBF의 경험을 다룬 자전석 소설을 내었다. 기독교 선교단체를 다루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문학계에서도 인정받는 소설이 된 데는 1970년을 살아낸 젊은이들의 고뇌와 유신시대에 직접척인 투쟁보다는 절대자로 귀의를 선택하는 과정, 즉 현실과 초월 사이에서의 갈등을 잘 담아 낸 점이 주효했을 것이다.
조성기는 서울대 법대 진학이라는 ‘가문의 영광’을 뒤로하고 소설을 쓰기로 결정하면서 가족 특히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다. 경상남도 고성 출신이면 가문의 영광을 넘어 지역의 영광이다. 그런 무게가 그를 신흥선교단체로 이끌었을 것이다. 거기서 ‘목자’의 지위를 얻고, 독일로 파송된 UBF선교사와 결혼을 하고, 그러다가 탈퇴를 했다. 이 모든 과정이 그의 소설들에 담겨있다.
이 자전적 소설이 전하는 주제는 의외로 단순하다. 조성기는 UBF를 탈퇴했지만 그 시절을 에덴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에덴은 불칼(화염검) 즉 ‘라하트 하헤렙’이 가로 막고 있어 돌아갈 수 없다(창세기 3:24) . 그는 선교 단체와 연을 완전히 끊으면서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나와 통합측 목사가 된 후에 조누가목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이 이름은 UBF에서 받은 이름이다. 에덴 시절을 그리워하는데 돌아 갈 수는 없는 그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름이 조누가인 것이다. 그는 난데없이 교회 개혁의 선봉에 서서 ‘십일조’문제에 천착하더니 한 때는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쳤고, 문학상을 수상 하고,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주류교단의 목사가 된 화려한 이력의 그는 여전히 에덴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에덴은 없다. 하나님이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한 것은 징벌의 성격이 강하지만 추방된 자들에게는 또 다른 선택이 기다리고 있는 해방의 시간이었다. 따라서 라하트하헤렙이 설치된 것은 다시는 에덴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려는 징벌이 아니라 경험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에덴에서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선악과를 먹게 하려는 뱀의 유혹이 있었고, 하와를 향한 아담의 책임회피가 있었고, 수치심이 생겨났다. 그들이 추방당하면서 벗은 몸을 가려줄 옷을 선물로 받았고 선악과를 먹은 덕택에 선악을 구분하는 지혜를 지닌채 그 곳을 떠났으니 그들에게는 해방이고 새로운 도전이었다. 굳이 위험한 화염검을 뚫고 다시 돌아갈 필요가 전혀 없는 곳이다. 오히려 그곳에 뱀은 여전히 있다. 그는 저주받았을지언정 추방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 곁에 뱀(사탄)이 있다는 것은 이미 과거의 에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곳은 에덴이 아니라 새 에덴이며 온갖 협잡이 난무하던 예루살렘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이어야 한다.
윤석열의 행보와 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요즘 부쩍 심해졌다. 영락교회 부설 대광국민학교를 다니면서 한때 ‘목사가 되기를 꿈꿨던’ 그는 군사정권과 권위주의 시대를 에덴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반공을 넘어 ‘멸공’정신으로 무장하며, 4.3 제주의 비극을 폄훼하는 사람을 고위직에 앉히며, 교과 과정에서 5.18을 삭제하고, 시대 착오적인 주적론을 이야기한다. .
검찰권을 ‘라하트 하헤렙’ 삼아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에덴으로 못오게 하며 소수의 지지자들만 데리고 에덴으로 회귀하려는게 그의 목적이다. 미래에 희망이 보여서는 안되고, 무시무시한 라하트 하헤렙을 잊기 위해서는 다가올 세상이 더 혼란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과거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연이은 전쟁발언은 그 선상위에 있는 것이다.
보수적 정치인이건 종교인이건 과거의 에덴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마존 지역에 선교사로 갔다가 그들의 언어를 연구한 끝에 세계적인 언어학자가 된 다니엘 에버렛이 쓴 책 제목, ‘잠들면 안돼, 거기 뱀이 있어’다. 이 말은 에버렛이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아마존 피다한 족이 밤에 건네는 인사라고 한다. 잠을 자더라도 넋놓지 말고 항상 긴장하라는 의미의 인사말이다.
‘실낙원’의 저자 존 밀턴의 '복낙원'에 수록된 영국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에서 사탄이 예수에게 신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려면 돌로 빵을 만들어보라고 말한다. 그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는 곳에서 낙원은 다시 시작된다. 그래서 '복낙원'이다.
복낙원에 수록된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수와 사탄
그래서 예수는 항상 깨어 있으라면서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사탄)이 있어’라고 조심시킨다. 되돌아가서 무서운 ‘라하트 하헤렙’을 통과하는 것 보다 지금 활동하는 불의의 세력과 대적하는게 우리를 훨씬 빨리 새 에덴으로 인도할 것이다.
윤석열의 그런 에덴은 없다.
첫댓글 에덴이 아닌 새에덴으로,
불의의 세력과 대적하기,
'잠들면 안돼, 거기 뱀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