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모든 시인들의 운동장'이라 자처하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현대시 계열 한국문연)을 통하여 시의 세계로 나온 참신한 시인들을 모시고 시 낭송을 통해 삶의 진정성과 치열성을 다시 짚어보는 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등장으로 한국 시단의 질과 모습이 새롭게 고양되어 가고 있음을 봅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출신이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은 문수영, 박예근, 서화경, 엄리대수, 전향 시인 이 다섯 분입니다. 이들을 모시고 독자들과 새롭게 만나는 시 낭송회를 가질까 합니다.
초가을의 문턱에서 이들의 시편을 들으며 의미 있는 저녁 한때를 가지고자 하오니 지역에 계시는 문인들과 전국 『詩하늘』 가족들이 많이 오셔서 시 낭송회로 즐거운 시간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때 : 2005년 9월 23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곳 : 대구MBC방송국 맞은편 삼성화재빌딩 지하1층 카페 '스타지오'
-회비 : 10,000원(저녁, 음료수, 작은 시집, 시하늘 가을호 제공)
-주차 : 지하층 3시간 무료 주차
*시편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안개
-문수영
아픈 몸을 어루만진다. 아버지가 내다버린 녹슨 생애, 나무와 꽃들을 추억한다.
안개는 거대한 공중목욕탕이다. 절망, 희망…… 닿지 않는 상처까지도 씻어 준다. 모두 버릴 수 없는 가슴이고 들판이다.
무덤까지도 맑게 하는 숲, 보이지 않는 속삭임에 귀 기울인다. 그 동안 내가 만난 것은 그림자였을 뿐.
안개는 시인이다. 세상 구석구석 다니며 하나씩 이름을 붙이고 노래한다.
열망한다. 꽃들이 한껏 제 빛을 뿜어내기를. 나무들은 가지를 치켜올리며 실바람에도 잎새를 흔들어댄다.
아무도 안개를 가둘 수 없다. 절벽 끝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새가 되어 날아간다.
겨울, 갈, 여름, 봄 끝없이 피어난다. 죽은 나무의 껍질 속에서도.
우포에서
- 문수영
굳은살 몸 속에다 시침(時針)을 박아놓고
흘러온 구름 위에 울음마저 다 던지면
볼수록 아득한 세상, 봄날은 떠오른다
바람도 숨을 죽인 햇살 가득한 정오
억만년 쌓인 무게 우듬지로 끌어올려
가만히 물 속에 앉아 꿈을 꾸는 나무들
주름도 이 한철에 결 고운 빛이 되나
지우고 다시 필 그 생생한 연꽃 위에
서둘러 잡념을 턴다, 길속에 길을 놓다
*문수영 시인
-동덕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3년 3-4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신인상 수상 (오세영 시인 추천)
9월의 세레나데
-박예근
가을이 저만치서 엿보는데
알콜리즘 나무들은
숲에서 멀찌감치 비켜 서 있다
달빛마저 창살에 걸려 덜컹거리고
창틀 타며 흘러내리던 정감들이
밤이슬 보다 차겁다
개울 건너 선술집 불빛은
몇 시에 귀가할지 알 수 없지만
몰라서 되레 편안한 밤은
제방 넘나들 듯 넘실거린다
베란다에 앉은 사유(思惟)가
오늘처럼 뚫어지게
바깥을 내다본 적도 없었다
구월을 덮는 달빛 춤사위가
몹쓸 어둠을 죄다 쓸어내고 있다.
강과 사람들과 하늘
-박예근
강은 늘 넉넉해 보여 세인들에게 칭송을 받는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누군가 노래를 불러준다
강바닥 드러내도 원성들은 적 없고
사람들은 먼 하늘만 물끄러미 쳐다본다
홍수가 애써 쌓아놓은 제방을 허물거나
약탈자처럼 둑을 넘나들어도 탓하지 않는다
다만 먼 하늘만 바라볼 뿐이다
강은 산자락이든 들판이든 파먹으면 그만이다
제풀에 겨워 넘어져도
사람들은 그를 원래대로 일으켜 세운다
강은 흐벅지게 굽이치고
하늘도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끝없이 너그럽다
홍수가 유입되지 않으면 범람하지도 않고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전까지는 얼굴 찌푸리지 않듯
강과 하늘 사이에 사는 사람들도
침탈(侵奪) 없는 한 저들처럼 태연스레 살아간다
사람들도 때로는 강이 되고 하늘이 된다.
*박예근 시인
-현재 대구대학교 재활심리학과 겸임교수
-원앤원 敎具(문구류 제조) 대표
-여향예원 <시 가꾸는 마을> 회원
-2003년 9-10월호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신인상 수상 (이기철 시인 추천)
바람 소리
- 서화경
몸은 구름 위에 있고
마음은 유리빛 하늘
잔잔한 호수 같은 맑음의 소리는
가는 곳마다 숨차다
주름진 허리띠 하나 둘 푸는 소리
마음 무겁게 따라온 생각들 비우는 소리
세월이 남기고 간 아픈 기억들 지우는 소리
세상의 짐 쓸어안고 구르는 소리
나뭇잎마다
꽃잎마다
소리나지 않은 발걸음 내디디며
차디찬 한줌 재로 남을 때까지
몸은 구름 위에 얹혀 있고
마음은 흐르는 바람 소리
지슬지에 가다
-서화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고인만큼
퍼내고야 평온해진 걸까
걸러진 마음으로
하늘 덮고 산 베고 누워
우주를 담았구나
그의 깊이는 얼마나 되는 걸까
오랜 시간 깊이 빠져 헤어나지 못한 채
산은 세월의 허물을 벗으려
고통에 겨워 선혈을 흘린다
늦가을 햇살들 모두 모여
그의 촉촉한 등줄기 핥아내고 있다
그는 젖은 몸 뒤척이며 일어서려 한다
바람이 길을 낼 뿐
그가 가야 할 길 그 어디에도 없음을
나는 오랜 전부터 알고 있다
늦가을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더 먼 곳까지 날아가는
배설의 씨앗들 아름다운 행위를 보며
아무 것도 아닌 이슬로 돌아가는
길목에 서 있는 자신을 돌아본다
그는 자신이 우주의 한 생명인 줄 모른다
하늘은 그를 가두고 그는 하늘을
끌어당기며 돌아눕는다
*서화경 시인
-동아문예창작대학 수료
-<2000년대 시인회의> 회원 및 <사림시> 동인
-2002년 11-12월호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신인상 수상 (서지월 시인 추천)
거미
-엄리대수
끝없이 올라가고 싶었다
올라간들 다를 것 없는 세상 속을
흙 묻히고 살기보다는 빠질 수 있는 하늘이 좋아
허공에 햇살로 그물막 지어 살았다
관심 두지 않은 온갖 소리들이 기어 올라와
바람 흔들어 내 유리방을 슬그머니 헤집고 달아났다
그럴 때면 두고 온 어린 꽃들과
달빛 가득 고여 있던 옹달샘이
발아래서 고즈넉이 앉아 손짓하여 불렀다
나는 거꾸로 매달려 떠나 온 세상을 말없이 바라본다
뒤집어 바라보는 나무의 새살대는 잎맥은
햇살을 튕겨 연녹으로 해맑게 비쳤고
시끄럽게 다투어 흐르던 강물은
투명한 목소리로 지줄대며 교향악을 연주한다
햇살 꺾기는 각도에 따라 달라 보이던 세상
오를 줄만 알아 허공에 몸 기대었던 나
햇살 소곤대는 토담 틈에 유리집 하나 지었다
담 너머 지켜보던 라일락 꽃나무
제몸 화르르 풀어 던지며 인사하고 있다
어둡던 골목이 환하다
자라지*는 숨어서 하늘을 키운다
-엄리대수
쑥부쟁이 다정스레 모여 앉은 언덕길 위에
기울어져 있는 하늘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세상과 숨바꼭질하는 못물 하나 비친다
하늘가에는 허연 머리카락 늘여 뜨린 노인네
낚싯대 드리우고 참선하듯
일렁이는 먼 숲 응시하고 있다
고주파수 안테나가 촉수 곤두세우면
구름 속에 혼자 울던 새 한 마리
화들짝 걸려 나온다
낚았다가는 풀어놓고 풀어놓았다가 건져 올리며
손바닥 안에 맥없이 올려진 세상 조롱한다
숨어서 하늘을 키우는 자라지
그와 함께 나란히 풀어놓은 낚싯대에는
풀잎 같은 언어들이 또르르르 낚인다
*경산시 남산면 인흥리에 있는 못 이름
*엄리대수 시인
-2002년 <영강지상문예상> 최우수상 수상
-<2000년대 시인회의> 상임위원 및 <사림시> 동인
-현재 경산시청 근무
-2003년 1-2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신인상 수상 (이지엽, 서지월 시인 추천)
카레라이스
-전향
카레라이스를 먹으면
한 번도 만나 적 없는
깊고 검은 눈을 가진 남자가 보인다
한 숟갈 한 숟갈 떠먹는 내 앞에서
그는 손가락으로 밥을 꼭꼭 다져 입에 넣으며
가진 것 없어도 좋다는 듯 웃고 있다
나보다 나은 것 하나 없어 보이는데
반짝이는 맑은 눈빛은 너무나 강하여
기름져 불투명해진 내 몸을 뚫고도
샘솟듯 넘쳐흘러
남루한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한 그릇 다 먹고 일어서자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금만 먹더니
깡마른 몸을 가볍게 일으키며
뒤돌아서 가는데
그의 발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헐렁한 옷이 마치 날개 같아 보였다
가을 엽서
-전향
햇살 따사로운 언덕을 지나
숨막히는 짙은 그늘의 터널을 지나
이제 막 서늘한 가을에 도착했습니다
그 무덥던 배낭 풀어놓고
높아만 가는 하늘 아래 섰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 있는
이 곳 하늘이 얼마나 높고 맑은지
전해야 할 여름 안부 다 잊었습니다
저 빛에 물들고 싶어 나를 펼쳐 놓으면
알게 모르게 짙어진 내 부끄러운 그림자,
맑아져야 할 구석이 너무 깊습니다
며칠 후면 겨울로 가야 하는데
나는 아무래도 이곳을 쉽게
떠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수백 번 또 다시 이곳에 온다 하여도
저 푸르고 맑은 모습 한 자락
내 것이 될 순 없지만,
먼 우주에서 바라보면
이렇게 그 아래 서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그토록 닮고 싶은 가을 하늘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전향 시인
-『대구문학』시 부문 신인상 수상
-문학계간지『시하늘』 편집위원
-2005년 1-2월호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신인상 수상 (이기철 시인 추천)
첫댓글 우가희 님 숙제가 또 나왔습니다. 수고해 주시면 각골난망이겠습니다.
이번 시 낭송회에는 혼자 오시지 말고 여러 님과 함께 오시면 좋겠습니다. 동무해 오는 것 얼마나 좋아요.
가우님 애 많이 쓰시네요. 가고 싶어도 가지는 못하는데...우선 전향님의 시부터 읽었는데. '가을 엽서' 참 좋으네요. 좋은 시를 보면 정말 기뻐요. 다들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꽃사랑 님^^ 함께 하지 못함이 늘 아쉽답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오늘은 시 낭송이 있는 날입니다. 오실 때 혼자 오지 마시고 여럿 동무해 오세요.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