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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기 부인이란, 자기 부정이고 남에 대한 긍정이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14:25~35)
예수님의 제자의 길은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마음에서 내어 버리고 자기 육신의 목숨까지 미워하고 자리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그러나 가장 이해를 정확히 하기 어려운 것이 자기부인리라는 것이며, 실천하기가 또한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 원인은 형제가 나의 잘못과 밖으로 드러나는 죄와 허물의 실상 즉 오물통의 실상이 증명되는 것을 자기부인의 기회로 삼아야 하는데, 자신의 마음의 죄악의 오물통의 실상을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형제 앞에 본질적 차원에서 인정하고 나서, 십자가의 주님의 보혈을 바라보아야 자기부인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육신의 생각의 악하고 사망에 속한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마음과 그러한 성품을 십자가에 못 박는 생활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다. 이 사람은 이렇게 태어나고 저 사람은 저렇게 태어난다. 이 사람은 이런 것을 잘 하고 저 사람은 저런 것을 잘 한다. 이 사람(나)에게 있는 것이 저 사람(너)에게는 없을 수 있고 또 너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는 없을 수 있다. 한 몸에서 태어난 쌍둥이도 각각 다르다. 그래서 한 인생, 인생은 고귀하다. 70억 인구 중에 나는 나다. 나와 같은 인생은 없다. 이 말은 각각 다름 같이 내가 너를 이해하고 너는 나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한 지체이다. 지체는 지체를 이해하고 협조하고 협동하여 선을 이루어야 한다. 서로 다른 지체라고 무시하거나 비판 정죄하면 안 된다. 지체로서 죽어도 못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판단하고 허물하고 요구하는 사람의 죄악이, 그것을 못하는 사람의 타고난 허물보다 얼마나 더 악하고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짓고 있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자기부인이란 무엇인가?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선생은 학생을 학생은 선생을, 상사는 부하를 부하는 상사를 인정하고 받아 줘야 한다. 나와 너의 타고난 모습을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못했다면 회개하고 참회하고 자백하여야 한다. 상대를 허물하고 판단하고, 욕하고, 성내고, 무시하고, 때리기까지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악을 행한 죄악과 똑같음을 뼈저리게 회개해야 한다. 나 자신은 보지 못하고, 나의 자기부인은 없고, 상대(남편,아내,이웃)를 부정하고, 부족과 허물을 지적하는 율법주의 바리새인이 바로 ‘나’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목회자라도 별 수 없다. 자신의 무지몰각(無知沒覺)을 하루라도 빨리 깨닫고 버려야 한다.
본래 타고나기를 지렁이로 태어나서 목사, 사모, 장로, 권사, 집사를 맡은 사람도 있다. 사자, 곰 , 독수리, 참새, 다람쥐, 개미, 거머리, 토끼로 태어나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의 마음 성품을 배우며 자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고, 그 나름대로 독특한 사명적 인생을 살아내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오직 사랑 안에서 오래참고, 기다리며,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만 최선을 다하여 살도록 서로 자신을 늘 부인하면서 상대방을 인정하고, 도와주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신앙과 사역을 마칠 수 있도록 함께 가야 할 것이다.
자기 부인이란, 자기 부정이고 남에 대한 긍정이다.
[고린도전서 2장 10-16절]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종종 우리는 전단에 나오는 표현을 봅니다. “성령 충만 대 성회, 폭포수 같은 성령을 경험하세요. 이 집회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 충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그곳에서 인도하는 누군가가 ‘성령’을 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죠.
제가 너무 부정적인지 모르지만, 그 집회와 강사가 그래서 특별히 신령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기는 민망한 부분도 있는데, 마치 무당이 굿을 하며 선전하듯이, 점쟁이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자랑하듯이, 무슨 부적을 써주는 스님이 영험하다든지.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민망한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의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영적인 일’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혹은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일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일들은 하나님의 것을 영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누군가 대신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조금 쉽게 알고자 하는 얄팍한 욕망은 아닐까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
2천 년 전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문제가 어떻게 우리와 이렇게 같은지, 종교개혁을 공부하며 그 시대의 개혁이 오늘의 개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과 1960년대 가장 강력하게 복음을 전했던 A. W. 토저의 책을 보면서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외침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도 너무 빈약하고 참 초라했던 때, 영성가였던 이용도 목사님의 삶과 설교가 어떻게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적절하게 교훈이 되는지 말입니다. 한국교회 초대사에 영성가로 알려진 이용도 목사님이 1930년에 썼던 일기의 내용입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하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 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육(肉)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라,
인(人)의 예수 -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니라.
이용도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만주 용정에 신학교 동기이자 형 같았던 이호빈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에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답니다. 설교하기 전 준비 찬송을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용도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지 않는 겁니다. 그저 강단 중앙 의자에 쪼그려 앉아 기도만 합니다. 시간이 자꾸 지나 강사 목사님을 쳐다보았지만, 요지부동입니다. 그때 쪽지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형님,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네요.”
그래서 그날 저녁 그렇게 찬양만 하다가 사람들이 돌아갔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주님이 주셔야 하는 것,
성령이 오셔야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쉐인 클레어본이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라는 책에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사람들이 우리를 착하다 칭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면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영적인 흉내를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세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통달하신다”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라는 말입니다. ‘통달’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보니까 ‘어떤 것을 막힘이 없이 환히 다 알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search’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구석구석 다 검색해서 알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엠파스나 네이버와 같은 search engine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다와 같은 인터넷을 샅샅이 이 잡듯이 뒤져서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정보를 찾아주는 검색 사이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통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강력한 search engine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본문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럼 우리에게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죄인 하나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거룩하심’입니다. 더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대낮같이 드러납니다. 그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순결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겸손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교만하게 머리를 뻣뻣하게 들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아니, 지식적으로는 알아도 영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영적으로 알게 된 후에 어떤 고백을 하나요?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아는 특권을 누리게 된 후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위해 가장 귀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영적인 일이 아닐까요?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페리 노블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인생 최대의 문제점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상상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말 그대로 십자가를 건너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십자가 오른편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삶이 편해진다는 오해가 교회 안팎에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완벽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종일 찬양만 부르는 줄로 안다. 하지만 내가 20년 넘게 목회를 하면서 보니 십자가 저편만큼이나 이편에도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죄의 형벌에서는 완전한 구원을 받지만, 죄의 효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구원을 받은 뒤에도 우리는 스스로 죄를 짓고 남들의 죄에 상처를 입으며 여전히 이 망가진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만나 십자가 너머로 건너간 뒤에 우리가 할 일은 완벽한 이미지를 가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고 날마다 그분과 더 깊은 사랑에 빠져야 한다.
예수님은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들과 동행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완벽한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그분의 몸에 완벽한 사람들만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육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이제 우리는 영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함께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께서 가능케 하시는 사역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는 ‘영적’인 것과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혼동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조금 더 명백하게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대비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오늘 본문 13~14절을 보세요.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적인 사람을 희랍어에서는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라고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영적인 사람’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즉 감각적 성질, 자신의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앞부분과 연결해서 보면 성령님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하나님 없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넘어선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욕심과 육혹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해 알래스카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가 당한 비참한 소식입니다. 앵커리지 인근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있습니다. 그런 바다의 갯벌에는 먹을 것이 많지요.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갯벌에 펼쳐진 커다란 조개를 마음껏 주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겠습니까?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 순식간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혼부부가 갯벌에서 조개를 잡다가 그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매력적인 일이 눈에 보이면 지켜야 할 것들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을 우리가 잘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육적인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언젠가 이 부분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좋은 예가 될 듯하네요.
고린도전서 2장 후반부에서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책을 읽거나 학교에 다녀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배웠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영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을 알 수 있는 통로는 영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은 막힘없이 서로 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습니다."
영적이다!
이 말은 때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말일 수도 있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미국신학교 이사회에 참석했을 때 케노샤라는 지역에 사는 한인 가정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어느 정도 성공도 하고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14년 전 한국에서 온 한 가정을 열심히 전도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온 첫해 절에서 운영하는 수련회에 참석하고 온 아이들이 바로 교회 수련회를 가게 되었고 혼란스러웠죠. 계속해서 전도하는 이 가정 때문에 새로 이사 온 한국 분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나는 교회는 안 다녀 혹시 아이 아빠가 목사가 되면 그 교회나 다닐까?"
그런데 어제 끝까지 신앙을 갖지 않은 그 사람이 식사를 도우려 함께 하게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분위기가 되었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저히 목회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그 집 아기 아빠가 지금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고 있네요.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매님!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저분이 목회를 하게 되었네요. 14년 전 한 그 말을 잘 지키세요."
참으로 신기하죠. 그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말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구원하시려는 계획 말입니다. 그분이 왜 목회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그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이야기는 영으로 보이는 것과 이해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들어보며, 나 하나를 위해 일하시는 세밀한 하나님의 손길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육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영분별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분별하느냐는 것이죠.
신앙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분별’입니다.
오늘 본문 15~16절을 보세요.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참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대개 영적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모든 이단이 주장하는 것이 “영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판단할 근거가 없기에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도 합니다.
지난해 또 한 번 세상을 현혹시킨 여자 선지자가 있습니다. “자칭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무당 같은데 말입니다. 영적이라고 주장하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영적인 것의 기준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홍혜선 자칭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대한민국에 12월 14일 오전 4시 30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므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누군가의 집이 노아의 방주가 될 것이니, 그곳으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데 자기 혼자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조국과 가정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그렇게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노아의 방주’란 단지 이생의 목숨을 건지는 것인가요?
참으로 신기한 말을 합니다. 땅굴을 부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땅굴의 존재로 인간의 구원이 좌우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념이 있고, 조국이 있지만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가요?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주님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나요?
매번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돈을 요구한 적이 있으신가요? 삭개오의 집에 방문하셔서,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고, 돈을 요구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무지한가요?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말에 쉽게 놀아나는 것은 아닌가요?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한, 로마서 8장 15절에서도 다시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육에 속한 사람’이 감각적이고, 육신적이고, 욕망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신령한 자’는 영적인 사람인데,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더러운 곳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거듭난 성도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
구원받은 자의 진정한 고백이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도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인격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사 세상을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역자가 욕심이 생길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가?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면 성령이 떠나간 사람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담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난’과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비난은 상처로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이게 하지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아픈 지적은 죽은 살을 제거하고 새살을 돋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난이 있는 곳에는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지만,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곳에는 새로운 생명을 향한 창조적 아픔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중요한 말씀이 있죠?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께만 판단을 받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무엇입니까? 목사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성도와 목사에게 돈으로 사기를 당하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성적인 유혹에 넘어갑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육신의 소욕으로 접근하는 데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4장 16~17절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입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현재 고린도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분열’입니다. 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신령한 판단이 아니라 사람의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죠.
사람의 판단은 자기 기준에 의해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이기심과 교만입니다. 육적인 판단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분열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영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신앙적 열심’을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 교회에서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과 장로님들을 설득해야겠다고, 가르쳐야겠다고,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르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의 깊숙한 곳에는 내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가장 편안했던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니, 제가 약하고 힘들 때였던 것 같습니다. 목사인 제가 누구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저를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할 때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지 않나요? 이 세상은 절대로 ‘힘’ ‘정의와 공평’의 논리로 하나 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또 하나의 힘의 원리가 작용했을 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령한 자의 마음은 ‘하나 됨’에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것을 생각하며 신령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신 사람이라야 신령한 사람이 되고, 신령한 생각을 합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모여야 분열이 치유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은혜’를 압니다.
여러분은 경험하듯이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압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괜히 달라고도 안 하는데 미운 사람이 있고, 그냥 마구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을 받으면 마음이 압니다. 가슴으로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가슴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열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실 때,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이 은혜로 고백되기 시작할 때, 신령한 것이 여러분 속에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여름이 되면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인가요? 더위죠?
더운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아시나요? 그 더위가 없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습니다. 더위가 있어야 가을의 감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위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하고, 늘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는데,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신 사람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그 많은 것이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겸손이야말로 신령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는 사람이야말로 신령한 것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의 삶에서 감사가 사라졌습니까?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만족의 문제, 기쁨의 문제, 자기 존재의 문제, 자기실현의 문제 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아바 아버지로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아바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감사로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 골로새서 1 : 1~8 )
Ⅰ. 「 영과 육 」
스티브 맥베이는 [은혜의 영성 파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육(肉)’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부정적인 육’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육’입니다. 부정적인 육은 우리 삶 속에서 의미 있는 사람에게서 혹은 우리 부모님에게 거절당함으로써 형성됩니다. 그것은 부모가 주려고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스스로 받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걱정하고, 무가치하고, 무능력하고, 실패하고, 용납 받지 못한다는 등의 감정입니다.
이런 감정을 통해 우리의 사고는 ‘왜곡된 생각’을 키웁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접근하기보다, 부정적으로 접근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혼의 영역에서 일어나는데, 그럴 경우 우리의 혼은 하나님을 왜곡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육을 갖고 있는 사람은 왜곡된 자아를 형성합니다. ‘나는 잘하는 게 없다. 하나님이 항상 나를 판단하고 벌을 줄 것만 같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이처럼 부정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은 ‘나 자신에 대해 좀 좋은 느낌을 갖고 싶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육’은 강하고, 성공했고, 유능하며 자기가 하고 있는 일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사람은 ‘유능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 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긍정적 자아를 가졌더라도, 이런 사람도 여전히 육체적으로 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의 육적 모습은 ‘교만, 판단(비판), 자기 의’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부정적 육이든 긍정적 육이든 육을 의지하고 육으로 살 때, 그 결과는 항상 좌절과 갈등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해야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려고합니다. 그러나 육적으로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야합니다.
Ⅱ.
2019년에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同行)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골로새서를 통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골로새 교회가 사도바울과 관계된 것은 에바브라가 사도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들은 에바브라는 자신의 고향인 골로새에 가서 교회를 세웁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서 바울은 에바브라를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에바브라는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에바브라는 주님의 종입니다. 에바브라의 뜻은 ‘사랑스러운’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에바브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에게 복음을 들었고, 교인들은 에바브라에게 복음을 배웠습니다. 에바브라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입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실(信實)’이라는 말의 뜻은 “믿음직하고 착실하다”는 뜻입니다. 믿을 ‘신(信)’에 열매 ‘실(實)’, 즉 신실하다는 것은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 열매가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말은 ‘불신실(不信實)’입니다. 믿음직하지도 않고, 진실(眞實)하지도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신실해야 합니다. 믿음직한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신뢰가 가지 않으면 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신뢰를 받으려면 오랜 시간 충성하고 헌신해야합니다. 하루아침에 신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한결같이 충성하는 사람을 신실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개척자일 뿐 아니라, 골로새 인접지역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골 4:13). 에바브라는 많이 수고한 일꾼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아야 교회가 굳건하게 세워집니다. 일꾼은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꾼이 아니라 ‘말꾼’이 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일꾼은 일하는 사람이지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꾼이 되어야합니다.
Α. 우리는 신실한 성도가 되어야합니다(2).
우리는 ‘성도(聖徒)’라는 말의 본래 의미를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고, 첫 번째 직분을 받으면 집사가 됩니다. 그 다음에 권사, 장로 등의 직분을 받습니다. 보통 성도, 집사, 권사, 장로 순으로 직분을 받다보니 성도가 제일 낮은 계급이고, 그 다음이 집사, 그 다음이 권사, 그 다음이 장로로 계급이 하나씩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도는 직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존귀한 말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입니다. 항상 ‘거룩’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때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란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거룩해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거룩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와 허물이 씻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기에 거룩해진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합니다. 신실한 형제가 되려면 믿음의 요동이 없어야합니다. 언제어디서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신실하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자기본위(自己本位)가 되면,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환경을 탓하고, 사람을 탓하는 것은 자기본위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신실한 성도가 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물론 우리 스스로 노력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께 의탁해야합니다. 주께 맡기면 주님이 이루어주십니다. 신실함이란 나를 주님께 맡겨야 가능합니다.
Β. 신실하다는 것은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5-6).
신실한 성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마디로 말씀을 잘 들어야합니다.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말씀을 듣는 귀가 막히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 생각이 우선이 됩니다. ‘중심(中心)’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신실한 신앙생활은 항상 ‘그리스도중심’입니다. 문제는 이 중심이 그리스도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넘어갈 때입니다. 그때부터 “내 생각에는”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자꾸 자기 생각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것이 문제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다보면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직 자기 생각만 옳다는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막힌 것입니다. 귀가 막히면, 기가 막힙니다. 기가 막히면 우리 영혼이 죽습니다. 본문 5절을 볼까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살아납니다.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면 생명의 작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자라납니다. 믿음이 자라서 충만해지면 신실한 형제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신실에서 ‘실(實)’은 열매를 의미합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믿음의 열매가 맺히는 상태입니다. 6절 말씀을 보면 이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말씀을 잘 들으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될 때, 열매를 맺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것을 막으려고 무던 애를 씁니다. 들을 귀를 막습니다. 딴 생각, 근심, 걱정, 불평, 불만, 원망 등으로 말씀의 귀를 막아버립니다.
Γ. 신실한 일꾼은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7-8).
신실한 성도가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신실한 성도가 될 때, 신실한 일꾼이 될 가능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직분제도가 문제되는 것은, 직분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직분은 계급이 아닙니다. 직분은 한마디로 ‘일’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집사, 권사, 장로’로 크게 세 가지입니다. 신실한 일꾼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일꾼이라는 말에 가장 가까운 직분은 ‘집사’입니다. 집사(執事)는 한마디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원어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사직분은 일하라고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이기에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말만 하려고합니다. 일꾼은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만 하는 사람은 ‘말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막히면 일은 하지 않고 말만 많아집니다. 말이 많아지면, 자꾸 말을 만들어냅니다. 없는 일도 있는 것처럼 그럴듯하게 꾸며내서 말합니다. 성경에 그런 자(者)가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간교한 뱀’입니다. 하와를 찾아온 뱀은 그럴듯하게 꾸며낸 말로 하와를 미혹합니다. 만약에 그 말이 거짓처럼 들렸다면, 하와가 그 말을 들었을까요? 듣지 않았겠죠. 너무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꾸며낸 말이라는 점입니다. 신실한 일꾼이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7-8절을 보면, 골로새 교회에는 ‘에바브라’라는 신실한 일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에바브라는 바나바 같은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변화된 바울과 사도들 사이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성도들과 바울 사이에 다리를 놓았고, 성도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습니다. 8절 말씀대로 그는 “성령 안에서” 그 일을 했습니다. 어떤 이는 다리를 막습니다. 우리는 다리를 놓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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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12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13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14몸은 하나의 지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6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7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온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겠습니까? 18그런데 실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몸에다가 각각 다른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19전체가 하나의 지체로 되어 있다고 하면,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20그런데 실은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21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22그뿐만 아니라,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그리고 우리가 덜 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지체들에게 더욱 풍성한 명예를 덧입히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 24그러나 아름다운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모자라는 지체에게 더 풍성한 명예를 주셨습니다. 25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26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 (고전 12:12-31)
교회란 무엇인가?
마침 ‘청지기 임명식’과 ‘제직수련회’가 있는 오늘, 성서일과표에 따라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 12절로 31절입니다. 새번역 성서는 이 단락에 “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들”이라는 소제목을 붙여놓았습니다만,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주제는 ‘교회론’입니다. 즉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하면 맨 먼저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사람들에게 교회를 그려보라고 하면 대부분이 뾰족한 종탑 위에 십자가가 달려있는 ‘교회당’을 그립니다. 하지만 교회당이 교회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교회당을 세우기 위해 단 한 장의 벽돌도 쌓으신 적이 없습니다. 교회당이 ‘집’(house)이라고 한다면, 교회는 ‘가정’(home)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집과 가정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집이 건물이나 장소를 가리킨다면, 가정은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이렇듯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이지 ‘건물’이 아닙니다. 실제로 교회는 그리스어로 ‘에클레시아’인데, 이것은 사람들의 ‘모임’, 즉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는 인사말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 그리고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성서는 교회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임’이란 말, ‘공동체’란 말이 중요합니다.
여러 종류의 공동체들
그런데 공동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소로킨(Sorokin)이라는 사회학자는 아주 오래전에 공동체를 세 가지로 분류한 바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유형이 ‘집성적 병존’(集成的 竝存)입니다. 집성적 병존은 ‘쓰레기통’을 연상하면 됩니다. 쓰레기통에는 온갖 잡다한 것들이 한데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질적인 잡동사니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 때문이지 필연 때문이 아닙니다. 즉 우연하게 함께 있게 된 것이지, 어떤 필연성 때문에 그 자리에 함께 있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함께 모여 있다고 해서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이질적인 잡동사니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주인에 의해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당해 내버려졌다는 것뿐입니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마침 쓰레기통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한 곳에 모여진 것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러한 병존집단을 많이 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간접적 공존’(間接的 共存)입니다. 이것은 이 강대상 위에 있는 주보, 찬송가, 설교지 그리고 물 컵처럼 서로 직접 상관이 없고 피차에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서로 공존하고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것들은 서로 같이 있을 필요가 없지만 ‘내’가 있음으로 해서, ‘나’를 간접으로 하여 공존합니다. 여러분의 호주머니나 핸드백 속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지갑, 열쇠, 휴대전화, 손수건 등이 있을 것입니다. 여성의 핸드백 속에는 화장품이나 빗도 들어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여러분의 호주머니나 핸드백 속에서 서로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그것을 소유한 여러분의 필요에 따라 함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분의 주머니나 핸드백 속에는 약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어떤 병에 걸렸기에 시간에 맞춰 약을 먹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병이 다 나으면 그 사람의 주머니나 핸드백 속에 약이 들어 있을 필요가 없겠지요. 이렇듯 간접적 관계로 공존하던 상태는 주인(主人) 또는 주원인(主原因)이 제거됨과 동시에 함께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지게 돼 해산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접적인 공존관계는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자본이나 권력 같은 비인간적인 힘들에 의해서 인간들이 간접적인 공존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유기적 공동체’(有機的 共同體)입니다. 유기적 공동체란 숙명 공동체, 운명 공동체를 뜻합니다. 그것은 너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나 없이 네 존재를 생각할 수 없고, 네 기쁨이 내 기쁨이 되며, 내 고통이 네 고통이 되는 그런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의 아픔이 전체의 아픔이 되고, 그 중에 한 일원이 상실됐을 때 기계의 부속품처럼 교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없어진 그대로의 아픔을 지닌 채 살아야 하는 그런 공동체를 뜻합니다. 꼭 필요한 것이 서로 피차 연결되어 도와주고, 어느 한 쪽이 아프면 다른 모든 것들이 동시에 아파하는 그런 관계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 Soma Christi는 바로 이러한 유기적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소로킨의 분석 중에서 우리 서울제일교회는 어떤 유형의 공동체에 속할까요? 집성적 병존, 간접적 공존, 유기적 공동체 가운데 과연 어디에 속할까요? 지금 나와 서울제일교회는 유기적인 관계에 있습니까? 혹시 각자의 필요에 따라 간접적으로 공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너와 나를 넘어서 ‘우리’라는 인식에 도달해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어떤 한 지체의 아픔, 그의 약점, 그의 잘못을 곧 나의 잘못과 약점과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내가 너를 살려주고, 너는 나를 살려준다고 믿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몸에 비유하여 유기적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 지체로 되어 있고, 각 지체는 서로 모양도 다르고 역할도 다르지만, 그 다름으로 인해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전체를 살리는 공동체. 맡은 바 역할에 따라 직분과 직책이 나뉘지만, 그 구별이 계급적 차별이나 가치의 상하로 이어지지 않는 공동체. 아니 오히려 약한 지체, 부족한 이가 더 존중 받고 배려 받는 공동체.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상생(相生)으로 이어지는 공동체가 바로 유기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냥 ‘몸’--유기적 공동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머리는 생각하고 결정하는 일을 맡은 신체 기관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교회란 그리스도의 뜻대로 움직이는 모임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뜻을 실천하는 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그냥 몸이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요, 그냥 모임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보십시오. 만약 머리는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는데, 다리가 왼쪽으로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온전한 몸입니까? 정상적인 사람입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더러 이렇게 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그 말씀(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아무 소용없는 ‘헛소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듯 순종하는 지체들이 없다면 몸은 살아있을 수 없고, 따라서 몸의 일부분인 머리도 살아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교회라는 신령한 몸을 통해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는 함께 서로를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상생(相生)하는 관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을 통해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 말씀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시는지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살아냄으로써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일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은 여러 가지지만, 교회와 관련해서는 ‘대안공동체를 만들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의 질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따르는 대조사회를 건설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증언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 여기서는 현대에 등장했던 대표적인 대안공동체 중 하나인 남미의 기초공동체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남미의 기초공동체
아시다시피 남미의 주류 종교는 가톨릭입니다. 가톨릭은 기독교의 어떤 교단보다도 위계질서가 확고한 교단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신부(神父)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현실에서 기초공동체는 1950년대 어느 날 신부 없는 남미 브라질의 한 시골에 살던 한 노인의 불평에서 시작됐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성탄절이 됐는데 이 노인이 살던 마을에 있는 세 개의 개신교회는 모두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시끌벅적한데, 가톨릭교회만은 불도 꺼져 있고 문도 잠겨 있더랍니다. 왜 그랬을까요? 신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산골까지 가서 일할 신부가 없어서 성당 건물은 있는데 미사를 집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개신교회에는 목사가 있어서 북적거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신교회에도 목사가 없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가톨릭 신부는 중앙에서 파견하고 중앙에서 생계를 책임집니다. 그런데도 갈 신부가 없는 벽촌에 자기가 알아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개신교 목사가 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활기차게 성탄절을 맞았던 이유는, 개신교는 목사가 없어도 교인들끼리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보는 게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신부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하니까 성당에 불도 꺼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씨 신부가 그분인데 그는 신부 없는 성당에 신부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신부가 없어도 종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56년부터 사제 없는 브라질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평신도를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부 없이 미사 드리고 성찬식 하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신부가 없어도 매주 모여서 기도하고 노래하고 각자의 삶을 얘기하고 나누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남미의 ‘기초공동체’(base community)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기초공동체가 촌락들에 뿌리내리자 지도자들은 신앙교육뿐 아니라 전염병을 예방하는 방법과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등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군사독재정권이 어떤 무지막지한 불의를 저지르고 있는지를 알려줬습니다. 그래서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려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걸 ‘의식화 교육’이라고 부르지요. 여기에는 파울로 프레이리가 쓴 억눌린 자의 교육 Pedagogy of the Oppressed이란 책이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누구도 공식적으로 문서로 만들어 선포한 적은 없지만 기초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지켰습니다. 첫째는 공동체 구성원 중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구조를 만들면 안 됩니다. 그 어떤 이유로든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왕따 놓는 것은 예수의 교회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둘째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자유를 누리는 것을 복음의 이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모든 사람’과 ‘구원’ 그리고 ‘자유’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만 구원받고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리고 다른 세상에서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 그리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 교회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직접적인 관계를 지향합니다. 공동체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초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원칙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성원을 차별하는 어떤 구조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외, 차별 따위의 말들은 이 공동체에서는 통용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운영된 남미의 기초공동체는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나중에는 교회의 울타리는 넘어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존재 자체가 선교인 교회
앞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은 “대안공동체를 건설하라”는 것에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것이 잘 표현된 구절이 본문 13절입니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인종차별, 계급차별, 여성차별이 당연시 되었던 당시 사회 풍조 속에서 교회는 차별 없는 대안공동체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초대교회 당시의 세상은 이들을 가리켜 “무차별적으로 주인이건 노예건 귀족이건 평민이건 상관없이 서로를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더라”고 썼습니다. 이렇듯 저들은 믿음, 희망, 사랑 안에서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당신의 교회는 존재 자체가 선교였습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실제로는 선교를 하고 있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대안을 제시하는, 그런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의 교회는 세상의 지배적인 질서와는 전혀 다른 질서를 기반으로 해서 형성된 공동체, 세상의 지배적인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이 이끌어가는 공동체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전에 그랬듯이 오늘도 우리교회더러 대안공동체가 되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른 가치관을 구현하는 공동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공동체, 그래서 세상에 반드시 있어야 할 모습을 갖춘 공동체가 되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교회의 존재이유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교회는 이런 공동체가 됨으로써 존재 자체가 선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9년 한 해 동안 이런 대안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공부하고, 실천하고, 변화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리스도인의 습관(눅22장39-46)
성경본문 : 누가복음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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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평안하셨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나쁜 일이라고 여겨지던 것도 나중에 돌아보면 ‘아 그때 참 그렇게 된 게 다행이다. 하나님께서 선한 일로 바꾸셨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당장 좋은 일이 생겼으면 감사하십시오.
혹시 나쁜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오늘부터 Old & New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올해는 기둥교회 창립 40주년입니다.
지금까지 기둥교회 강단에서 전해졌던 말씀, 특별히 감독님께서 하셨던 설교들 중 몇 편을 골라(Old) 재구성하여(New) 시리즈로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실 것이고 큰 은혜가 넘칠 줄 믿습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
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습관의 중요성
일상생활의 90% 이상이 습관이라고 합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습관’을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이라고 정의합니다.
한자로는 ‘어린 새가 백번의 날갯짓으로 나는 법을 익힌다’는 뜻의 ‘習’(익힐 습)자와 익숙하다는 ‘慣’(익숙할 관)자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반복해서 익숙해진 것이 ‘습관’이라는 뜻입니다.
“습관”은 무의식중에 우리 생활을 지배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인격이 형성되며, 결국에는 인생까지도 바꾸게 됩니다.
서점에서 판매되는 수많은 자기 계발서를 보면 습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책들의 결론은 ‘좋은 습관을 만들어 실천하고, 나쁜 습관을 없애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나쁜 습관을 버려야 하느냐를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습관이나 버릇이 있습니다.
최근에 스마트폰을 사용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스마트폰 사용자들은 하루 평균 34회씩 습관적으로 전화기를 확인한다고 합니다.
전화도 오지 않고, 문자메시지가 안 왔는데도 그냥 한 번 들여다 보고, 이메일이 왔는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는지 … 그냥 들여다보는 횟수가 평균 34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습관 때문에 집중력이 저하되고, 사고력에 방해가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 좋은 습관인지, 나쁜 습관인지 다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좋은 습관 하나를 만들기 위해 많은 의지와 큰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좋은 습관은 위대한 인격을 만들어 주며 성공적이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합니다.
성경에서도 좋은 습관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구습(舊習)은 옛적의 버릇을 말합니다.
구습은 예수 믿어 구원 받고 거듭난 사람이 버려야 할 속성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디모데전서 4장 7절에 “…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고 했습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했는데 예전 개역한글판 성경, 성경에서는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열심히 훈련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예전에 가지고 있던 나쁜 습관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누가 거듭난 사람으로 인정하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버려야 할 습관, 물론 보편적인 모든 사람들이 버려야 할 습관이 있습니다.
- 약속을 어기는 습관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아멘’했으면 아멘한 대로 살려 노력해야 하는데 습관적으로 말로만‘아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예배 시간마다 늦게 오는 습관 사회에서도 약속을 했으면 약속시간 전에 가는 것이 예의입니다.
차가 막힌다든지, 특별한 사정이 생겨 한 두 번 늦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언제나 늦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습관입니다.
- 도박하는 습관
- 불평불만하는 습관,
- 거짓말하는 습관,
-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습관,
술, 담배 없이는 못살겠다고 하는 사람도 병원에서 끊어야 살 수 있다고 하면 다 끊습니다.
술 먹고 담배피우는 것도 습관입니다.
- 다른 사람의 약점과 허물을 들춰내는(흉보는) 습관 … 등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서는 안되는 나쁜 습관들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구습을 버리고 좋은 습관, 축복 받을 습관을 만들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습관 ① - 기도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붙잡혀 가시기 전까지 습관대로 기도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여쭈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 22:42)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기를 구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습관을 가지셨던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신령한 에너지 공급이요, 성령의 충전이요, 새 무장을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장소를 가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실에 앉아 정식으로 무릎 꿇고 한 시간, 두 시간씩 기도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늘 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 아침에 일어날 때, 밥을 먹을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길을 갈 때, 운전할 때, 사람을 만날 때, 일을 할 때 …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해야 합니다.
미사여구를 붙여 멋들어지게 하는 기도만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 오늘을 살게 하셔서 새 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는 모든 일에 간섭하여 주옵소서.’
-‘지금 운전대를 잡고 갑니다. 지켜주셔서 평안하게 목적지에 다다르게 하옵소서.’
-‘이제 수업을 시작합니다. 잘 배우고 잘 익히게 도와주세요.’
이런 짧은 기도에도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호흡 같은 것입니다. 숨을 쉬듯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가 습관이 됩니다.
예수님이 습관이 될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당연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천사가 힘을 더하였다고 하였습니다.(눅22:43)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할 때 비록 힘들더라도 하나님께서 힘을 더해주십니다.
월남 전쟁 때, 적지에 철망을 끊으려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은 군인이 “5시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그 시간이 내 어머니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우리 엄마/아버지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자녀들과 정해 놓은 기도 시간이 있습니까?
아직 기도하지 않는다면 …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시간을 알려주지 않으셨다면 … 오늘부터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알고 심히 괴로워 하셨지만(마26:37),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의하면 “…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 26:40~41)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육신의 잠만 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도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 수면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라고 했습니다.
험한 세상 삶에서 영적으로 잠이 들면 마귀의 먹잇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근신하여 깨어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습관 ② - 예배
누가복음 4장 16절에 보면 또 다른 예수님의 습관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 4:16)
예수님도 예배드리는 것이 습관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예배가 최우선적인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신앙생활의 모든 것에 성공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배’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사용하는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는 온전히 주인만을 드높이는 행동입니다.
무엇을 하든 주인만 생각하고 행동하겠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만 찬양하고 하나님만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행위입니다.
성도는, 예배시간에 갈까 말까 망설이는 자가 아닙니다.
당연히 예배 드려야 합니다.
아직도 주일에 예배드리지 말고 다른 곳에 가자는 유혹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예배의 습관자가 아닙니다.
주일날 친구들로부터 ‘등산가자, 낚시 가자, 놀러 가자’라는 연락을 받았다면 그분은 아직도 예배의 습관이 안된 사람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렸던 내용입니다.
주일에 결혼식이 있다는 청첩장을 받고 가시는 분들 … 여러분이 가야 결혼식이 진행됩니까? 봉투만 보내세요.
직접 참석치 못해도 축하금을 보내면 욕먹지 않습니다.
매주일 예배드리러 가는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주일날 어디가자고 하겠습니까?
한두 번 예배에 빠지고 친구 따라 놀러 간 적이 있기 때문에 예전에 그랬기 때문에 … 같이 가자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늘 하시던 대로’ 예배의 자리에 계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늘 예배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고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저 사람은 주일이면 교회에 가는 사람, 예배드리는 사람’이라고 인식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주일 성수는 약속된 날짜,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속죄함과 치유를 받는 은총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면 당연히 철저한 예배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가 습관이 될 만큼 귀중히 여겨야 하지만 정말 습관이 되어 의미 없이 드리는 예배가 되어 버리면 안됩니다.
예배의 자리를 빠지지 않고 주일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습관이 되어야 하지만 예배를 드리는 마음까지 습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 지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29장 13절에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예배의 자리에 있지만 예배드리는 것 같지만 속마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는 말씀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아멘하는 것 같지만 마음이 떠나 있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예배가 당연한 습관처럼 드리는 필수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만, 중심의 진실함이 없는 습관이 되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습관 - 감사
기도와 예배 이외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습관이 또 있습니다.
<감사>의 습관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아무 것도 없이 가진 것 없이 태어납니다.
우리가 지금 ‘내 것’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사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훌륭한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사는지 알 수 있는 신앙의 척도는 감사하느냐 아니냐입니다.
군대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 소개합니다.
어느 날 저녁식사에 돈가스 반찬이 나왔습니다.
군인들이 식당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앞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니 돈가스를 1인당 2개씩 나누어 주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돈가스를 2개씩 먹는다는 소식에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돈가스 소스가 없었습니다.
부식병이 보급 받을 때 돈가스 한 상자와 소스 한 상자를 가져온다는 것이 실수로 돈가스만 두 상자를 가져왔습니다.
그 때 한 병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스도 없이 돈가스를 어떻게 2개나 먹으라는 말이야?”
그 때 한 고참병이 “야! 우리들은 불평할 필요가 없다. 분명히 지금 어느 부대 애들은 소스만 2개를 먹고 있을 거야.”
[곽주환 목사, 설교 예화 중에서]
같은 사건을 두고 불평을 선택할 수도 있고 감사를 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를 택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평을 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감사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불평하는 것도 습관이고, 감사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습관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습관이 있습니까?
제 친구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설교 중에 ‘오늘 여러분께서는, 오늘 우리는 …’하며 ‘오늘’을 계속 반복하며 설교하는데
듣다보니 오늘 이라는 단어만 귀에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목사님을 만나 30분쯤 대화를 하는데 ‘다시 말해서 … 다시 말해서 …’라고 반복하시는데 … ‘언제 바르게 말씀 하실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제가 30년 째 목회하고 있는데 매 주일 설교하고 나면 오후에 저 혼자 제가 한 설교영상을 봅니다.
제가 설교한 것을 제가 듣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는 지 아십니까?
단어를 바르게 사용했는지,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았는지 매주일 점검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신기하게도 반복합니다.
의식적으로 고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 안고쳐집니다.
고치는 것은 이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좋은 습관 만들기
나쁜 습관은 처음에는 손님으로 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단골이 되어 버립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 후에는 상전이 되고, 마지막엔 폭군이 되어 나를 다스립니다.
그러므로 나쁜 습관은 내 안에, 우리 안에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나쁜 습관을 좋은 습관으로 바꾸는 것도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치아교정에도 1~2년이 걸린다고 하는 데 무엇을 바꾼다는 것이, 틀린 것을 바로 잡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쁜 습관을 좋은 습관으로 바꾸는 게 말처럼 쉽겠습니까?
심리학 용어 중에 ‘고착상태`(fixation)’란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유치하고 부정적인 습관을 계속 유지함으로 안정감을 느끼는 현상’을 말합니다.
담배가 몸에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끊어야겠다, 끊어야겠다.’ 하지만 끊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고착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담배뿐이 아닙니다.
술도 그렇고, 도박도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신체의 특정 부위를 계속 만진다든지, 발을 덜덜 떤다든지, 손가락을 빤다든지 … 하는 행위들이 그런 고착현상에 빠진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고착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지 못한 채 안정감, 편안함이 드니까 그대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옛 습관, 옛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 버리는 영적 고착상태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도 사탄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예배하는 습관, 기도하는 습관, 감사하는 습관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이유로 방해합니다.
예배드리지 못하게, 기도할 수 없게, 감사하지 못하게 자꾸 유혹하여 넘어뜨립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도 나쁜 습관이 됩니다.
한 번 넘어가면 두 번, 세 번 … 또 넘어갑니다.
아예 끊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습관을 보시면 좋아하실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 감사가 여러분의 습관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미소 짓게 만드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개인적인 삶이 평안하고, 가정이 평안하고, 교회가 평안해지고 … 우리가 사는 세상에 빛되고 소금된 삶을 살 때 평안을 전하는 하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습관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