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김왕노
세상의 모든 걱정 외
오지랖이 넓어 오늘 저녁에도 걱정
그 전쟁터에서 병사가 죽으면 어쩌냐.
그러면 병사의 아내는 어린 자식은
병사의 아버지는 어머니는
병사의 일가친척들은
병사를 기억하는 노새는 사이프러스는
병사가 언덕에 심어놓은 해바라기들은
역지사지로 내가 만약 그 병사라면
내 걱정 위에 뜬 어둑한 별
내 걱정 위로 알알이 맺히는 밤이슬
나로 인해 우울해진
강둑을 따라 피었다가 시드는 불빛
내가 사는 이 동네에도 걱정이 많이 돌아다니고
박멸할 수 없는 걱정
어머니가 자식 걱정으로 억장 무너졌듯이
어머니 판박이 같은 내가
푸른 하늘 은하수에 걱정만 가득 띄우네.
세상 모든 걱정이 밤이면 더 깊은 걱정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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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손톱을 깎아드리며
겨울 양지바른 대청마루에서 아버지 손톱을 깎아드립니다.
아버지 손은 보기보다 부드러웠기에 젊은 날 아버지 첫사랑이
아버지 손톱을 깎아드렸고 어머니도 아버지 손톱 깎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신전 같은 장딴지를 가진 장정인 아버지가 다소곳하게 손을 내밀고
손톱을 깎을 때마다 어머니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맹수라 생각했을 겁니다.
아버지의 늙고 주름진 손은 여전히 부드럽고
딱딱 소리를 내며 튀어 달아나는 손톱은 그 옛날 6.25 동란 때 참전했던 손이고
아버지 손으로 건설한 울산공단이라는 무용담을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도 튕겨 달아나는 손톱을 보며 아버지에게서 달아난 청춘을 생각할 겁니다.
아버지 소지의 손톱을 깎으며 아버지와 나와 한 약속을 떠올립니다.
약지를 깎으며 숟가락에서 금계란이란 약을 약지로 저어준 쓰디쓴 맛을 기억합니다.
중지를 깎으며 꿀 뺨을 때려 나를 울렸던 아버지의 젊은 날 그 힘이 그립습니다.
검지를 깎으며 검지로 총으로 빵빵 쏘면 총 맞은 듯 쓰러지며 놀던 유년이 생각납니다.
받아쓰기 백점을 받아오면 엄지척하던 날이 떠오릅니다.
손톱을 깎을 때마다 아버지와 함께 가진 추억이 손톱 밑 반달이 자라듯 자랍니다.
때로는 손톱에서 아버지와 내가 좋아했던 홍방울새 떼가 날아오릅니다.
불꽃축제 때 함께 본 푸른 축포도 터져 오릅니다.
아버지의 발톱을 깎아드리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놀러 오던 옆집 어른이 절경 중 절경이라 합니다.
공사 현장에서 자식 먼저 앞세워버린 어른에게는 불가한 일, 부러운 일이라 그럴 겁니다.
아버지 살아계실 동안 깎으면 더 새록새록 자라나는 아버지와 추억
아버지 손톱을 둘러싼 부자지간 정이 어지간히 깊어가는 초봄입니다.
아버지 누대의 백 년 사랑도 다시 백 년으로 이어지기 좋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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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포착과 직관》 평론 등단, 시집 『사랑해요 밀키스』,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외.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제1회 한국디카시학작품상, 세종문화예술대상 등 수상. 전 현대시학 회장, 웹진시인광장 디카시, 웹진시인광장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