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2월6일
지난해 12월 5일 서울 종로구 홍길동중고서점 앞. 그라피티 작가 닌볼트와 탱크시가 각각 자신이 지지하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의 그림을 그렸다. 온라인 생중계됐던 ‘아트배틀’에서 패배한 작품(아래 사진)은 약속대로 철거됐다. 닌볼트의 작품은 NFT로 판매되고 있다. 아트배틀을 기획한 김민호 대표는 작가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얘기했다.
제20대 대통령선거일은 2022년 3월 9일이다. 한 달 조금 남았다. 어느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가보다 더 싫어하는지가 더 관심사가 돼 버린 요즘 정치는 더욱 코믹이 되고 있다. 역대급 비호감 후보들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선택될 것이다. 지난해 12월 5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 홍길동중고서점 앞에서 그라피티 작가 닌볼트와 탱크시가 각자 자신이 지지하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그림을 그리며 그 모습을 생중계했다. 여야 대선 후보들을 그리는 ‘아트배틀’은 온라인투표를 통해 패배한 작품은 치워졌고, 인피니티 스톤을 장착한 어벤져스 영웅 아이언맨으로 그려진 이재명 후보의 이미지는 남았다.
아트벽화대회를 기획한 김민호 문화·예술매니지먼트 굿플레이어 대표는 “청년 작가들을 위한 공간이 되었으면 했어요. 지금은 경영난으로 폐업을 선언했지만 6월까지 임대한 홍길동중고서점의 외벽을 통해 작가들이 자신의 이름과 작품을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정치적 공간이 되었다는 걱정인지 작가들이 선 듯 나서지 않네요. 벽화 프로젝트가 코로나19로 인해 힘든 예술가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윤석열 벽화로 불렸던 탱크시의 작품 ‘SNOWY’는 철거됐고 닌볼트의 작품 ‘아이언명’은 NTF(Non-Fungible Token, 대체불가토큰) 거래 사이트인 밍글민트에서 판매되고 있다.
동대문구 정릉천 산책길을 따라 꽃들이 그려져 있다. 한겨울 차가운 기운이 약간은 누그러지는 느낌이다.
마포구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앞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 개관 5주년을 기념해 그린 벽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할머니에게 명예와 인권을!”이라는 문구도 함께 적혀있다.
서울 은평구 연은초등학교 등굣길에는 큼직한 벽화가 아이들을 맞아준다. 나무에 물을 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2019년 주민참여예산사업으로 만들어졌다고 적혀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시선을 끄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거리의 그림들이다. 그라피티(graffiti)라고도 하는데 ‘긁다, 긁어서 그리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graffito’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거리의 예술(street art)로 불리는 현대 그라피티는 1960년대 미국 뉴욕의 흑인들이 사회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의사를 표현하고자 그린 그림에서 출발했다. 최근 영국의 한 건물주는 자신의 건물 외벽에 있던 유명화가 뱅크시의 벽화(모래성 앞에 쇠지렛대를 들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를 팔기 위해 외벽을 통째로 뜯어냈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얼굴 없는 화가로 전 세계에 알려진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작품은 전쟁과 아동 빈곤, 환경 등을 풍자하는 내용이라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
홍익대학교 부근 KB청춘마루 외벽에 그려진 가로 15m, 세로 7m 규모의 ‘독립 영웅 11인의 미소’. 그라피티 아티스트 닌볼트가 그렸다.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남자현, 윤봉길, 유관순, 안중근, 박열, 한용운, 김좌진, 김구, 홍범도, 안창호, 권기옥.
볼록거울에 비친 압구정 나들목 벽화들. 화려한 색상의 그림과 글들이 그려져 있다. 한쪽엔 그라피티 아트의 명소로 지속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하는 안내문이 적혀 있지만 덧칠한 글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벽화가 많이 그려진 서울 종로구 이화마을 한가운데엔 날개 벽화가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을 찾는 이들은 대개 이곳에서 날개를 배경으로 하늘을 난다. 수많은 벽화들 가운데 눈에 띄지 않게 벽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벽화가 있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해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해 304명이 사망한 세월호 참사 모습이 그려진 벽화다. 글자도 희미해지고 많이 빛바랬다.
벽화 마을로도 유명한 이화마을. 눈에 확 들어오는 벽화들도 있지만 자세히 둘러봐야 보이는 벽화들도 있다. 세월호 참사를 그린 벽화의 글자가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
이화마을엔 “소곤소곤 대화해 주세요”라는 안내문이 곳곳에 걸려 있다.
마을엔 “주민 거주지입니다. 소곤소곤 대화해 주세요.”라는 당부의 말도 적혀 있다. 인천 중구의 한 건물 외벽에는 마스크를 쓰고 백신 맞은 부위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WEAR A MASK!”를 외치는 흑백 그림이 그려져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길어지며 전 세계 도시 거리엔 코로나 극복 메시지를 담은 벽화가 생겨났고 지금도 그려지고 있다.
인천시 중구 애관극장 인근 건물에 그려진 코로나19 극복 메시지를 담은 벽화. 마스크를 쓴 한 한 여성이 백신을 맞은 후 손가락으로 주사 맞은 부위를 꾹 누르는 모습을 그렸다.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모습으로 그렸다고 느낀다면 착각일까?
동대문구 창신동 쪽방촌의 벽화. 소화기를 품은, 익살맞은 모습의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2012년 홍익대 학생들이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그렸다. 조금 빛바랬지만 화려한 색감이 살아있다. 이곳도 언젠가는 재개발될 것이다.
홍길동중고서점 외벽에 설치된 미술작품. 3600개의 천연가죽 퍼즐 조각으로 만든 ‘2022년 코로나를 찢어 물리치는 검은 호랑이’ 작품.
거리의 벽화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삭막한 거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정치적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무언가를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거리에서 우연히 필 꽂히는 벽화를 본다는 건 행운이다.
글·사진=허정호 선임기자 hoy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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