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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瀟灑園)
片石來崇岡(편석래숭강)-높은 멧부리서 굴러온 한 조각 돌에
結根松數尺(결근송수척)-뿌리가 서려 있네, 두어 자 솔이
萬年花滿身(만년화만신)-만년이라 온 몸에 꽃이 피고
歲縮參天碧(세축참천벽)-하늘 솟은 그 기세 더욱 푸르네!
세속의 선계(仙界)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
올 여름 휴가는 대표적인 정원(庭園) 명승지(名勝地)인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으로 정하고 차를 몰았다.
여름휴가를 어느 한곳에 정착(定着)하여 보내는 것 보다는 명승지 몇 군데를 목표로 자동차 여행을 하는 것도 괜찮을 듯 해서다.
양산보(梁山甫)의 호가 소쇄옹(瀟灑翁)이기 때문에 소쇄원(瀟灑園)이라 하였고
소쇄원(瀟灑園)은 “깨끗하고 시원한 정원”이라는 뜻이다.
이 평범하고 소박한 자연의 의미를 지닌 이름을 실제로 가보면 “아, 그렇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소쇄원(瀟灑園)의 이름을 지은 어원은
중국 남제(南齊)때의 문장가 공치규(孔稚圭447~501)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耿介拔俗之標(경개발속지표)-지조와 절개는 세속에서 빼어나는 풍모가 있어야 하고
蕭灑出塵之想(소쇄출진지상)-마음은 씻은 듯이 맑고 깨끗하여 세속을 뛰어넘고
度白雪以方潔(도백설이방경)-몸은 흰 눈을 갓 건너서 온 것처럼 결백하여야 하며
干靑雲而直上(간청운이직상)-뜻은 하늘의 푸른 구름을 능가하여 하늘 위에 올라야 한다.
이 시에서 소쇄(蕭灑)를 따 온 것이다.
이 정원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양산보(梁山甫)가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죽임을 당하자, 시골로 은거하러 내려가 지은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조선 중종때 사림(士林)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 정치의 실현을 급진적으로 개혁할 때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등 훈구파(勳舊派)의 반대에 의하여 소위 “주초위왕(走肖爲王)” 의 모략으로 연산군에 의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세력이 제거된 사건으로 조광조는 전라도 화순 땅에 유배되었다가 이내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
소쇄원(瀟灑園)을 지은 양산보(梁山甫)는
15세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가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선생 밑에서 학문을 닦았고, 17세 되던 해에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했으나 그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스승의 처참한 죽음을 보고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지금의 소쇄원으로 낙향하게 된 것이다.
소쇄원(瀟灑園)은 많은 문인(文人), 건축가(建築家)들은 자연미와 구도(構圖) 면에서 조선시대 정원 중에서도 강릉 선교장과 함께 첫손으로 꼽힌다.
별서정원(別墅庭園)은
별서(別墅)란 살림집에서 떨어져 산수 좋은 공간에 마련된 주거공간으로 정자와 같이 조성된 정원을 말하는데 “산림 속의 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세속의 벼슬이나 당파싸움에 야합(野合)하지 않고 자연에 돌아가 전원이나 산속 깊숙한 곳에 집을 지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을 즐기려고 만든 야처(野處)이다.
우리나라 여러 곳에는 아름다운 별서(別墅) 누정(樓亭)이 많다.
다산초당의 연지(蓮池), 최치원 독서당(讀書堂), 고산의 보길도 세연정(洗然亭)
영주 이황의 취한대(翠寒臺)가 정취(情趣)가 있어 기회있는대로 답사하여 소개코자 한다.
광주호를 앞에둔 소쇄원은 멀리 무등산의 남쪽으로 흐르는 산비탈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 그대로를 뜰로 삼고 꼭 필요한 곳에만 최소한의 인공을 가한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정원이다.
소쇄원은 명성(名聲)에 비하여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지만 자연 속에 적당하게 배치되어 아늑하고 격조 있게 구성된 정원이 선비의 품격을 엿보는 듯했다.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들어서면 좌우로 늘어선 빽빽한 죽림(竹林)이 감탄을 나오게 한다.
왕대 밭 사이로는 햇빛이 스며들고 계곡 물이 흐르면서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다.
대숲이 끝나 가는 지점에 조그마한 초가정자 대봉대(待鳳臺)가 있다.
봉황처럼 귀한 손님을 기다려 맞는다는 후대(厚待)의 뜻이 담긴 집 이름이다.
이 대봉대 옆에 예전에는 그 이름에 걸맞게 오동나무가 서 있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오동나무는 없고 자목(柘木)과 붉게 핀 백일홍이 그늘을 지우고 있다.
대봉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동쪽에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벼락에
“애양단(愛陽壇)”이라고 새겨진 글자판이 담장에 박혀 있다.
이곳은 특별히 햇볕이 잘 들어와서 한 겨울에 계곡은 얼었어도 이곳의 눈은 모두 녹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볕을 사랑한 마루터 애양단(愛陽壇) !
애양단을 지나면서 꺾어진 담에 오곡문(五曲門)이라는 글자가 담벼락에 밖혀있다.
소쇄구곡(瀟灑九曲)의 다섯번째 구비여서 “오곡문(五曲門)”이라고 이름 했단다.
돌을 섞어 흙담을 쌓고 기와를 얹으며 길게 이어 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넓적한 바위에 걸쳐 다리를 놓은 후 그 위에 담을 올인 것이다.
오곡문(五曲門) 밑으로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을 닮아 “오곡문(五曲門)”글자 또한 흐느러지게 휘어져있다.
역시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다음에 외나무다리로 계류(溪流)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구부정한 소나무가 있고, 그 아래로 물을 내려다보기 좋은 지점에 걸터앉기 알맞은 바위가 있다.
담 밑으로 들어오는 물은 구비와 폭포를 이루며 정원 가운데로 흘러간다.
또한 맑은 물은 홈통을 통하여 대봉대 연못으로 들어간다.
다리를 건너면 매화를 심어 가꾼 매대(梅臺)가 있고, 매대 뒷담에는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라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이 쓴 글씨가 담에 박혀 있다.
“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조촐한 집”이란 뜻의 글로서 소쇄원의 “문패”라 할 수 있다.
매대(梅臺)는 매화(梅花)와 기이한 화초를 심어 관상했다는 축대(築臺)이다.
매대(梅臺)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눈앞이 툭 트인 곳에 소쇄원의 주건물 격인 제월당(霽月堂)이 있고,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계곡물을 굽어보는 곳에 광풍각(光風閣)이 있다.
제월당(霽月堂)는 소쇄원 주인의 사생활 공간이라 할 수 있고
광풍각(光風閣)은 사랑방 격으로 소쇄원의 풍광을 한껏 누릴 수 있는 중심 공간이다.
이두 집의 이름은 중국 송나라의 명필인 황정견(黃庭堅)이 주무숙(周茂淑주돈이)의 인물됨을 말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밝음이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 같고(光風閣)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霽月堂)”고 평 한데서 따온 것이라 한다.
두 건물의 편액 글씨도 제월당(霽月堂)은 단아(端雅)하게 쓰여 있고,
광풍각(光風閣)은 바람에 휘날리듯 흘려 쓰여 있다.
또한
제월당(霽月臺) 위치의 밝음과 광풍각(光風閣)의 숲에 가린 어둠은 빛의 밝음과 어둠인 음양(陰陽)의 명암(明暗)이 함께 화합하는 소쇄원의 특징이다.
소쇄원의 명암(明暗)의 대비는 이곳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진입로 초입(初入)양옆에 있는 대숲이 어둠의 터널이라면 이곳을 지나온 소쇄원은 밝음의 선계(仙界)이다.
또한 진입로를 들어와 대봉대(待鳳臺)까지가 어둠이라면,
애양단(愛陽壇)이 있는 곳은 밝음이다.
소쇄원이야 말로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명암의 이중주(二重奏)가 펼쳐지는 곳이다.
이것이 소쇄원(瀟灑園)이다.
더위도 식힐겸 눈을 감고 450년 전으로 되돌아가 본다.
손님이 제월당을 지긋이 올려다보니, 제월당에서 주인이 총총 걸음으로 내려온다.
손도 주인을 보기 위해 다시 몸을 돌려 대봉대(待鳳臺)로 걸어간다.
주인과 객(客)은 대봉대(待鳳臺)에서 수인사를 나눈다.
대봉대(待鳳臺)란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니 이곳을 오는 손님을 주인이 얼마나 존숭(尊崇) 했는지 알 수 있다.
봉황이 거처하는 곳에 오동나무 없으면 격이 맞지 않는다.
그때는 있었는데 지금은 그루터기만 있다.
주인은 손님의 손을 잡고 소쇄원의 안과 밖을 구별하게 하는 ㄱ자 담을 끼고 제월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제월당의 왼쪽 계단은 주인이 오르고 오른쪽 계단은 손이 올랐다고 한다.
객(客)은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와 작은 폭포수의 떨어지는 물소리에 소쇄원이 “청관(聽觀)의 정원”임을 실감한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대나무 잎이 흔들리며 물소리에 화답하니,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바로 이곳임을 느낀다.
하서 김인후는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48곡이나 꼽아 소쇄원 48영의 시를 남겼다.
과히 넓지 않은 이곳에서 그 많은 경관의 모습들을 시로 읊을 수 있었던 것만 보아도 평범한 조건 속에 다양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8영의 시는 별도로 소개한다.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가 생존 당시부터 호남 사림(士林)들의
친목회 장소이자, 정치 토론 장소였다고 한다.
칼럼리스트 조용헌 교수는 소쇄원(瀟灑園)은 정원(庭園)이라고만 하면 그 정체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소쇄원은 조선 선비들의 살롱이자 ‘아카데미”라고 하는 것이 소쇄원(瀟灑園)의 존재의 본질을 알리는데 적당한 표현이라고 했다.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가사 문학의 대가로 유명한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담양 부사를 지냈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광주 환벽당(環碧堂)의 주인 김윤제金允悌) 등이 교유하였고
특히 김인후는 양산보와 사돈 간으로 소쇄원의 설계자였다고 한다.
.소쇄원이 충분한 재력도 없는 양(梁)씨 가문에 의해 지금까지 예전 그대로 보전될 수 있었던 이유는
소쇄원 주인 양산보(梁山甫)가 평소에 “소쇄원은 어느 언덕 골짜기를 막론하고 내 발자국이 남겨지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어느 한 후손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후 양산보의 후손들은 세 가지 금기를 가훈처럼 만들어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고 한다.
*어느 경우에도 소쇄원을 양도하지 말 것
*종손은 이사 가지 말 것
*제사를 건너뛰지 말 것
주인의 환대를 받은 객(客)은 바람 맑은 광풍각에 머물며 더위에 지친 심신을 안정시킨다.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속세(俗世)로 돌아가야 한다.
나그네는 주인에게 감사의 손을 흔들며 외다리를 건너 신선(神仙)의 세계에서 속인(俗人)의 세계로 다시 돌아간다.
소쇄원의 보고 느낌을 어찌 부족한 필자의 글로 다 전달하리요
대숲의 맑은 바람, 계곡의 굽이진 물을 뒤로 하고 식영정(息影亭)으로 향한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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