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4년 가해 4월26일 (백)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수원] 증거의 완성은 죽음 -
수원 교구 복음화국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사도 4, 13 - 21
† 복음 : 마르 16, 9 - 15
★ 베드로와 요한은 최고 의회에서조차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백성 때문에 풀어 줄 수밖에 없었다(제1독서).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두 제자에게, 그리고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장면이다.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이제 부활 팔일 축제가 마무리되어 갑니다. 이 전례 시기에 우리 신앙의 핵심인
부활의 신비에 흠뻑 젖어 보는 것은 한 해 동안 우리의 전례 생활을 생동감
있게 하는 중요한 체험입니다. 이 축제 기간의 전례에서 특별한 것은 복음 전
환호만이 아니라 영성체 후의 파견과 응답 때에도 '알렐루야'를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시작되기 전 구약 시대부터 존재한 '알렐루야'란
짧은 외침으로 교회는 부활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라!'라는
뜻의 이 짧은 환호송에는 기쁨과 찬미와 감사라는, 우리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부활의 체험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이 찬미의 위대함을 실감하게 하는 것으로 작곡가 헨델의 그 유명한 '메시아'
중의 '할렐루야' 합창을 들 수 있습니다. 헨델은 병고와 인기의 하락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가장 처절한 시기에 3주간 침식을 잊고 방에 틀어박혀
'메시아'를 작곡합니다. 세계적인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메시아'를 작곡하는
기간은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을 느끼며 '부활'을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부활 체험의 절정이 바로 '할렐루야' 합창에
담겨 있습니다. 이 벅찬 감동은 듣는 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런던에서
열린 초연에서부터 '할렐루야'가 나올 때에는 모두 기립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시기의 전례에 참여하는 합당한 준비는 다름 아니라 주님 부활의
기쁨을 감사와 찬미로 한껏 체험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입니다. 부활의 이
기쁨을 스스로 느끼고 또한 이웃에게 전하는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믿는 이들의 사명|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4월2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마르16,9-15)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 16,9-15
믿는 이들의 사명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더 큰 기쁨입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전하려면 먼저 내 안이 주님으로 가득차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 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누군가 나의 착한
행실과 사랑으로 주님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큰 보람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 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16,15)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 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내가 주님께 드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2014년 가해 4월2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 16,9-15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자신의 아내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생일날에 근사한 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는데, 자신의 생일날에는
특별히 받은 선물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냥 아침에 차려주는 생일상이
전부였기에 너무나 서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이제는 아내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에 뭐 그럴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내가 이만큼 주었으니
이만큼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감정이
아닐까 싶더군요. 그러면서 문득 ‘선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물을
하면서 어떤 대가를 바라는 분이 계십니까? 만약 어떤 대가를 바라고 선물을
한다면 그것은 뇌물이 되겠지요. 선물이라는 것은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는
것,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선물’에 서운한 감정이 더해져서 ‘뇌물’의 형태로
바뀝니다. 선물은 선물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의 생각이 더해지지 않을
때, 좋은 가치로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구원’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어떤 보상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이유 없이 그저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지셨던 것입니다.
이와 달리 주님께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니까,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니까, 이렇게 열심히 성당을
다니니까... 등등의 이유를 붙여서 보답을 얻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들이 주님께 드리는 그 모든 선물인 기도, 봉사,
희생 등등은 단순한 뇌물에 그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좋은 마음이 나쁜
마음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에 혼내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도,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의 말도
믿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은 그 이유를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 때문이라고 말하지요. 예수님을 통해 하늘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마음, 누가 높은가를 따졌던 마음,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들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셔서는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선물이 아닌 뇌물을 바쳤던 것이고, 예수님의 선물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께 드리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선물입니까? 뇌물입니까?
주님께 선물을 드리는 사람은 겸손과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기쁘고 감사히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뇌물을 바치는
사람은 욕심과 이기심만을 앞세우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그 큰 선물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던질 뿐입니다.
주님께 진정한 선물을 봉헌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도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 가지를 줄여야 한다. 의심과 근심과 욕심이다. 의심은 마음의 고름이다.
근심은 마음의 주름이고, 욕심은 마음의 기름이다. 의심을 호기심으로, 근심을
관심으로, 욕심을 동심으로 바꾸자(주철환).
내가 주님께 드리는 것은 선물일까요? 뇌물일까요?
더 이상 이유는 그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요. 제자들이 듣기에 이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요.
왜냐하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이야기를 하시니까요.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던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사흘 만에 살아나신다니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는 무조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보통 사람, 아니 어쩌면 무지렁이에 말재주도 없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냥 하시는
말씀이었을까요? 불가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거짓이 없는 예수님의 명령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믿음을
간직하지 못하고 의심하고 거부한다면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셨듯이 혼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선교 명령은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못하는 이유만을 들어서 말합니다. 배운 것이 없다고, 말재주가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세상 삶이 너무나 힘들다고... 하지만 당시의 제자들
상황과 비교할 때 어쩌면 우리의 상황은 더 나은 편이 아닐까요?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르고 계신다는 주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따라야 합니다.
더 이상의 이유는 그만입니다. 크게 혼날 수 있으니까요.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증거의 완성은 죽음
2014년 가해 4월2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복음 : 마르코 16,9-15
< 증거의 완성은 죽음 >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소식뿐인 요즘 그 안에서도 마음을 위로해주는
뉴스가 있어 그대로 옮겨봅니다.
승객을 버리고 탈출한 세월호 선장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을 구하려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사람들도 있었다. 침몰해가는 여객선에서 다른 사람들을
살리려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은 5인의 행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최근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 등 외신들은 목숨을 바쳐 승객과 제자를 구한
‘세월호 영웅들’을 집중 조명했다.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중심으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5명의 의인’이란 게시물이 눈물을 자아내고 있다.
지난 16일 진도 해상에서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에는 승객과 학생들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5인의 영웅들이 있었다.
먼저 마지막까지 승객 대피를 돕다가 변을 당한 고 박지영 승무원(여·22)이
있다. 안산 단원고 학생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한 박 씨는 한 학생이 “왜
구명조끼를 입지 않느냐”고 묻자 “승무원들은 마지막까지 있어야 한다.
너희들 다 구하고 나도 따라가겠다”는 말을 남겼다.
세월호 사무장으로 있었던 고 양대홍 씨(남·45)도 있다. 그는 사고 당일 오전
10시쯤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다. 수첩에 모아둔 돈을
큰아이 등록금으로 사용하라”며 마지막을 예감한 듯한 말을 남겼다. 이어
“길게 통화하지 못한다. 아이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가장 먼저 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단원고 2학년 학생 고 정차웅 군(17)
은 생일을 하루 앞두고 숨졌다. 정 군은 침몰 당시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 친구에게 건넸다. 또 다른 친구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정
군은 의롭게 자신을 희생했다.
안산 단원고 2학년 6반 담임교사인 고 남윤철 씨(남·35)는 교사가 된 지 올해로
7년째였다. 구조된 단원고 학생들은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학생 탈출을
도왔다”며 입을 모아 말했다. 당시 그는 학생 한 명이라도 배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올해 첫 부임한 단원고 2학년 9반 담임교사 고 최혜정 씨(여·24)는 사고 당시
SNS로 제자들에게 “걱정하지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라고 전하며
10여 명의 학생을 구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첫 제자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았다.
이 외에도 승무원과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한 고 정현선 씨(여·28)와 고 김기웅
씨(남·28)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로, 사고 당일 승객들을 구하다 같은날 세상을
떠났다. 부모와 오빠를 잃고 울고 있는 권지연 양(6)을 구출한 단원고 박호진
군(17)도 세월호의 ‘영웅’이었다.
[김수현 기자, 일요신문, 세월호 참사 속 빛난 희생…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의인 5명’, 2014년04월21일]
오늘 복음에서 여자들의 증언과 다른 두 제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기둥들인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을 잘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
저녁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중하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그러한 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지 못한 것을, 또 믿지 못하는
것을 증언할 수는 없는 것인데, 당신이 세우신 교회의 사람들이 당신의 부활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확신을 주시지 않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 있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이유는,
교회가 당신의 부활을 온 세상에 전하는 당신이 파견하시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을 ‘증거자’라 합니다. 증거자는 무언가를 본 이들이
보지 못한 이들에게 확증을 주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저 영웅들은 무엇을 보았던 이들이었고 무엇을 증거하는
이들이었을까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확신하는 이들이 아니었을까요?
저들의 죽음은 무언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거의 확증은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를 증거하기 위해 아버지 뜻을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결국 죽음 없이는 온전한 증거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
부활의 증인들로 파견하시면서 저 영웅들처럼 목숨을 걸고 배 밑바닥으로
내려가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기를 원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믿는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도 목숨을 걸 수 있는 신앙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고귀한 죽음을 우리는 순교라 부르는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수도회] 평범의 비범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4월2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사도4,13-21 마르16,9-15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 16,9-15
평범의 비범
평범의 비범입니다. 역설적으로 진정 평범한 이들이 비범한 이들입니다.
바로 이게 진리입니다.
여기 익산 땅의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평범한 촌노들의 자연스럽고 낙천적인
모습을 통해 새삼 평범이 비범임을 깨닫습니다. 목욕탕에서 눈웃음 치며
인사하는 다정한 모습들을 통해 잃어버린 웃음을 발견합니다. 평범하지만
저에겐 비범한 현실입니다.
산책 중 광활한 인삼 밭과 그 옆의 고구마 밭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참 다행인 것은 익산주민들의 반대로 골프장이 될 것을 좌절시키고
그 대신 인삼밭을 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주민들의 위대성을 깨닫습니다.
여기서도 평범의 비범을 배웁니다.
고구마를 먹고 살 수 있지만 인삼만 먹고는 못 삽니다. 고구마는 거름도
농약도 전혀 않지만 인삼은 거름에 농약도 수없이 주어야 합니다. 고구마는
싸지만 인삼은 비쌉니다. 특히 여기 전라도 익산 땅은 황토땅이라 고구마도
잘되고 맛있다 합니다.
시인 하하운이나 김지하의 시에 나오는 그대로 전라도 황토땅입니다.
높은 산은 거의 없고 낮은 야산에 넓은 들판의 익산땅입니다.
고구마나 익산땅을 통해서도 평범의 비범을 깨닫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깨닫는바 평범의 비범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비범해졌으니 평범의 비범입니다.
이게 진정한 의미의 평범의 비범입니다.
이런 이들이 바로 매력적인 성인들입니다.
다음 대목에서 이를 확연히 깨닫습니다. '그 무렵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평범의 비범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지식은 짧을지 몰라도 삶의 체험과 지혜는 넘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성령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의 확신에 넘친 거침없는
대답이 통쾌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백성 때문에 두 제자들을 처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거듭 위협만하고
풀어줍니다. 그 일로 백성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베드로와 요한의 승리요, 평범의 비범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평범의 비범에 이를 수 있습니다.
평범의 비범에 이른 이들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을 믿지 못한 이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습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지만 사실 보지 않고 믿기는, 체험 없이
믿기는 힘듭니다. 하여 믿음의 은총, 체험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열한 제자들은 평범의 비범한 사람들이 되었고
주님은 이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과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평범의 비범을 완성하는 길은 이길 하나뿐입니다. 우리가 서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입니다. 평범의 비범한 삶으로 주님 부활을 증언함이 우리에게 실질적인
복음 선포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존재론적 복음선포라 합니다.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 빵과 포도주의 성체성혈로 오시는 주님의 모습이
평범한 비범의 절정입니다. 하여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평범의 비범한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춤들을 추자"(시편118,24).
계속되는 화답송 후렴처럼, 진정 평범의 비범한 이들은 날마다 이렇게 삽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2014년 가해 4월26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 16,9-15
주님 부활을 축하하면서 오늘은 ‘사무엘 울만’의 시를 소개할까 합니다.
“청 춘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청춘이란 소심함을 뛰어넘는 혈기왕성한 용기요
안락함을 초월하는 강인한 모험심을 뜻한다.?
청춘은 삶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한 정신이다.
단순히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상이 황폐 해 질 때 늙는다.?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하지만
열정의 상실은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서는 경이로움에 대한 동경과
어린이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
그리고 삶의 놀이를 즐기는 흥겨움이 있다.?
영감이 끊어지고 그대의 가슴이 싸늘한 눈과 같은
냉소와 얼음 같은 비관으로 덮이면 비록 그대가
나이 이십이라도 늙은 것이다.?
머리를 높이 쳐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나이 여든이 되어도 그대는 '청춘'으로 남는다.”
주님께서는 30대의 나이로 청춘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에 청춘이셨습니다. 하느님나라에 대한 꿈이 있었기에 청춘이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뜨거운 가슴과 열정으로 주님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서필사를 하시는 자매님께서 이런 나눔을 해 주셨습니다. ‘아직 눈이 제대로
보일 때, 아직 손으로 쓸 수 있을 때 성서를 쓸 수 있는 것도 큰 은총입니다.’
자매님께서는 60이 훨씬 넘었는데도 기쁜 마음으로 성서를 필사하고
계셨습니다. 성서를 쓰면서 많은 은총을 체험하셨다고 합니다. 성서를 쓰는
동안 약을 먹지 않고도 건강을 유지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서를 쓰면서
이웃을 위해서 기도 했는데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합니다.
성서를 쓰지 않을 때는 세상이 그렇게 즐겁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족들에게도
바라는 것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쓰면서 이해하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매일 술을 마시고,
아내와 다투고, 자녀들에게 화를 내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술을 마신 다음
날은 출근을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남자를 보면서
한심하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 남자가 성당에 다니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보았습니까?’ 그 남자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보지는 못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매일 술을 마시던 제가 술을 끊게
하였습니다. 아내와도 사이좋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저는 비록 제 눈으로 하느님을 보지는 못했지만 저를 이렇게
변화시켜 주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이제 눈에
보이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사랑을 베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을
전하였고,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많은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기쁨에
충만할 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눌 때, 우리가 고난 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을 통한 변화와 실천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열린 마음을 가지십시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열린 마음을 가지십시오. 불신은 닫힌 마음에서 오고, 믿음은 열린 마음에서
옵니다.'
2014년 가해 4월2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복음묵상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마르코16,14)
----
부활절 이후, 매일 미사 복음으로 읽혀진 마태오, 요한,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 부활 이후의 상황에 대해 마르코는 종합적으로 간단하게 전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부활을 본 이는 마리아 막달레나였고, 그 여인이 제자들에게
달려가 이 소식을 전했지만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을 전해도 제자들은 역시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을 꾸짖으셨다는 것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불신을 가져오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에 대해 간단히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여러 요인을 들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방해하는 강력한 힘 즉 악마의 힘일 것이고, 또
하나는 악마가 가장 쉽게 우리를 망가뜨릴 수 있는 고정관념이나 편견 그리고
교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정관념이나 편견 그리고 교만은 결국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처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반대하는 세력은 악마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쉽게 부활을 확신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온갖 의심과 불안, 절망 등을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교만이라는 인간의
약점을 통해서 드러나게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아닌, 과거가 엉망이었던
마리아에게, 그리고 이름도 잘 모르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에도 열한 사도들은 언짢은 기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불신은 닫힌 마음에서 오고, 믿음은 열린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든, 하느님에 대해서든 어떤 불신에 빠져있을 때,
먼저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보아야 합니다. 닫힌 마음이란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 가능성을 주려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진실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닌, 이기심이 중심이 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에서는 신앙도 영적 겸손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저 위선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을 향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실로 그분의 뜻이 중심이
되어 사랑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적 삶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악어의눈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단상]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2014년 4월 26일) 악어의 눈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 16,9-15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사람들이
전한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예수님은
꾸짖으십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내내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영 다르게 생각하고 반대로 행동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유난히
강조합니다. 당신이 죽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반발하고 자신들
가운데 누가 더 높은지 서로 다투는 등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길과는 완전히 다른 세속의 길에 몰입하는 모습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허망하게 돌아가시자 그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잘 나고자 했던’
자신들의 꿈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송두리째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에 흘리는
이른바 ‘악어의 눈물’이 아니었을까요? 악어의 눈물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자기애의 눈물이기에 완고한 마음을 녹이진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신과 돌처럼 굳은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이 꾸짖음은 사랑의 매입니다. 분명 미워서 드는 매는 폭력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드는 매는 각성을 위한 치료약입니다.
악어의 눈물을 그치고 기쁜 소식을 위한 사랑의 눈물을 흘릴 때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으로서 모든 피조물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진정한 일꾼 진정한
제자가 됩니다. 혹시 우리도 또한 악어의 눈물만 흘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사랑의 매를 드시지 않을까요?
오직 우리 생각만 하고 우리의 이기적 안위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분명 사랑의
매가 필요하겠지요.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군 끌레멘스 신부님의 복음 단상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