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ads & Untitled 1978~2005 Abbas Kiarostami 사진전
1. 전시소개
1) 전시개요
전시기간 : 2005년 8월 26일(금) ~ 9월 15일(목) 전시장소 : 사간동 금호미술관 전관 전시작품 : 흑백 사진작품 84점(The Roads 52점, The Untitled 32점) 이번 한국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된 2005년 신작 작업 32점
주 최 : 환경재단 주 관 : 그린페스티벌 조직위원회 관 람 료 : 성인 5,000원 / 청소년 3,000원 / 서울환경영화제 일반티켓소지자 1회,1인 3,000 / 서울환경영화제 마스터클래스, 개,폐막식 티켓 소지자 무료입장
2) 전시소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로 국내관객들을 느림과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인도했던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의 일부분을 보는 듯한 절제된 카메라 워크와 인공미를 찾아볼 수 없는 담백하면서도 아름다운 흑백 사진작품 84점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관객들을 찾아온다. 이번 전시는 그가 1978년부터 2003년까지 촬영한 사진 작품 중에서 이태리 토리노 국립영화박술관에서 콜렉션 한 The Roads 52점과 Untitled 32점을 고스란히 들여와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선보이게 된다. 그의 영화 속 한 장면을 정지시켜 사진으로 옮겨 놓은 듯한 작품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기계문명 속에서 상실한 무언가를 찾아 나서게, 곧 길을 떠날 채비를 하게 만드는 이끔의 힘이 있다. 길과 나무를 주제로 이어지는 그의 사진작품을 통해 어디에나 있지만,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착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9월에는 키아로스타미가 이끄는 대로 사간 동안 길로 터벅터벅 걸어가보면 어떨까..
3) 키아로스타미가 쓴 에세이 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사고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작업이다 훌륭한 자연경관을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마치 고문과도 같다 카메라를 통해 자연을 바라보면서 나는 꿈꾸기를 시작한다. 자연은 스스로를 색칠하고 스스로의 구도를 잡는다. 나는 단지 그 안에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뿐이다. 나의 사진은 내가 조작하는 나의 시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받은 초대다. 좋은 사진은 그것이 찍힌 그 순간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험하게 이끌어준다.
4) 부대 행사 :
* 전시오프닝리셉션 일시 : 8월 26일(금) 오후 5시 장소 : 금호미술관
* 공식기자회견 일시 : 9월 9일 오전 11시 장소 : 서울프라자호텔
*작가 출판 사인회 및 관객과의 만남 일시 : 9월9일 오후 4시 장소 : 금호미술관
* 키아로스타미 감독 마스터 클래스 일시 : 9월 10일(토) 오후 3시 30분 장소 : 광화문 시네큐브 개요 : 개막작으로 상영된 키아로스타미 작품 상영 후, 그의 삶과 영화세계, 그리고 그의 사진작업들에 대한 폭넓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관객들과 직접 나누는 마스터 클래스를 갖는다.
5) 키아로스타미 영화: <길> 환경재단에서 제작 의뢰한 영화 <길>이 제2회 서울환경영화제(2005년 9월 8일-14일) 개막작으로 상영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올해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라는 이름이 우리 극장가를 찾은 지 10년이 되는 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1990년대 중반, 할리우드 영화 일색이었던 우리 극장가에 다양한 예술영화들과 제3세계 영화들이 소개되는 새로운 흐름을 대표했던 비 서구 영화감독 중 하나다. 그의 작품들은 할리우드식 상업 영화가 미처 제공해주지 못했던 또 다른 삶의 모습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경험하게 했다. 어느 착하디 착한 소년이 친구의 숙제장을 돌려주려고 날이 저물도록 친구의 집을 찾아 헤매 다니는 내용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년)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이란에서 모종의 새로운 영화 역사가 쓰고 있다는 신호로 인식되었다.
광고감독으로 처음 카메라를 잡았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젊은 시절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의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은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길에서 주운 이야기들이 영화로 만들어진다. 모두 ‘길 위의 영화’다. 직업배우가 아닌 일반인을 주연으로 쓰고, 또 스튜디오나 세트 대신 생활현장에서 영화를 찍었다. 이야기는 억지로 지어내고 꾸몄다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카메라를 들이댄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인간과 자연을 끌어안는 따뜻한 휴머니즘이 있었다. ‘이란 북부 3부작’-<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 그리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이러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란 북부 3부작’, 그리고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체리 향기>를 지나오면서 영화미학적 실험을 계속해 왔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와 <텐> 등의 비교적 최근작에서 더욱 미니멀해진 시각 양식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와 삶, 자연과 인간 등의 문제에 대해 보다 능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순간들을 제공하고 있다. 올해로 65살이 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현재 영화뿐 아니라 사진작업과 글쓰기를 통해 여전히 왕성한 예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진
“좋은 것은 흙으로 가는 것이다”-체리향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내 기억 속에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구불구불한 길, 그 멀고 긴 길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나에게는 스토리가 아닌 하나하나의 아름답고 시적인 정취와 명상적으로 적셔진 장면들이 온전히 자리하면서 그의 영화를 전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그 영화를 통해 나는 이란이란 낯설고 아득한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시와 그림 같은 영상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중에서야 그가 미술을 전공했으며 현재 화가와 사진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비로소 그의 영화이미지의 근원을 인식할 수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의 흑백사진들을 일별할 기회를 가졌다. 어떤 것은 앤슬 애덤스(Ansel Adams)의 사진을 조우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사진이 증거 하듯 흔히 풍경은 아름다움, 자연, 순수함이란 도식 위에 존재하는데 사실 그것은 풍경의 신화화이자 이데올로기이다. 풍경은 예술장르라기 보다는 일종의 매체이며 문화와 관습에 의해 매개되는 자연이 모습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풍경은 단순히 자연의 투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이미지 현상이다.
그가 만든 영화의 장면에서 이제 막 하나씩 꺼내 얼려놓은 듯한 이 부동과 정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흑백의 이미지들은 한결같이 서늘하고 적조한 자연의 이미지들이다. 사진의 고정성과 영화 이미지의 유동성 사이에서 나온 이미지다. 원래 사진은 과학적 고찰의 필수적이고 자연스러운 보조자가 되는 다큐멘터리적이고 분석적인 힘을 갖고 있다. 반면에 영화는 스펙타클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환상과 거짓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사진은 인간의 눈과 다르다. 사진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여준다. 그것이 사진의 주된 전략이다. 사진은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붙잡아놓으며 그 대상을 완벽한 부동과 침묵 속에 절여놓는다. 그것은 시간이 죽어버린, 고요한 풍경이다. 사진은 그래서 고요한 아름다움이다.
키아로스타미의 사진에는 사각의 프레임 안에 흙과 나무, 길과 그림자만이 흑과 백으로 절여져 있다. 이 흑백사진은 모든 예술의 기본인 단순화의 원리를 더욱 밀어 올린다.
밀밭위로 부는 바람과 하늘에 펼쳐진 구름, 밭고랑과 길게 드리워진 가늘고 구불구불한 길 위에 얹힌 흔적들, 가득 쌓인 눈에 묻힌 나무들이 드리운 그림자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얼핏 보면 마치 수묵화로 그려놓은 자연풍경을 대하는 듯하다. 그만큼 절제되고 함축적인 사진이다. 눈에 의존하기 보다는 마음과 정신으로 자연을 보게 하는 편이다.
인적이 부재한 원초적인 이 자연풍경은 도시와 문명, 사람의 입김과 부산함, 자동차와 건물들을 모조리 덮어버리고 오로지 흰 눈에 묻힌 수직으로 직립한 나무들이나 가지를 반원으로 펼친 체 홀로 서있는 나무들과 그 몸으로부터 조심스레 흘러내려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만을 차갑게 보여준다. 엄격한 구성과 절묘한 프레밍으로 절취된 자연의 모습은 회화적이며 시적이고 무엇보다도 아름답다. 그러면서도 그 아름다움은 다소 기이한 슬픔, 적막으로 가라앉는다. 얼핏 죽음의 내음 마저 감도는 듯 도 하다.
사진 하나하나는 모두 치밀한 계산 속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있었다. 여기서 자연에 대한 그의 태도는 문명에 대척되는 지점에 위치한 자연으로서 그리고 모든 상처와 죄악을 치유하는 자연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그는 이러한 자연사진을 통해 일종의 치유를 선사한다. 그래서 그가 보여주는 자연은 아름답고 신비스럽다.
아름다움이란 본래 자연 속에 숨어있던 것이 우연히 드러나는 것에 불과하다. 본질적으로 자연에 뿌리 두지 않은 아름다움이란 없다고 밀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이 자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자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며 인간은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는 없지만, 그러나 드러나게는 할 수 있다.
언어와 말의 수사로는 감당키 어려운 자연은 부득이 이미지로 자리했다. 그는 사진으로 자연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국 이 사진은 작가 자신이 본 자연에 대한 고백이고 수사다. 사진 찍는 행위는 자연이라는 존재들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알다시피 사진이 현전시키는 대상 또한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사진적 이미지’다. 작가의 관점에 의해 변형되지 않은 피사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진이 예술일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풍경 사진 역시 키아로스타미의 시선으로 취택되고 절취된 자연이미지다.
키아로스타미는 무척 섬세한 사진을 찍었다. 자연의 내부로 들어가 그 모습을 온전히 담아두고 그 대상과 자신의 반응하는 감각들을 순간 응결시켰다. 사물은 의식이 자기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사물은 의식을 비춰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때에만 비로소 사물일 수 있다.
그는 땅과 산, 나무와 그림자에게 말을 건네고 그 응답을 기다렸다. 그의 사진은 그런 독백과 느낌의 결정들이다. 자신이 체험한 웅대한 자연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훌륭하게 사진으로 재현되기를 원했다. 장엄한 자연의 일부, 천지가 창조된 그날처럼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자연의 모습이야말로 ‘일정한 형태가 없는 신의 진정한 모습’임을 일러준다.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자연(대지, 구름, 바람, 나무, 그림자 등)에 영혼을 불어넣어 하나의 인격체로 격상시키고 있다. 자연=대상이라는 근대적 자연관을 지운 자리에 인격성을 부여한 자연이 호흡하고 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현실을 끌어안는 영화를 만들었듯이 그의 사진은 시진과 회화, 영화와 사진의 경계가 지극히 모호한 경계에 위치해있다는 느낌이다. 그는 공간으로 이미지와 메시지를 만들 줄 아는 감독이며 관객을, 관자를 시인으로 철학자로 만든다. 그의 사진들은 우리들을 명상과 사색의 장으로 끌고 간다. 그것은 마치 동양의 산수화가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림 속 대상들을 매개 삼아 실제 자연을 소요하고 떠도는 듯한 환각을 불러일으켜주었듯이 바라보는 모든 이들을 아름다운 자연으로 몰고 간다. 매개가 되는 화면 속 흔적을 보면서 정신적인 활력에 이해 비로소 실재하는 자연이 머리 속에서, 가슴속에서 환생되는 것이다. 이제 사진을 보는 이들은 그 풍경을 마음껏 소요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은, 영상이미지는 하나의 매개이자 징검다리와 같다. 어쩌면 모든 이미지란 사실 그 같은 존재가 아닐까? 허구이면서 실재로 끝없이 나아가게 해주는 그 무엇으로서 말이다. 압바스키아로스타미의 풍경사진 역시 그런 매개로 위치해있다. 그는 영상이미지와 사진이미지를 통해 결국 같은 소리를 다른 입을 빌어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의 사진을 통해 자연과 인간 존재의 관계를 새삼 궁구해보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의 이미지는 명상과 사색을 독려하는 침묵으로 절여진 텍스트인 것이다.
글 / 박영택(미술평론, 경기대교수)
모든 길은 희망을 향해 열려있다.
키아로스타미는 특정한 감독의 이름을 넘어 하나의 유파를 일컫는 명칭이 되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이 유파의 원조이며 동시에 정점이기도 하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1987년에 발표됐는데, 그건 이란 영화에 모종의 새로운 역사가 쓰여 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바깥 세계에서 그것은 ‘이란 영화의 발견’이었다. 팔레비왕가의 독재와 피비린내 나는 이슬람혁명을 거쳐 호메이니의 철권통치 아래 들어가 있던 당시 이란에는 오직 정치와 종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 영화도 있었던 것이다.
한 착하디착한 소년이 친구의 숙제장을 돌려주려고 날이 저물도록 친구의 집을 찾아 헤매 다니는 내용의 이 영화는, 누벨바그 시대의 프랑스영화와 어딘가 통하는 것 같으면서도 영 다르고, 할리우드 영화와도 전혀 딴판이었으며, 홍콩영화와는 애당초 거리가 멀었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확실히 새로운 무엇이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그 뒤 <올리브나무 사이로>(1994)가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고, <체리향기>(1997)가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으면서 의심할 나위 없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필두로 해서 그의 영화들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96년부터인데, 칸 영화제가 낙점한 뒤에야 한국 영화수입업자들이 관심을 보이게 마련이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직업배우가 아닌 일반인을 주연으로 쓴다. 또 스튜디오나 세트 대신 그냥 생활현장에서, 거리에서 영화를 찍는다. 이야기는 억지로 지어내고 꾸몄다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카메라를 들이댄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나 시네마베리테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는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거나 “이야기를 거리에서 줍는다”고 했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작가들 역시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해서 주로 거리에서 영화를 찍었다. 극영화에 다큐멘터리적 어법을 도입해서 카메라를 좀더 진실에 근접시키고자 하는 시네마베리테는 키아로스타미 영화문법의 핵심이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1991년 작 <그리고 삶은 계속되고>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무대였던 이란 북부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영화에 나왔던 아이들의 안부가 걱정이 된 감독이 차를 몰고 그 마을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그 다음 작품인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이 마을에서 <그리고 삶은 계속되고>를 찍고 있는 감독과 배우들 이야기다. 영화를 찍다 보니 영화 속의 부부로 캐스팅된 청춘 남녀 사이에 사랑이 싹트기도 한다. 하지만 물론 이 영화들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다큐적 진실을, 조작되거나 가공되지 않은 진실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또한 관객이 그 같은 진실을 보고 있다고 믿게 만들려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는 많은 장면들이 계산되고 연출된 것들이다.
요사이 국제영화제에 소개되고 국내에 수입되는 이란 영화들이 어느 정도 엇비슷한데 그 공통의 성분이 바로 키아로스타미적 요소들이다. <하얀 풍선>의 자파르 파나히 감독, <거북이도 난다>의 바흐만 고바디 감독 같이 키아로스타미의 조감독 출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천국의 아이들>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 등 1990년대 이후에 활동하는 영화감독들은 많든 적든 키아로스타미라는 영화적 자산에서 자양분을 취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들은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모두 ‘길 위의 영화’다. 로드무비는 할리우드와 유럽을 막론하고 익숙한 영화장르이지만, 걸어서 혹은 자동차를 타고 길을 떠나 마침내 어떤 파국의 지점이나 각성의 지점에 도달하곤 하는 로드무비들과 키아로스타미의 ‘길 위의 영화’는 성질이 좀 다르다. 속도감으로 미끈거리며 사람을 튕겨내는 심야의 고속도로, 너 나 할 것 없이 스트레스의 포로가 되고 마는 시끄럽고 복잡한 대낮의 시가지, 그런 것들은 키아로스타미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의 영화에서 길은 자연의 표정을 하고 있다. 다리를 놓고 아스팔트를 깔아서 건설한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사람이 지나다니는 흔적을 간직한 자연의 세계인 것이다.
<올리브나무 사이로>에는 올리브 숲 사이로 기나긴 오솔길이 나있다. 남자는 여자를 뒤쫓아 오면서 끈질기게 구애를 한다.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하면 어찌어찌 하겠다고 공약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차도르를 쓴 여자는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앞만 보고 걸어간다. 카메라는 이제 뒤로 쭉 빠져서 올리브 숲을 원경으로 잡아내는데, 저 아래 올리브 나무 사이로 개미처럼 작아진 남자가 끈질기게 여자를 쫓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언덕 너머로 길이 사라져버리는 소실점에 이르렀을 때 남자는 돌연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깡충깡충 뛰어서 가던 길을 되돌아 내려온다. 남자가 마침내 구애에 성공했음을 관객들은 알 수 있다. 여름 햇살에 이파리들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푸르른 올리브 숲은 두 청춘 남녀의 마음을 휘저어대는 연애감정만큼이나 싱그럽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사진에 나오는 길은 언젠가 그의 영화에서 보았던 바로 그 길들 같다. 가파른 언덕을 지그재그로 그으며 내려오는 고갯길은 숙제장을 돌려주러 이웃마을에 사는 친구를 찾아가는 소년이 달음박질치던 바로 그 길이지 싶다. 황량한 황무지 가운데 깊숙한 자동차 바퀴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저 비포장도로는 삶에의 희망을 잃은 남자가 자신의 죽음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 다니던 <체리향기>의 황토길 아닐까.
한때 저 길 위에서 카메라가 작동하고 스탭들이 벅적댔을 것이다. 아니면 감독이 촬영지를 물색하러 이란의 곳곳을 누비다가 우연히 저 길을 지났을지 모른다. 저 길로 알 수 없는 어떤 사람들이 무수히 지나가고 지나 가고 또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길들은 적막과 고요 속에 가로누운 채 산과 언덕, 나무들과 더불어 있다. 모든 일시적인 것들, 인공적인 것들이 치워진 뒤 길은 자기만의 표정으로 남았다.
모든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마음이 비추어내는 형상이다. 사진 역시 자신의 마음을 비춰 보이는 거울이다. 나는 키아로스타미의 사진들을 보는 동안 평화로움과 서글픔을 함께 느꼈다. 내 마음 속에 들어있는 평정과 슬픔의 함량만큼. 게다가 자연은 늘 무상함을 환기시킨다, 잔인하게도. 하지만 지금 유쾌하고 걱정 없는 사람이라면, 서글픔이나 무상함 대신 오직 평화와 희망의 느낌만이 전해올 게다. 모든 길은 희망을 향해 열려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삶이나 문제가 있기 마련이지. 하지만 삶의 즐거움을 떠올려 봐요. 갓 떠오른 태양의 아름다움. 맑은 샘물의 청량함. 그리고 달콤한 체리의 향기를....”<체리향기>중에서-
글 / 조선희 (소설가, 서울환경영화제 집행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