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주일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초조하고 절박하고 기대와 절망이 교차하는 바쁜 날들이었다고 한다. '글로벌 사우스'(남반부 개발도상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반러시아 성향의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취임식(12월 10일)에 참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은 '24시간 같은 1주일'을 보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으로 날아간 젤렌스키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바이든 미 대통령과 미 상원의원들,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 등을 잇따라 만났다. 이어 숨돌릴 틈도 없이 노르웨이의 오슬로로 향했다. 그는 13일 소셜 미디어(SNS) 엑스(X)를 통해 "오슬로에서 열린 북유럽 5개국(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아이슬란드, 덴마크)과 정상회의를 한 데 이어 참석 정상들과 양자회담도 가졌다"고 공개했다. 요나스 가르 스퇴르 노르웨이 총리와 만난 뒤에는 기자들에게 "(서방의) 지원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요나스 가르 스퇴르 노르웨이 총리와 공동기자회견을 갖는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이튿날(14일)에는 예고도 없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미국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본부가 있는 비스바덴으로 가 주요 미군 사령관들을 만났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그는 이날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비스바덴에서 "군사 장비및 탄약 공급을 위한 보급로 확보와 장비 수리 및 유지 보수 문제 등을 미군 주요 지휘관들과 협의했다"고 밝혔다. 사진에는 크리스토퍼 카볼리 유럽주둔 미군(나토) 통합 사령관과 대릴 윌리엄스 유럽 및 아프리카 주둔 미 육군 사령관, 안토니오 아구토 우크라이나 안보지원그룹 사령관 등이 젤렌스키 대통령과 함께 나온다.
독일 비스바덴에서 미군 지휘관들과 함께/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비스바덴은 유럽주둔 미군 사령부가 있는 곳이다. 지난해 9월 미국은 이 곳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장비 제공및 유지 보수, 우크라이나군 훈련 등을 통제하는 '지휘 센터'를 설치했다. 유럽연합(EU)와 나토(NATO) 회원국에게도 관련 정보및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가 14, 15일 열린 EU 정상회의에 초청을 받았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굳이 독일로 향한 것은 '지휘센터'에 대한 믿음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 전선 상황이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서방 언론들이 전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난 1주일은 노력에 비해 실망스러웠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영 파이낸셜 타임스(FT)는 16일 '젤렌스키에게 실망스럽고 쓰라린 한 주'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우크라이나 지도자는 미국과 EU로부터 장기적인 재정 지원 방안을 확보하지 못했다"며 "우크라이나에 곧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가장 민감한 시기에 자금 확보에 실패했다"고 전했다. 이에 반해 푸틴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의 '비나치화' 비군사화' 목표가 달성될 까지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FT는 “추가 지원 약속이 사라진 우크라이나는 자금 확보를 위해 돈을 찍어내야 할 수도 있다"며 "이는 경제적, 재정적 안정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필요한 만큼 키예프(키이우)를 지원하겠다'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발언이 이제는 '할 수 있는 만큼 지원하겠다'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실망스럽고 쓰라린 한주/FT 웹페이지 캡처
젤렌스키 대통령이 얻어낸 EU 가입 협상 시작에 대해서도 “가입 절차가 수년이 걸릴 수 있고 회원국에 의해 막힐 수도 있다”고 FT는 전했다. 그러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만난 국가 지도자들에게 '자금 조달'보다 EU 가입 협상에 대한 합의를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개인적으로 말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금 지원'이라는 실질적인 도움보다는 '정치적 성공'을 더 원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만큼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만큼 절박하다. 비판의 수위를 점차 높여가고 있는 포로셴코 전 대통령과 클리치코 키예프(키이우) 시장 등 야권인사들에게 '국제 정치적 성공'을 보여줘야 한다. 전쟁 개시 이후 세번째로 방문한 워싱턴에서 추가 지원에 대한 명확한 약속을 받아내지 못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스트라나.ua는 13일 '오늘을 종합하는 기획기사'의 '젤렌스키(대통령)의 미국 방문, 결과'(Визит Зеленского в США. Итоги) 코너에서 "그의 (백악관과 의회) 방문에서 결정이 내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우크라이나 지원 결정은) 아마도 내년 1월로 연기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영국 BBC 방송은 "지난 9월 방문과 달리 이번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영접을 나오지 않았다"며 "이는 대우크라 추가 지원에 대한 백악관의 비관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탄 자동차가 백악관에 도착하는 모습/캡처
미 CNN 방송은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도 달라졌다"며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필요한 한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이번에는 미국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중요한 무기와 장비를 계속 공급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지적했다.
미 워싱턴 포스트(WP)는 "그가 미국의 추가 지원이 없으면, 전쟁은 훨씬 더 잔혹해질 것이며 우크라이나군은 입지를 잃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미 공화당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2024년 전쟁 계획및 전망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기를 거부했다"고 전했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 의회에서 새로운 지원 패키지를 승인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명확한 동의를 얻지 못했다"고 썼다. 그는 미 상원의원들에게 "서방이 새로운 지원을 제공하지 않으면, 우크라이나는 게릴라전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우크라이나가 45세 이상의 남성을 군대에 징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이같은 발언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게릴라전을 편다는 것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장악했다는 뜻이다. 또 계엄령과 총동원령에 따라 60세 미만 남성이 동원 대상인데, 새삼스럽게 45세 이상을 강조한 것은 병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임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됐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동원된 사람들 중 40~50세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일부 여단 군인의 평균 연령이 54세라고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미국 방문 과정에서는 언론에서 주목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는지' 묻는 질문에 빙그레 웃었다. “예스 or 노"로 답변해달라는 기자의 집요한 질문에 바이든 대통령은 눈을 감고 웃기까지 했다. 앞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도움 없이 승리할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웃는 바이든 미 대통령/영상 캡처
존슨 하원의장은 "푸틴 대통령이 유럽을 통과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며 "우크라이나 지원의 필요성을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난 뒤에도 미국 남부 국경 강화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미 상원은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연말 휴회를 1주일 늦췄지만, 하원은 휴회 예정일을 바꾸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의 대우크라 지원안 결정은 아무리 일러도 내년 초에나 가능하다. 그것도 미 공화당이 요구하는 이민 정책(멕시코 국경 강화 포함)에 대해 백악관이 통크게 양보해야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