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신명 26,16-19; 마태 5,43-48 / 사순 제1주간 토요일; 2023.3.4;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의 법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신명 26,16). 이러한 명령의 근거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진리의 빛을 비추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심으로써 이 빛을 받는 모든 민족들 안에 당신의 나라를 세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창조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전해준 하느님의 법을 당시 유다인들이 어떻게 왜곡시켰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가르침에 따르면,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43)고 전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인용 말씀은 신명기 19,18에서 따오신 것인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즉,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은 동포라고 해석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동포이고 이방인은 미워해도 마땅한 원수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렇지만 이에 관한 원 출전구절은 이렇습니다: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레위 19,34). 여기서도 이방인은 동포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똑같은 이웃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원수는 미워해도 괜찮다고 당시 청중들이 잘못 알고 있던 바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고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 사랑에 있어 동포나 이방인의 구분은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29-37)를 들려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를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의 의미가 조상 대대로 전해들은 율법과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율법을 본래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취지대로 완성하고자 하는 것임을 밝히시며 몇 가지 예를 드신 사례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 사례들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아내를 버리지 말라, 정직하여라, 폭력을 포기하여라 하는 등 십계명의 가르침들이었습니다. 계명과 율법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것도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기준입니다. 그 사랑을 본받는 것이 우리가 완전해지는 길이며, 이로써 다른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빛을 비추어주라는 것이 창조신앙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창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포에 대해서건, 이방인에 대해서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참된 행복을 이루기를 바라시는 이 계시에 대해서 우리는 믿음과 공동체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또한 각자의 삶에서 하느님 나라를 창조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우리가 개인적 삶에서든 가정이나 사회적 인간관계에서든, 또는 나라와 문명을 이루어야 할 활동에서든, 진리는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서 나누어야 하는 소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가 하느님 나라를 각자의 삶에서, 가정에서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또한 나라와 문명에서 이룩하게 하는 힘이요 섭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를 위하여 주어진 설계도이여 그분의 영은 이를 위해 주어지는 기운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기준이자 모범은 이웃 사랑을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과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고 그분의 법을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시편 119).
교우 여러분! 하느님께서 모델이 되라고 부르셨던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부르심을 거부하자 다시 세우신 새 모델이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런데 2천 년을 흘러오는 동안 동서 분열도 겪었고 내부 이탈도 겪었으며 공산주의나 이성주의 등 무신론 세력에 의해 포위당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박해를 백년이나 겪었고 일제강점기 동안 프랑스 선교사 출신의 교구장이 채택한 정교분리 노선 때문에 삼일만세운동에 참가하지 못해서 동족으로부터 비난받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그 노선은 만일 천주교 신자들이 참가할 경우에 또 다시 박해를 받게 될 것을 염려한 탓에 내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랑할 수 있는 새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아시아 선교 활동에서 겪었던 시행착오까지 바로잡을 수 있는 처지에 우리가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아시아의 주교들이 호소한 대로(문헌 아시아 교회), 북녘 동포와 아시아의 이웃 민족들에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네”(2코린 6,2. 복음 환호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