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승
김일연목사
중학교 3학년 시절,
고교 진학 당시, 고향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경주로 가고 싶었습니다.
외갓댁이 있고 이모님이 계시는 K공고로 가고 싶었습니다.
당시엔 빨리 기술배워서 취업한다는 이유로 공고가 인기가 높았습니다.
경주는 고향에서 20Km이고, 대구는 70Km 거리에 학교가 있었죠.
고향 마을에서 함께 자란 대부분의 친구들이 경주로 원서를 쓰고
있을 때 담임선생님께 K공고에 원서를 쓰고 싶다고 부탁했지만
성적이 부족하다고 대구 K공고로 가라고 했죠.
경주와 대구는 커트라인 점수 5점 차인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서울 형님이 담임 선생님을 만나 부탁까지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 드리고 싶어서
집 가까운 곳으로 진학하려고 했는데 정말 마음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죠.
그런데 막상 원서 마감을 하고 보니 경주보다 대구가
훨씬 더 치열했습니다.
학생 약 1,000명을 선발하는 데 4,800명이 입학원서를 낸 것입니다.
그땐 철이 없어서 4.8대 1이 무엇인지도 몰랐죠.
입학시험을 치러 갈 때도 서울 형님이 동행을 해서
대구 청구고등학교 시험장을 알려 주었습니다.
고입 시험을 치기 위해 하루 전에 찾아간 대구 4촌 형님댁!
형님의 딸이 경북여고에 다녔는데 그 조카가
아재 시험치는데 참고하라며 고입
시험예제 여러 묶음을 건네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정말 세밀하고 놀랍습니다.
물론 응용해서 출제가 되었지만 경북여고 조카가 준
그 문제집의 문제가 5문제 이상 나왔습니다.
시험발표가 있던 날, 고향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아침 일찍 완행버스 첫차 타고 영천 터미널까지 가서,
영천에서 직행버스 타고 대구 동부정류장에 내렸습니다.
대구에서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시내버스 127번을 타고
가다 서부정류장 주변에 하차하여 대명동 산꼭대기에 보이는
학교 건물만 보고 특공대처럼 산으로 뛰어 올랐습니다.
약 2km 이상을 뛰고 또 걸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친구들과 같이 택시를 탔을 텐데, 그 당시엔
택시는 절대로 타면 안되는 교통편이었죠.
돈은 곧 부모님의 땀과 피라는 생각으로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죠.
지원한 학교엔 기계과, 전기과, 건축과, 토목과 등
이런 과가 있었는데 12반 중에 저는 9반 토목제도과에
합격했습니다. 성적 순서로 학과가 정해진 것 같습니다.
지원자 약 4,800명 중 대략 530등 정도 한 것 같네요.
중학 시절, 친하게 지내며 도시락 먹을 때
콩잎 반찬을 얻어먹던 친구가 있습니다.
시골 중학교지만 성적이 상위권에 속한 친구입니다.
친구는 대구로 가고 싶었고 기계과에 하향 지원을 했습니다.
확실하게 K공고 기계과에 합격하려고요.
그런데 친구는 주간 12개반에서 다 밀렸고
야간 4반, 원치도 않던 OO과에 합격했습니다.
고향 친구들 대다수는 경주로 지원했지만,
함께 대구에 지원했던 고향 친구들은 1명은
야간반 후보에 이름이 있었고, 다 떨어졌습니다.
4.8대 1의 결과는 정말 충격적이었죠.
친구들 앞에서 합격했다고 웃을 수도 없었습니다.
중3 시절!
그 당시엔 하나님도 잘 믿지 못했고, 경주에 가면
이모님 따라 주일예배에 몇 번 가보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인형극 보여주신다고 해서
교회에 가보고 정말 손꼽을 정도로 믿음이란 것이
약할 때였지만 하나님은 제 인생에
큰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합격의 기쁨도 컸지만, 학비를 비롯해서
대구에서 공부할 것을 생각하니 걱정도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금을 당시엔 지정 은행에 가서
직접 납부해야 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온라인으로 보내면 되는데 고향에서
70Km 거리에 있는 대구까지 가서 학교 주변 은행에서
입학금을 직접 납부 했습니다.
은행에 몰려든 인파로 추운 날씨에 긴 줄을 서서 떨며
부산 형님이 그렇게 힘들게 등록금을 납부했습니다.
철없이 살아왔던 지난 세월 속에 부모님의 헌신과 희생,
형제의 사랑이 항상 함께 했음을
이 글을 쓰며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대구에는 숙모님이 계셨고 4촌 형님댁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1학년 때는 대봉동 영선시장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하고 주로 걸어 다녔습니다.
지금은 이천동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큰 도로로 우회해야 하고
오르막길에 끌고 가야 하는 관계로
걷는 것과 큰 시간 차인 없었죠.
걸어가면 속도는 느리지만 계속 지름길로 가다 보니
시간은 비슷했습니다.
때론 명덕로터리 주변에서 시내버스도 타 보았지만
노선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승차하고
학교 입구에 내려서 걷다 보니 이 또한 별 매력이 없었죠.
2학년, 3학년 때는 주로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 시절, 3년 동안 아침, 저녁 식사 준비와
학교 점심 도시락을 사 주신 형수님!
교복과 교련복을 손빨래 하시며 사랑으로 섬겨주신 숙모님!
형제도 아닌 4촌 형님, 형수님의 고귀한 사랑의 수고
덕분에 고교졸업을 했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로 살고 있습니다.
제 인생에 큰 은혜를 베푸신 진연 형님과 형수님!
참으로 귀한 사랑입니다. 늘 감사하며 삽니다.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특별한 사랑입니다.
성적우수를 받을 만큼 공부를 참 잘하지는
못했지만 공부를 참 좋아했습니다.
시험 기간이면 과목별 목표점수가 벽에 붙어 있었고
때론 달성도 하고 때론 실패도 했습니다.
좋아했던 과목은 국어, 영어, 한자, 기술, 농업 등이며
수학에서 평균 점수가 많이 깎였죠.
중3 시절, 성적이 부족해서 등 떠밀려 대구로 갔지만,
대구에서 저는 큰 세상을 보았습니다.
서울은 아니지만 영천 산촌에서 살았던
제겐 큰 세상이었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항상 보았던 대구교대 캠퍼스를
귀가 길에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
대학교 구경도 하고 대학생들의 학교 생활도
지켜 보았습니다.
마침 운동장 테니스장엔 교수님들이 경기중이라
친구와 함께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더니
저에게 한 번 쳐 보라고 해서 복장도 갖추지 않은채
친구와 함께 몇 번 서브를 넣었더니
와~ 잘한다고 하시며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계명대 캠퍼스도 친구들과 찾아가 보았고
무엇보다 성주대교 하이킹이 참 기억에 남습니다.
특별한 자전거도 아닌
학교 길에 타고가던 그 자전거를 타고
왕복 50Km가 넘는 성주대교!
당시엔 비포장길도 많아서
바퀴 펑크가 나서 먼 길을 끌고 가서
수리하고선 다시 속도를 내었지만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고
힘들었던 만큼 더 멋진 인생추억이 되었습니다.
TV에서만 보던 권투를
영어선생님의 소개로 할인받아서
대구 실내체육관에서 권투경기를 직접보기도하고
조카와 함께 야구, 축구도 하고 목욕탕도 가고, 영화도 보고
친구들과 어느 여고 시화전을 구경하기도 하고
학교행사로 신천하천 환경정화운동, 그리고 성서지역 대민지원 벼베기
행사, 학교 소풍 때 갔던 앞산공원, 가창댐,
친구집 주변에있는 두류공원 등
대구의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푸른 꿈을 키웠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도 많지만 대구라는 도시가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이 어린 시절 경험한 하나의 역전승입니다.
에스더 성경처럼, 하나님께서 등 뒤에 숨어 역사하셨던 멋진 인생 스토리입니다.
그땐 철이 없어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필연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