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와의 만남
몇 달 전부터 고국 방문을 앞둔 호주에 사는 이종 누나의 전화가 잦습니다. 둘째 이모의 큰따님인 누나는 어려서 친모를 잃고 서모 아래서 자란 탓인지 당신의 막내 이모인 내 어머니를 잘 따랐습니다. 일찍 혼인해 고향 동네인 동두천에 살다가 호주로 떠났는데 벌써 이민 생활이 반백 년이 가까워집니다.
젊었을 때는 먹고사는 일이 바쁘기도 하거니와 제 식구 건사하는 데 온통 마음을 쓰다 보니 다른 피붙이 생각은 뒷전이었을 것입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누나가 고국을 떠났을 때 이미 남이 된 것이라 여겨 잊고 지냈습니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통신수단이라야 유선 전화뿐이어서 쉽사리 전화에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제 이모에게 안부 전화라도 해오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어머니의 전언에 잘 지낸대요? 하고 건성 묻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누나의 전화가 잦아지기 시작했는데 누나가 칠십을 넘기면서부터요, 매형이 돌아간 몇 해 후부터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돌이켜보면 어느 날 문득 누나는 하늘 아래 피붙이는 모두 돌아가고 이모 한 분만 남았다는 놀라움과 외로움이 엄습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식이 여럿이지만 그들도 출가해 가정을 이루고 나니 그저 자식은 자식일 뿐 당신의 외로움이나 서러움을 나눌 처지는 아니어서 이모를 그리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우리 집에 와 며칠씩 묵으며 지내고는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간 후로는 전화가 뜸했습니다. 별로 할 일이 없어진 후에야 아들 외출하고 손자 학교 가고 난 후 맥 놓고 TV라도 보다가 문득 고향 생각, 피붙이 생각이 나면 전화하고는 했을 것입니다. 언제나 전화할 때면 가을에는 가야지, 내년에는 가야지, 더 늦기 전에 가야지 하다가 올해 오기는 왔는데 팔순이 지난 호호 할머니 모습입니다. 살림이 넉넉한 딸이 노자를 마련하고 막내딸이 길을 안내했습니다. 같이 사는 아들이야 그렇다 쳐도 넷이나 되는 딸들이 모두 모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 꾀가 난 딸들이 더 늦기 전에 모두 모이자고 입을 모았을 것입니다.
말은 안 했지만 나에게 전화하듯 했으면 아이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죽기 전에 서울에 몇 번이나 가볼까, 가게 되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야, 하고 되뇌는 통에 서둘러 제 어미의 여행을 준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얼마나 기특합니까. 더구나 막내딸의 딸이 외할머니와 함께 여행하고 싶다며 급히 휴가를 내 따라붙었다니 참으로 효성이 지극합니다.
이번 여행은 지난번과 달라서 누나의 발길이 좀 무거워 보입니다. 사나흘 전에는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낸 이웃사촌 언니와 점심을 했는데 말은 다음에 다시 보자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 없어 하는 눈치여서 마치 죽어서 다시 만나자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말끝마다 ‘언제 다시’라는 말을 붙여서 이번 여행이 주는 의미와 함께 비장함마저 엿보게 합니다. 나는 누나와 여덟 살 차이지만 이종 간에는 내가 제일 큰 동생이어서 말 상대가 되기도 합니다. 하기는 인생으로만 따지자면 우리 모두 할 일 다 한 늙은 도토리나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냥 서서 내려다보는 형편이어서 그럭저럭 말이 통하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동생이라고는 하나 혼자 사는 이종의 집에 머무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을 터이고, 논산에 사는 내 누이동생도 보고자 그곳에서 며칠 머물고 싶다고 합니다. 용산역에서 떠나는 KTX 기차표를 예매해 놓았는데, 혼자서는 절대 갈 수 없다고 해 그 총명하던 누나를 용산역까지 가 기차에 올려놓은 후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만시지탄과 서글픔을 느꼈습니다. 남편이 있었다고는 해도 그야말로 낯설고 물선 이국에서 오뚜기처럼 넘어지고 일어서던 극성은 사라지고 어디서나 보는 왜소한 할머니가 되어 돌아온 누나를 보면서 별수 없는 생몰의 이치를 깨닫습니다.
오늘 막내아우의 농장에 우리 다섯 남매와 누나가 모여 자그만 파티를 합니다. 환영 파티인지 이별 파티인지도 구분이 안 되는 이 작은 파티가 젊은이들에게는 환영파티가 될 것이지만 우리와 같은 나이 든 이에게는 이별 파티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웃고 떠드는 중에 누구는 과거 기억을 들추기도 할 것이며, 누구는 늘 말하듯 퍼스(perth)에 있는 누나 집에 모여 벌일지도 모르는 미래의 파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느 것이든 추억은 소중한 것이어서 내가 느낀 것을 장차 다른 사람이 느끼게 될 것이고 오늘 있었던 작은 파티가 이별의 그것이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만나면 궁금증이 다 풀리고 그동안의 그리움이 사라질 줄 알았지만 못 보는 동안 쌓인 삶의 흔적이 마냥 보기 좋은 것은 아니어서 또 다른 걱정거리만 얻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언제 다시 볼까 궁리하다가 평균 나이에 빗대 보게 되는데 그저 십 년 안팎이면 살 만큼 산 것이니 만날 기회도 한두 번이면 그만일 듯합니다. 두 주 후면 호주로 돌아갑니다. 반가움에 펄쩍 뛸 것 같았던 마음이 막상 만나고 나니 벌써 또 다른 그리움과 아쉬움만 남깁니다. 그래도 안 본 것보다는 한결 마음이 좋습니다.
문득 ‘사는 게 뭐 이래?’ 하다가도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생각으로 바뀝니다. 누나는 더는 나에게 용기를 북돋우지도 않고 세상과 맞서 싸우라고 보채지 않습니다. 보나 마나 나의 무능을 보았거나, 세상 흘러가는 이치를 깨달았거나, 욕심을 버리고 포기하는 법을 터득한 까닭입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층 굵어진 주름이 결심처럼 그어졌습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헤어지면서 애써 태연한 체하며 다음에 봅시다, 라고 크게 인사합니다. 이번에는 반신반의해도 다음에 헤어질 때는 누나, 잘 가, 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