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서핑의 계절이다. 북적북적하던 피서객이 사라진 해변이 평화롭고, 잔잔하던 파도가 점점 높아지며 서퍼를 유혹한다. 동해와 남해, 제주 등 해변에서 서핑하는 모습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서핑은 1990년대 후반 제주 중문색달해변과 2000년대 초반 부산 송정해변에서 자생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선구적인 서퍼들이 수도권에서 가깝고 파도가 좋은 양양의 해변에 정착하며 서핑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인구해변 서핑 숍의 재미있는 간판
서핑의 메카로 통하는 죽도해변과 인구해변 일대에는 서핑 관련 숍이 30여 개나 있고, 카페와 퍼브, 클럽 등이 모인 거리는 ‘양리단길’이라고 부를 정도로 핫 플레이스가 됐다. 서핑은 중독성이 강하고 서퍼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다. 서핑의 매력을 찾아 양양으로 떠나보자. 죽도해변과 인구해변은 야트막한 죽도산을 사이에 두고 이어진다. 두 해변을 한눈에 보고 싶다면 죽도산에 올라야 한다. 죽도산은 예전에 작은 섬이었는데, 지금은 육지와 연결됐다.
죽도산 꼭대기에 있는 죽도전망대. 백두대간과 해변이 한눈에 펼쳐진다.
인구해변이 끝나는 지점에 죽도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죽도산 입구에 자리한 성황당은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풍어제를 올리는 마을의 신성한 장소다. 성황당부터 울창한 솔숲이 이어진다. 솔숲 군데군데 대나무가 자란다. ‘죽도’는 대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10분쯤 오르면 철골 구조가
세련된 죽도전망대가 나온다.
인구해변에 둥둥 떠 있는 초보 서퍼들
키 큰 솔숲에서 전망을 확보하기 위해 전망대를 높이 세웠다.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야 비로소
전망대 꼭대기다. 시야가 활짝 열리면 와~ 탄성이 먼저 나온다. 멀리 내륙 쪽으로 우리 국토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가까운 바다 쪽은 인구해변에서 죽도산을
지나 죽도해변, 동산해변까지 모래밭이 펼쳐진다. 해수욕장 세 곳이 이어진 길쭉한 해변이 국내
서핑의 메카다.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서퍼들이 개미처럼 보인다.
죽도산에 자리한 죽도정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울창한 솔숲에 들어앉은 죽도정을 만난다. 1965년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정자다. 죽도정을 지나 더 내려오면 거대한 바위가 즐비한 해변이다. 부채처럼 펼쳐진 부채바위, 신선이 앉았다는 신선바위 등 재미난 바위가 많다. 바위 지대를 지나면 죽도해변이 보인다.
죽도해변에서 패들보드를 즐기는 사람들
죽도해변에는 서핑하는 젊은이, 서서 노를 젓는 패들보드를 타는 연인, 해수욕을 즐기는 가족이
가득하다. 죽도해변에서 양양군청의 소개로 죽도마을 토박이인 씨맨서프하우스 황병권 대표를 만났다. 죽도해변과 인구해변이 서핑의 메카로 자리 잡은 이유가 궁금해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서핑 친구들인 외지인이 우리 마을에 들어오는 데 제가 가교 역할을 했어요. 마을과 외지인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조율하기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양쪽에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양양이 서핑 명소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한 죽도마을 토박이 황병권 씨
황 대표 역시 서퍼다. 과거에는 원양어선을 탔는데, 스포츠를 좋아해서 죽도해변에 다이빙 숍을
차렸다. 어느 날부터 해변에 서퍼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고, 우연히 서프보드를 탔다가 서핑의
매력에 푹 빠졌다. 서핑에 매진해 전문가 자격증을 땄고, 지금은 죽도해변에 씨맨서프하우스를
열고 서핑 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인구해변에서 단체로 서핑 교육을 받는 학생들
초보자가 서핑에 입문하기는 어려울까. 생각보다 쉽다. 대다수 서핑 숍에서 초보자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안전 교육, 육상 훈련, 실전 훈련 등을 두 시간쯤 받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
롭게 개인 연습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교육의 핵심은 서프보드에서 일어서는 ‘테이크 오프’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테이크 오프는 3단계로 나뉜다. 첫째, 서프보드에 배를 깔고 누워 두 팔로 수영하듯 앞으로 나가는 패들링. 둘째, 서프보드에서 상체를 일으키는 푸시 업. 셋째, 서프보드에서 일어서는 스탠드 업.
바다에서 서핑 실전 훈련을 하는 가족
교육은 먼저 모래밭에서 푸시 업과 스탠드 업을 연습한다. 자세는 간결할수록 좋다. 충분히 연습
했으면 물에 들어가 실전 훈련을 한다. 적당한 파도가 올 때 강사가 수강생의 서프보드를 밀어주고, 수강생이 푸시 업과 스탠드 업을 잘하면 파도 위에 선다. 이때 짜릿하면서 희열이 솟구친다. 이 짜릿함을 맛본 사람은 대개 서핑에 푹 빠진다.
휴휴암의 너럭바위 ‘연화법당’
서핑을 마치고 양양의 명소를 둘러보자. 인구해변에서 약 900m 떨어진 휴휴암(休休庵)은 바닷가에 자리한 암자다. 번민을 바다에 던지고 쉬고 또 쉬라는 넉넉한 이름이다. 이곳의 명물은 ‘연화법당’이라 불리는 너럭바위로, 그 위에 발가락바위와 발바닥바위, 광어바위 등 각양각색 작은 바위가 있다. 광어바위 근처에 황어 떼가 산다. 사람들이 물고기 밥을 던져주면 황어 떼가 몰려든다. 황어 떼는
가을에 따뜻한 곳으로 갔다가 봄이면 휴휴암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하조대전망대 아래 이어진 하조대둘레길
하조대는 휴휴암에서 차로 10분쯤 걸린다.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과 조준이 즐겨 찾은 곳으로, 두
사람의 성을 따 이름을 붙였다. 예전에는 주로 정자에서 기암절벽과 노송을 감상했지만, 최근에는 하조대전망대를 찾는다. 전망대는 하조대해변 오른쪽 끝에 있다. 야산 한쪽에 등대 모양 전망대를 세웠다. 바다 쪽으로 스카이워크가 있어 사람들이 바다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스카이워크에서 드넓은 하조대해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아래쪽에는 하조대둘레길이 반대편 해변으로
이어진다.
양양전통시장에 강원도 감자와 함께 나온 강아지 세 마리
양양 시내에 있는 양양전통시장은 끝자리 4·9일이면 오일장이 선다. 영동 북부 지방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옛 명성은 퇴색됐지만, 오일장이 서는 날에는 시내가 제법 활기차다. 설악산에서 자란
송이버섯을 비롯해 각종 버섯과 약초가 내려오고, 동해에서 다양한 해산물이 올라온다. 시장 좌판
에서 산과 바다의 특산물이 만나는 모습이 신기하고 정겹다. 떡집에서 강원도 감자로 빚은 감자떡, 먹거리 장터에서 고소한 냄새 풍기며 부친 메밀전, 과일 좌판에서 새빨간 자두를 샀다. 왠지 뿌듯한 맘으로 시장을 총총 빠져나와 양양 여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