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33. 기도의 길 ② (「가톨릭교회 교리서」 2673~2682항)
예수님의 가장 큰 약점인 성모 마리아
제목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에게 약점이란 바로 자신에게 큰 은혜를 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은혜를 갚을 줄 압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의 약점이라는 말은 성모님께서도 예수님께 이미 많은 것을 드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께서는 먼저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거처가 되어주셨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바로 시온의 딸이요, 계약 궤이며,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거처’(묵시 21,3)입니다.”(2676) 이 지상에 하느님이 머무실 깨끗한 땅이 하나도 없었는데 오직 성모님만이 성자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묵을 곳이 아무 데도 없었는데 깨끗한 잠자리를 내어주었다면 누가 그 사람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 당신 인성도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신성만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 신성이 인성을 취해야 온전한 인간이 되어 인간이 지은 죄를 대신 보속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오염되지 않은 인성을 지닌 인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인성을 내어줌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봉헌함을 의미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그 인성을 나누어줄 때 자녀의 운명과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아프면 부모도 아픕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셔야 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도 하느님께 빚이 있지만, 하느님도 성모님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구원 사업에 협조자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자신 있게 당신이 원하는 것을 청하실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이는 마리아께서 이제 하느님의 아들이 자신 안에서 마치 신부(新婦)처럼 취하신 그 인성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2675)
성모님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 첫 번째 기적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며 거부 의사를 밝히십니다. 성모님은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하고 명령하십니다. 마치 아버지가 말을 듣지 않는 자녀들에게 용돈을 못 주겠다고 하는데 엄마가 “얘들아, 이리 와라. 아빠가 용돈 주신다고 하신다!”라며 아이들을 부른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성모님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당신은 그러한 청을 할 자격이 있고 또한 예수님은 그러한 당신의 청을 들어주실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 그러한 상황에서 끝까지 청하여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요구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존재는 오직 성모 마리아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성모 마리아께서 최고의 약점이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 청하면 그리스도께서 들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은, 마리아 덕분에, 하느님의 복 그 자체이신 분을 받아 모십니다.”(2676)
담보가 없는 상황에서 큰돈을 빌리려면 보증인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보증인은 은행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겐 그러한 보증인이 계십니다.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이러한 분이 우리 어머니로 계시는데 그분을 통하여 주님께 청하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마리아께 기도할 수 있고”, “마리아와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2679) 성모님은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 이르게 하는 가장 완전한 길이십니다.
[생활교리] 사말교리 (2) 심판 : 하느님의 ‘정의’와 ‘은총’이 함께 이루어지는 시간
‘죽음 후에 무엇이 찾아오는가?’ 이 물음에 가톨릭교회는 상선벌악의 원리(삶의 모든 행실에 따라 상 또는 벌을 받음)에 따라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심판은 죽음 후에 즉시 받게 되는 ‘개별 심판’(사심판)과 사도신경에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듯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공심판)으로 이루어진다.
보통 ‘심판’하면 어떤 생각과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어쩌면 심판을 유사종교들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파멸로만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는 심판이 우선적으로 ‘하느님과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심판 교리는 우리 모두에게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현재 삶을 바로 잡는 기준”이요, “양심의 소리”(『희망으로 구원되는 우리』 41)로서 우리가 “더욱 진지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촉구”(『죽음 · 심판 · 지옥 · 천국』 24)하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에서 심판의 궁극적 의미는 “정의이며 또한 은총이기 때문에 희망”(『희망으로…』 47)으로의 초대이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악이 선을 이기는 것처럼 보여지는 불의에 가득 찬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작가의 고백처럼 ‘정의와 진실은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할지라도, 긴 역사 속에서 승리하는 법이다’(조정래). 곧 이 땅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잘못과 불의에 대한 심판은 분명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이루어진다. 다만 여기서 심판은 단지 이 땅에서 밝혀지지 않은 죄와 잘못만이 아니라, 숨겨져 있었던 선의와 의로움 역시도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느님의 정의가 명백히 드러나는 심판은 누군가에게는 두려움 속에 “수치를, 영원한 치욕”(다니 12,2)을 감당해야 할 시간인 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희망 속에 하느님의 위로를 받는 복된 날(마태 5,3-12 참조)이 될 수 있다.
또한 심판은 하느님의 정의만이 아니라 동시에 그분의 은총을 통해 함께 이루어진다. 그러니 심판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정의와 은총을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죽음…』 29 참조). 사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후에도 연속되는 배반과 불충실로 일관하였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탈출 34,6)하신 분으로 당신 백성을 돌보셨다. 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악인의 죽음이 아니라 그가 자기의 잘못된 길을 버리고 그분께 돌아오는 일이기 때문이다(에제 18,23 참조).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이에게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베드로의 물음에 아무 제약과 조건 없이 용서하도록 말씀하셨다(마태 18,21-22 참조). 그렇다면 정작 한없는 용서의 가르침을 남겨주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한계 앞에서 얼마나 더 큰 은총과 자비를 베풀어주시겠는가!
단연코 그리스도교 심판의 목적은 막연히 미래에 상과 벌을 내리는 것으로 한정시킬 수 없으며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떠나간 이를 회개로,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왜, 우리의 정의롭고 자비로운 심판관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요한 12,47) 오셨기 때문이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성무일도(Officium Divinum)
요즘 성무일도를 바치는 신자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성무일도는 주로 성직자와 수도자들만이 바치는 기도로 알려져 왔는데, 그 명칭대로 ‘일과에 따라 바치는 거룩한 직무’로서의 기도라고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의 다른 이름은 ‘시간 전례’(Liturgia horarum)입니다. 여기서 ‘시간’은 하루의 일정한 때에 바치는 기도의 특성을 드러내고, ‘전례’는 이것이 교회의 공적 예배라는 점을 잘 표현해줍니다.
하루 중 시간에 맞춰 바치는 성무일도의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초대송 : 초대송은 하루 중 첫 번째로 바치는 기도로서 하느님께 찬미 노래를 부르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도록 신자들을 초대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초대송이 아닌 아침 기도로 하루를 시작할 때, 특히 공동체의 노래로 바치지 않을 때는, 초대송을 생략하고 “하느님 날 구하소서.”라는 아침기도 도입구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2. 독서기도 : 독서기도는 새벽 밤 기도의 전통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이것은 침묵과 죽음, 기다림과 고요함의 시간인 새벽에 성경과 교부(敎父)의 글을 읽고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사목적이고 현실적 이유로 하루 중 언제라도 바칠 수 있지만, 새벽 밤 기도라는 특성은 같습니다.
3. 아침기도 : 아침기도는 어둠이 걷히고 새날이 밝아 오는 아침에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아침, 새벽, 떠오르는 태양, 하루의 시작 등 아침과 연결된 상징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드리는 교회의 아침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루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날을 주님께 봉헌하는 아침 제사의 의미도 지닙니다.
4. 낮기도 : 낮기도는 삼시경(09시), 육시경(12시), 구시경(15시)으로 나뉩니다. 이 기도들은 해당 시간에 일어난 주님의 수난과 초기 복음 선포 때의 사건들을 기념합니다. 세 개의 시간경을 전부 바칠 수 없을 땐, 가장 근접한 시간경을 바칩니다.
5. 저녁기도 : 아침기도와 함께 “매일 성무일도의 두 축”(전례헌장 89항)인 저녁기도는 일과를 마친 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신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고, 어둠으로 상징되는 죽음과 함께 주님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를 표현합니다.
6. 끝기도 : 끝기도는 잠자기 전 하루를 마감하는 기도로서 그날 일과를 성찰하고 주님 자비에 자기 자신을 의탁하는 기도입니다. 맞이할 잠은 죽음에 비유되는데, 죽음은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부활하리라는 희망으로 연결됩니다.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끝기도 후에 성모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성무일도는 총 네 권이지만, 독서기도를 빼고 한 권으로 엮은 <소성무일도>도 있습니다. 매월 「매일미사」 뒤쪽에는 그날 전례에 따라 바칠 소성무일도의 쪽수가 나와 있습니다. 또한 스마트폰에 애플리케이션 <성무일도>를 설치하면, 그날 바칠 성무일도를 쉽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학26] ‘교회’라는 말에 어떤 의미를 담으시나요?
‘교회’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십자가, 성당 건물, 신부님, 수녀님 등등 다양할 것 같습니다. 아마 가장 인상적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교회가 정말 좋아.’, ‘교회가 그러면 안 되지.’, ‘난 교회 때문에 힘들어.’ 등등을 말씀하신다면 그때 교회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일까요? 아마도 각자의 체험이 그 단어에 들어 있을 것 같습니다. 발터 카스퍼 추기경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교회 ‘때문에’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와 ‘함께’ 고통받았습니다.” 이분은 교회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담으신 걸까요?
성경에는 교회를 가리키는 이미지들이 많은데, 양 우리, 양 떼, 하느님의 밭,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거처, 거룩한 성전, 그리스도의 신부, 그리스도의 몸 등등이 그것입니다. 이 중 교회 역사에서 특별히 많이 사용한 것은 아마 ‘그리스도의 신부’와 ‘그리스도의 몸’일 것입니다.
한편 교회사에서, 교회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공식적 가르침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공의회는 <교회헌장>을 통해 교회가 누구인지, 교회의 사명은 무엇이고 누가 그 사명을 수행하는지, 그리고 교회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지를 장엄하게 그리고 정말 아름답게 선언합니다. <교회헌장>은 성경에 나오는 이미지들 외에, 교회를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표현으로 ‘하느님 백성’을 선택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단어는(1베드 2,9 참조)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연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향해 광야를 걸어갔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향해 인간 역사 속에서 걸어가는 모습을 잘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백성이란 단순히 평신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에 속했던 것처럼, 교황님도 주교님도 사제들도 하느님 백성에 속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공의회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표현을 빌려, 하느님의 백성이란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세례받은 사람들 전체’라고 선언합니다. 참고로 교황님은 ‘로마의 주교’이기도 하십니다.
‘백성’이라는 말은 교회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표현합니다. 저마다의 몫을 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사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성품성사를 통해 직무 사제로서 살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며, 이 양쪽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수도 생활이라는 양식에 따라 살기도 합니다. 저마다의 몫을 하면서 ‘하느님의 한 백성’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백성에 속하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불러 모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단순히 어떤 제도만도 아니고, 어떤 특정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닌,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불러 모으신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교회 안 상징 읽기] 바다 생물 ‘샌드달러’에서 읽는 상징성
파도에 휩쓸려 백사장으로 밀려온 예쁜 조가비 하나에 문득 눈길이 갈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조가비처럼, 비록 조가비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바다 생물 하나가 있다. 그 주인공은 ‘샌드달러(sand dollar)’인데,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생물의 잔해를 보면서 의미 심오한 몇 가지 상징성들을 읽어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시인은 이 상징성을 시 한 편으로 소개했다. ‘샌드달러의 전설’이란 시다.
어느 무명 시인의 시
이 보잘것없는 껍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들려주고 싶은 아주 작은 이야기를
나는 찾아낼 수 있지.
이 껍데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노라면
거기에서 못에 뚫린 구멍 네 개와
로마 병사의 창이 만든 다섯 번째 구멍을
너도 찾아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껍데기 한쪽에는 주님 부활을 상징하는 백합이 있지
그리고 그 한복판엔 주님 성탄의 별도 있는데
그건 목동들에게 나타나
멀리서부터 그들을 안내한 별이란다.
다른 쪽에 새겨져 있는 건
성탄절의 꽃 포인세티아
아기 예수님의 탄일을, 즐거운 성탄 시기를 떠올리게 한단다.
이제 그 껍데기를 깨뜨려 열어 보렴
그리고 거기에 대기하고 있던
하얀 비둘기들을 날려 보내
선의와 평화를 전파하게 하렴.
이 작고도 단순한 상징물은
세상 끝날까지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그리스도께서 도움을 주시려고
너와 내게 남기신 것이란다.
시에서 소개하는 이 바다 생물 샌드달러는 극피동물이다. 극피동물이란 석회질의 작은 판들로 이루어진 몸체에 가시처럼 생긴 돌기들이 돋아있는 종류의 바다 생물들을 말하는데, 불가사리, 성게, 해삼 따위가 이에 속한다.
샌드달러는 태평양, 대서양, 카리브해 일대의 깊지 않으며 모래 또는 진흙이 많은 연안에서 해저에 서식하는 성게의 일종이다. 샌드달러의 몸체는 살아 있을 때는 색이 적갈색에서 짙은 보라색으로 수시로 바뀌고, 거기에 돋아있는 작은 돌기들은 유연하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이 생물을 살아있는 모습보다 죽은 뒤에 마르면서 하얗게 탈색되고 석회화해서 단단해진 잔해의 모습으로 떠올린다. 둥글고 납작한, 지름 7~10cm 정도 크기의 원판처럼 생긴 잔해가 오히려 친근하면서도 신기하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샌드달러라는 이름은 그 잔해의 생김새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죽어서 흰색으로 탈색되며 단단해진 잔해가 예전에 미국과 스페인에서 사용되던 주화들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란다. 그런가 하면 둥글납작한 모양이 어찌 보면 비스킷처럼 생겼기에 지역에 따라서는 케이크 성게, 바다 비스킷, 똑딱이단추 비스킷, 바다 쿠키, 팬지 조개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참고삼아 말하자면, 샌드달러와 비슷한 외관과 특징을 지닌 바다 생물이 우리말로는 ‘연잎성게’라고 불리는데, 이 또한 그 생김새에서 연상되는 이름을 붙인 것일 터다. 사실, 일반적인 연의 크고 널찍한 잎이 아니라 수련의 작고 앙증맞은 잎을 연상하면 사뭇 그럴싸한 이름이라 여겨진다.
샌드달러가 보여주는 상징성
백합 모양의 무늬 – 주님 부활: 샌드달러의 몸체의 윗면에는 백합 모양의 무늬가 있다. 이 무늬가 드러나 보이는 곳은 원판 모양의 몸체에 돌기처럼 돋아있는 관족(管足, 몸 표면에 돌출해 있는 가느다란 대롱 모양의 기관)들이 모여서 도열해 있는 부위다. 이 부위를 보대(步帶)라고 한다. 샌드달러는 보대의 관족들을 이용해서 해저에서 이동하고, 먹이를 먹고, 숨을 쉰다. 샌드달러가 죽으면 몸체는 바닷가로 떠밀려 나와서 마르고 석회화하는데, 이때 다른 부위는 희미해지거나 없어지지만, 꽃무늬만큼은 선명하게 남는다. 이 무늬를 보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주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백합을 떠올렸다.
별 모양의 무늬 – 주님 성탄: 백합 모양 무늬의 중앙부에는 또한 별 모양의 무늬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무늬를 보며 베들레헴의 별, 곧 저 옛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때 베들레헴의 마구간을 찾아가던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을 안내한 별을 생각했다.
다섯 개의 구멍 – 주님 수난: 한편, 백합 무늬의 가장자리로는 기름한 구멍들 다섯 개가 뚫려 있다. 네 개는 좌우 대칭을 이루고, 한 개는 그 가운데에 있다. 이 구멍들은 루뉼(lunule)이라고 하는데, 샌드달러는 루뉼을 공기와 영양소들이 녹아 있는 바닷물을 몸체 안으로 들여오고 밖으로 내보내는 통로로 이용한다. 루뉼은 영양소들이나 퇴적물을 걸러내는 체와 같은 역할도 한다. 루뉼이 이런 역할들을 하기에 샌드달러는 해저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멍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을 연상했다. 말하자면 구멍 네 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분의 손과 발에 생긴 거룩한 상처들을 나타내고, 나머지 한 개는 로마 병사의 창에 찔려 생긴 옆구리(성심)의 상처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포인세티아 – 주님 성탄: 샌드달러의 몸체를 뒤집어서 아랫면을 보면, 거기에는 주님의 성탄을 상징하는 꽃인 포인세티아의 윤곽이 보인다.
비둘기 다섯 마리 – 기쁜 소식을 전할 사명: 샌드달러의 마른 잔해를 흔들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듯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샌드달러의 몸체가 마르고 석회화하면서 그 안에 있던 다른 장기들은 없어지는데 먹이를 섭취하는 기능을 하던 일종의 턱뼈 조직들은 고스란히 남는다. 그래서 마른 샌드달러의 몸체를 부서뜨리면 그 안에 남아 있던 턱뼈 잔해 다섯 개가 나타난다. 이것들은 마치 하얀 나비 또는 하얀 비둘기처럼 보이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것들이 성자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시면서 가져오신 기쁜 소식을, 곧 하느님의 선의와 평화를 전달하기 위해 그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둘기들이라고 보았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 비둘기들을 세상 곳곳으로 날려 보내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32.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516항)
하느님을 올바로 알고 올바른 믿음 전해야
“참신앙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 스스로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믿고 있는가? ‘무엇을, 얼마나, 왜, 어떻게 믿고 있는가’라고 성찰하며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시라고 말하고 있는가’ 물어야 합니다.”(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당신 최고의 선물」)
잘못된 믿음
마태오복음에 놀라운 여인이 한 명 있으니 바로 티로와 시돈 지방의 한 이방인 여인입니다. 그는 가나안 여자(마태 15,21) 혹은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마르 7,26)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예수님께서 그의 놀라운 믿음을 칭찬하십니다.(마태 15,28) 이처럼 성경은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도 묘사하지만 동시에 신앙을 고백하는 놀라운 모습도 전해줍니다.
누구나 믿음을 갖고 삽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있고 내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도 있으며, 이러한 여러 믿음 덕분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믿음 역시 대상과 방법, 목적에 대해 성찰하고 식별해야 합니다. 잘못된 믿음이지만 열심한 믿음이 있고, 잘못된 믿음을 강요하는 상황도 있기 때문입니다.
식별해야 할 믿음들
어떤 신자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A라는 학생이 다니던 학원에서 성당 캠프 때문에 학원을 빠진다고 했더니 B라는 학생이 “고작 성당 캠프 때문에 학원을 결석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고 했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마도 B라는 학생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아닌 좋은 성적, 명문 대학, 좋은 직장이 삶을 구원할 것이라는 투철한 믿음을 갖고 성실히 공부하는 학생이었을 겁니다.
또 이런 이야기들도 흔하게 있지요. “성당 다니면 쌀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돈을 많이 벌어야 행복하다고 믿는 이들의 언사이며 그들에게는 돈이 하느님입니다. 이들은 분명 열심한 믿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러나 현세적 물질만을 추구하는 것을 올바른 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는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우리 사회의 단면이기도 합니다.
올바른 믿음을 위한 노력
물질적인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지만 세상은 점점 더 물질적 풍요가 중요하다고 얘기합니다. 물질의 달콤함에서 헤어나오기 힘들고 그래서 영적인 것, 사랑과 봉사, 애써서 하느님 말씀과 교리와 신앙을 찾는 노력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사회교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우리가 하느님을 올바로 알고 올바른 믿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회 문제의 여러 해결 방법과 그 주체인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가르침과 복음이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추린 사회교리」는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새로운 세계관이 생겨나며, 개인과 민족을 불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린다.”(516항)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른 믿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관건은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정확히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런 믿음들이 사회와 세상에 복음적 가치관을 싹트게 합니다.
“신앙은 삶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남겨 주신 평화로 채워 준다. 오로지 이러한 믿음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증진하고… 모든 신자의 공통된 평화 추구는 민족들 간의 일치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원천이다.(「간추린 사회교리」 516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