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라도 집착 없는 멋진 나그네로 살아야
우리는 고향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까?
집처럼 편안한 고향에 잘 계십니까?
아니면 나그네입니까?
우리는 사실 본래 부처인데 중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본래 고향에서 멀리 떠나와 나그네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당신은 나그네가 아니고 불성을 지닌 부처요,
주인이라고 해도 나는 나그네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합니다.
나그네!
그런데 기왕 나그네가 되려면
멋있는 나그네가 되어보면 어떨까 합니다.
집착이 없는 나그네는 멋진 나그네입니다.
어른 스님들께서 이르시길 대중생활은
나그네처럼 해야 한다고 이르셨습니다.
100년을 살아도 나그네처럼 살고,
하룻밤을 살아도 주인처럼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냥 믿을 수는 없습니다.
믿으려면 알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야 믿음이 더 철저해집니다.
철두철미하게 알게 되면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전에 보면 비유의 설법이 많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최상승의 법을 알게 하고 믿게 할까’고민하시고,
각자의 근기에 따라 적절한 비유를 통해 깨닫게 하십니다.
『법화경』「신해품」에 보면 궁자(窮子)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간 아들이 거지로 떠돌다가
우연히 아버지 집에 오게 됩니다.
집 나간 아들을 노심초사 기다리던
장자는 아들을 금방 알아봤지만
아들은 아버지인 줄 몰랐습니다.
장자와 함께 살자고 하니 놀라서 도망을 갑니다.
사람을 급히 보내어 데려 오게 하여
거지 형색을 한 아들에게 거친 일부터 시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아들처럼
남루한 옷을 입고 접근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집안일을 하게 하고,
집안에 들어오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아들에게
마침내는 보물창고의 일을 담당하게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자신은 고용인이요,
나그네라는 생각을 합니다.
죽음에 임박한 장자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놓고
“저 아이는 나의 아들이며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상속한다.”고 선언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부처님께서
우리들에게 “네가 바로 부처다.”라고 말씀해도 바로 믿지 않기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이끄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장자인 아버지는 궁자인 아들과
비슷한 옷차림과 내용으로 근기를 낮추어,
요즈음 표현으로 말하면 눈높이 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처음부터 부처님의 경지를 바로 말씀하시면
바로 알아듣지 못하니,
‘회삼승(會三乘) 귀일승(歸一乘)’,
즉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을 말씀하시면서
이 모두가 일불승(一佛乘)임을 가르치십니다.
『화엄경』「여래출현품」에
“모든 중생은 모두 여래와 같은 성품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출현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중생이 없다면 부처님이 계실 이유가 없습니다.
중생이 있기에 부처님이 있습니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님도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괜한 분별과 집착으로 중생심을 일으킵니다.
그다지 바쁠 일도 없는데 바쁘고,
좋아할 일도 아닌데 좋아하고,
근심할 일도 아닌데 미리 걱정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며 집착하고,
늘 자신을 떠돌이 나그네일 뿐이라는 생각을 놓지 못합니다.
“생사가 둘이 아니고,
내가 부처”라고 이해하면서도
나는 중생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부처라고 믿고 한 걸음 내딛으면
그 걸음이 바로 부처의 걸음입니다.
관심이 없었어도 장자의 재산이 저절로 궁자에게로 왔듯이,
불성 씨앗은 본래 나에게 있는 것이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모든 중생은 다 부처님의 성품을 본래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과일에 열매가 갈무리되어 있는 것처럼
여성이든 남성이든,
미물이든 사람이든 태어나기 이전부터
부처의 씨앗이 갈무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셔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