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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사(思無邪)
사악함이 없는 생각이라는 뜻으로, 마음이 올바르고 조금도 그릇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思 : 생각 사(心/5)
無 : 없을 무(灬/8)
邪 : 사악할 사(阝/4)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으로, 공자가 시 305편을 산정(刪定)한 후 한 말이다. 사(思)는 '생각'을 말하고, 무사(無邪)는 '사악함이 없음'을 뜻한다. 즉, 사악함이 없는 생각을 의미하는 말로, 마음이 올바르고, 조금도 그릇됨이 없음을 뜻한다.
시경에 있는 삼백편의 시는 한 마디로 말해 사악함이 없다. 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읽은 시 300편을 한마디로 집약한다면, 사악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고 하셨다.
시란 과거나 현재나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감정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공자께서 시경에 나와 있는 시 300편을 모두 읽어보니, 그 내용들은 조금도 이해타산을 따지는 내용도 없고, 속된 내용도 없으며, 오직 인간이 올바로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군더더기가 없음, 사뜻함(사악함이 없는 동심의 마음)이라 한 것 같다.
생각에 '사(邪)'가 끼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다. 원래 사무사(思無邪)는 시경의 정신인 사실, 감정의 순화를 상징하는데 그러한 뜻에서 공자는 3백편의 시경을 한마디로 간추려 사무사(思無邪)라 하였다. 사무사(思無邪)는 공자 사상의 인(仁)에 버금가는 한축을 이루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서 순수하지 않은 사악한 마음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한다면 건설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여러 사람이 같이 호흡을 맞춰야하는 모임등에서는 사무사(思無邪) 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항상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부모님을 생각한다는 것도 여자친구를 생각하는 것도 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사무사(思無邪)라는 말도 사랑에는 삿됨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누군가를 생각하고 사랑함에 있어서 그 사람을 이용한다거나 음흉한 생각을 품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 생각은 삿됨이 없어라. 이것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함에 가져야할 마음가짐이다.
사무사(思無邪)는 시를 논하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회자되는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다.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 수록되어 있는 공자의 전후 말씀은 이러하다. "시삼백편(詩三百篇)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詩三百 一言而蔽之 曰思無邪)"로 기록되고 있다. 시삼백은 곧 시경을 이름이고, 시경속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정확히는 305편)은 다 거짓됨이 없이 바르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리라.
잘 알려져 있듯이 시경(詩經)은 공자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은대(殷代)로부터 공자가 살았던 춘추(春秋)에 이르기까지 전해오는 수천 수의 민요들 가운데서 공자가 선별하여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대략 멀리는 BC 10세기로부터 가까이는 BC 5세기까지의 작품들이 수록된 셈이다.
수백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수천 수의 민요들을 놓고 도대체 공자는 어떤 기준으로 작품들을 선별했을까? 사무사(思無邪)는 바로 그 선별의 기준을 이르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천 수의 노래들 가운데는 본능적인 욕정을 노래하는 수준미달의 음탕한 것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 남을 미워하고 비방하는 투기어린 노래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공자는 그러한 노래들은 다 제쳐놓고 건실하고 고상한 사무사(思無邪)의 노래들만 골라 잡았을 것이다. 공리적(公利的)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던 공자로서는 그럴 만도 한 일이다.
아니 어쩌면 그 당시 세상에 횡행하는 노래들이 너무 난잡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두다가는 백성들의 정서가 크게 문란해질 것을 염려하여 공자는 이를 순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바람직한 노래들만 선별하여 엮어낸 것이 시경(詩經)이리라. 그렇다면 시경의 편찬은 속된 노래들의 숙청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서양의 플라톤(Platon,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과는 달리 공자는 시의 공리성(功利性)을 믿고 있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시의 효용에 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양화편(陽貨篇)의 흥관군원(興觀群怨)의 설이다.
小子何莫學夫詩.
그대들은 왜 시를 배우려 하지 않는가.
詩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시는 감흥을 자아내게 하고, 사물을 관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여럿이 함께 어울릴 수 있게도 하고, 또한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풀게도 한다.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는 일이며, 또한 금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도 한다.
흥(興)은 감성적인 정서, 관(觀)은 이지적인 관찰력, 군(群)은 사회성 곧 시나 시회를 통한 교유성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원(怨)을 어떤 이들은 치자(治者)의 실정에 대한 원망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국한된 의미로 한정하기 보다는 마음속에 맺힌 불만스러움을 시로 푸는 비판 의식(儀式)쯤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그리고 뒤에 덧붙인 말들은 충효의 도덕성과 사물에 대한 지식을 익힐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말하자면 공자는 시를 인품을 교화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공자의 이러한 시관은 비록 수천 년 전의 생각이지만 오늘의 효용론적 입장의 문학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달 많은 문예지(文藝誌)들과 동인지(同人誌)들을 통해 수천 편의 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시단의 인구가 수천 명에 이르고 있으니 그들이 매월 한 편씩만 만들어 내도 그만한 작품이 생산되기에 충분하다. 좋은 작품들이 많이 생산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문제의 심각성은 적지 않다.
오늘의 자유시(自由詩)라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런 규제도 없다. 극단적인 표현을 쓴다면 비문(非文)도 시로 행세하는 곤란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시의 무정부상태라고나 할까.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시라는 이름으로 쓴 글은 다 시라고 불러줘야만 되는 실정이다. 그러니 시처럼 쓰기 쉬운 글이 없게 되었다. 가장 정련된 문학의 양식으로 신성시되던 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 시단(詩壇)의 꼴이 말이 아니다.
그래서 작품을 분별코자 하는 생각에서 그런 것인가. 해마다 화사집(花蛇集)들을 묶어 내는 풍조가 일고 있다. 문학단체들이 그들의 구성원 중심으로 엮어 내기도 하고, 잡지사나 출판사가 올해의 시(詩) 혹은 몇 년도의 대표작이라는 이름을 매달아 작품집을 편찬해 내기도 한다.
그런데 요즈음 편집자들이 작품을 선정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별하는지 자못 궁금하다. 작품을 보는 안목은 극히 주관적이어서 객관적인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지 모른다. 그러나 주관적인 기준이라 할지라도 공자(孔子)의 사무사(思無邪)처럼 설득력을 지닐 수만 있다면 세상의 호응을 얻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시(詩)는 절제의 문학이다. 자유시(自由詩)는 양식의 방임(放任)이 아니라 매 작품마다 그 작품의 내용에 가장 적합한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는 규제의 문학으로 보아야 한다. 정형시보다 자유시가 더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편 작품의 내용을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효용론자의 편에 선다. 작품의 언술(言述)이 윤리적인 가치를 지니든, 미적인 가치를 지니든 간에 독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즐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독자의 심성(心性)을 정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어지럽히는 작품이 있다면 이는 존재 의의(意義)를 상실한 공해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오늘에 공자(孔子)가 다시 있어 어지러운 이 시단(詩壇)을 한탄하면서 새로운 시경(詩經)을 엮는다면 어떤 기준으로 작품들을 선별할 것인가. 역시 사무사(思無邪), 사무사(事無私)라고 호통을 칠 것만 같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선 늘 정의가 승리한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나무 토막에 새겨진 글씨처럼 머릿 속에 판각(板刻)되어 있을 뿐, 가슴 속엔 늘 사무사(思無邪)가 꽉 차 있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의롭고 선한 사람들은 늘 핍박과 소외속에서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불의한 세력들은 온갖 기득권을 독점한 채 늘 물질적 풍요와 쾌(快)를 누리며 떵떵 거리는 세상이다. 정의가 무참히 짓밟히는 이 사회에서 정의라는 단어는 교과서에 자주 도배되는, 생명력없이 죽어 가고 있는 추상화된 활자(活字)에 불과할 뿐, 시대정신과 동떨어진 썩은 동아줄을 부여잡고 기득권을 사수하려는 사람들에겐 한낱 개터럭만큼도 못한 개념일 따름인 현실이 그저 씁씁할 뿐이다.
사무사(思無邪)
이 말은 보통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고 풀이하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되 "시(詩) 삼백편은 한마디로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 시경은 현재 305편이 전하고 있다. 사무사는 시경(詩經) 노송(魯頌)에 나오는 말로 "삿된 생각이 하나도 없으니, 말은 그저 힘차게 앞으로 치달리네(思無邪, 思馬斯徂)"의 한 구절이다. 공자는 이 구절을 시경의 요지라고 한 것이다.
공자는 인간의 순수한 감정이 담긴 시를 읽음으로써 바른 본성을 찾게 하고 생각에 사특한 마음이 없게 하는 효용을 가진다는 점에서 '시경'을 '사무사'라는 말로 요약하고 강조하였다고 풀이했었다.
사(邪)는 '간사하다, 어긋나다, 기울다, 치우치다'는 뜻으로 바르지 않는 것이다. 어긋나거나 기울거나 치우치는 것은 중도가 아니고 중도가 아닌 것은 정도가 아님이다. 그런데 '삿된 생각이 하나도 없으니, 말은 그저 힘차게 앞으로 치달리네'라고 풀이하였을 때 앞뒤 구절의 맥이 통하지 않는다. 삿된 생각이 없는 것과 말이 힘차게 앞으로 달리는 것과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그런데 시경 노송에 네 개의 단락으로 된 시는 '사무강 사마사장(思無疆 思馬斯臧), 사무기 사마사재(思無期 思馬斯才), 사무역 사마사작(思無斁 思馬斯作), 사무사 사마사조(思無邪 思馬斯徂)'이다. '건강한 말이 끝이 없기를 바라며, 훌륭한 재능을 가진 말이 끝이 없기를 바라며, 마차를 몰수 있는 말이 끝이 없기를 바라며, 말을 키우는데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라고 하여 그 말들이 멀리 달릴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서 사(思)는 생각이 아니라 어조사로 쓰이거나 '바라다'로 '원하다'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사무사(思無邪)의 한 단어로만 보았을 때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고 풀이할 수 있지만 시경 전체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사무사(思無邪)는 끝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시경의 전체적인 맥락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말로 풀이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경 노송에 나오는 사무사의 의미를 단장취의(斷章取義) 하여 풀이하는 것은 의도적인 곡해가 될 수 있다.
사무사(思無邪)
사무사(思無邪)란 말은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음'이라는 뜻입니다. 공자(孔子)가 시(詩) 305편을 산정(刪定)한 후 한 말씀이지요. 무릇 시인이란 마음에 삿(邪)됨이 없어야 합니다. 즉, 공자가 말씀하신 사무사(思無邪)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공자는 시 305편을 산정하신 후, 하신 말씀으로 사(思)는 '생각'을 말하고, 무사(無邪)는 '사악함이 없음'을 뜻한다 했습니다. 즉, 사악함이 없는 생각을 의미하는 말로, 마음이 올바르고 조금도 그릇됨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지요.
시삼백 일언이폐지왈 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니라. 그러니까 시경(詩經)에 있는 '삼백 편의 시는 한 마디로 말해 사악함이 없다'는 말이다. 시란 과거나 현재나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감정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공자께서 시경에 나와 있는 시 300편을 모두 읽어보니, 그 내용들은 조금도 이해타산을 따지는 내용도 없고, 속된 내용도 없으며, 오직 인간이 올바로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군더더기가 없고, 사특함이 없는 동심(童心)의 마음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에 '사(邪)'가 끼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원래 사무사(思無邪)는 시경의 정신인 사실과 감정의 순화(純化)를 상징합니다. 그러한 뜻에서 공자는 3백편의 시경을 한마디로 간추려 사무사(思無邪)라 하신 것이지요. 사무사(思無邪)는 공자사상의 인(仁)에 버금가는 한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서 순수하지 않은 사악한 마음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한다면 건설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사(思無邪)라는 말은 사랑에는 삿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생각하고 사랑함에 있어서 그 사람을 이용한다거나 음흉(陰凶)한 생각을 품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지요. 그 생각에 삿됨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함에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아닌지요?
한시대의 풍운아(風雲兒)였던 고(故) 운정(雲庭) 김종필(金鐘必) 전 국무총리의 묘비명(墓碑銘) 요즘 회자되고 있습니다. 아마 근래 대선에 출마하고자 하는 많은 정치인들의 마음이 사무사(思無邪)에 미치지 못해 국민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뜻에서인 것 같습니다. 그는 영광스러운 국립묘지를 마다하고 영세반려 아내 곁에 묻히고 싶다는 문구에서 정치 거목이기 전에 한 남편으로서의 애틋한 면모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생전에 인터뷰에서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는데도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가 눈을 감자 묘비명 전문이 공개되었는데 내용은 물론 해박한 한문 실력이 놀라웠습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생전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써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부인 박영옥 여사 별세 직후 직접 작성했다고 합니다.
그는 한 점 허물없는 생각(思無邪)을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으며, 나라 다스림 그 마음의 뿌리를 '무항산이면 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 즉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고 적었습니다. 또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제대로 이룬 것 없음에 절로 한숨 짓는다"라며 "숱한 질문에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던 사람, 한평생 반려자인 고마운 아내와 이곳에 누웠노라"고 마무리 했습니다.
다음은 김 전 총리가 작성했던 묘비명의 전문입니다.
思無邪를 人生의 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無恒産而無恒心을 治國의 根本으로 삼아 國利民福과 國泰民安을 具現하기 위하여 獻身盡力 하였거늘, 晩年에 이르러 年九十而知 八十九非라고 嘆하며 數多한 물음에는 笑而不答하던 者-內助의 德을 베풀어준 永世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이를 한글로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점 삿됨이 없는 생각을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으며, 나라 다스림 그 마음의 뿌리를 ‘무항산이며 무항심’에 박고 몸 바쳤거늘,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제대로 이룬 것 없음에 절로 한숨 짓는데, 숱한 질문에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던 사람, 한 평생 반려자인 고마운 아내와 이곳에 누웠노라."
결국 그가 마음 편히 누울 곳은 아내 곁이었습니다. 92세 장수에 명예와 권력을 모두 누렸으니, 그의 생은 누구 부럽지 않은 삶이었을 것입니다. 자만할 만도 했겠지만 90에 이르고 보니, 89세까지도 잘못 살았다는 고백입니다. 죽음 앞에서 삶을 바라보니 명예나 부도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옛날 조상들 중에도 묘비명을 미리 지어둔 이들이 많았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무덤 옆 묘비에는 묘지 주인의 인적사항 정도를 알려주는 것에 머물러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화장 후, 가까운 선산(先山)에 그냥 뿌리라고 유언을 해두었으니 그마저 표지석도 세울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운정(雲庭)의 삶처럼 사무사(思無邪)의 정신만은 '마음속의 묘비명'으로 삼고 가면 저도 참 좋을 것 같네요!
사무사(思無邪)
사무사(思無邪), 흔히 '생각에 그릇됨이 없다' 정도로 번역된다. 그러나 문맥을 감안하면 이 번역은 수정되어야 한다. 이 말은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데 위정편은 주제가 다움[德]이다. 다움은 말과 행동에서 드러난다. 이런 문맥에서 사무사(思無邪)란 '말과 행동에 그릇됨이 없으려면 생각에서부터 그릇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의 사무사(思無邪)를 좀 더 상세하게 풀어낸 것이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사무(四毋)이다. 이는 공자 자신이 하지 않았던 네 가지를 말한다. "스승님께서는 네 가지를 끊어버리셨다. 억측을 하지 않으셨고 반드시, 결코, 절대 등을 말하지 않으셨으며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지 않으셨고 사사로운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셨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사무사(思無邪)이다.
그 중 첫번째가 억측을 하지 않는 것이다. 공자는 어떤 말을 하면 반드시 근거를 제시했다. 요즘 야당의 의원들이 보여주고 있는 아니면 말고식 폭로가 바로 전형적인 억측이다. 공자는 직접 보거나 들은 것이 아닐 때는 반드시 '아마도[其]'라는 말을 사용했다. 유감스럽게도 기필(期必)이라는 부정적 행태 또한 그들이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기필(期必)이란 자기 말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태도를 뜻한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도 자기만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일까? '아마도[其]' 공적 담론보다는 사사로운 자기 이익, 즉 다음 총선 공천에 눈이 멀어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실 이런 비판 또한 아깝다.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고 사사로운 자기를 내세우기에 급급한 사람이 경청(傾聽)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사무사(思無邪)와는 정반대되는 인간 유형을 생생하게 보여주어 교육 목적상 기록해둘 뿐이다.
▶️ 思(생각 사, 수염이 많을 새)는 ❶회의문자로 田(전; 뇌)와 心(심; 마음)의 합자(合字)이다. 思(사)는 '생각하다'의 뜻이다. 옛날 사람은 머리나 가슴으로 사물을 생각한다고 여겼다. ❷회의문자로 思자는 '생각'이나 '심정', '정서'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思자는 田(밭 전)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소전에서는 囟(정수리 신)자가 들어간 恖(생각할 사)자가 '생각'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囟자는 사람의 '정수리'를 그린 것이다. 옛사람들은 사람의 정수리에는 기가 통하는 숨구멍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囟자는 그러한 모습으로 그려졌었다. 그러니 恖자는 머리(囟)와 마음(心)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깊게 생각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서에서부터는 囟자가 田자로 바뀌면서 본래의 의미를 유추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思(사, 새)는 성(姓)의 하나로 ①생각, 심정(心情), 정서(情緖) ②의사(意思), 의지(意志), 사상(思想) ③뜻 ④마음 ⑤시호(諡號) ⑥성(姓)의 하나 ⑦어조사(語助辭) ⑧생각하다, 사색하다 ⑨그리워하다 ⑩슬퍼하다, 시름 겨워하다 그리고 ⓐ수염이 많다(새) ⓑ수염이 많은 모양(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생각할 륜(侖)이다. 용례로는 돌이키어 생각함을 사고(思顧), 생각하고 궁리함을 사고(思考), 사유를 통하여 생겨나는 생각을 사상(思想), 정을 들이고 애틋하게 생각하며 그리워함을 사모(思慕), 마음으로 생각함을 사유(思惟), 여러 가지 일에 관한 깊은 생각과 근심을 사려(思慮), 생각하여 헤아림을 사료(思料), 생각하여 그리워함을 사련(思戀), 늘 생각하여 잊지 아니하고 마음속에 간직함을 사복(思服), 생각하고 바람을 사망(思望),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어 깊이 생각함을 사색(思索), 서로 엉킨 많은 생각이나 생각의 실마리를 사서(思緖), 정의의 길을 그려 생각함을 사의(思義), 한 시대의 사상의 일반적인 경향을 사조(思潮), 마음 먹은 생각을 의사(意思), 생각하는 바를 소사(所思),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함을 묵사(默思), 고통스러운 생각을 고사(苦思), 깊이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을 심사(深思), 묘한 생각을 묘사(妙思), 객지에서 갖는 생각을 객사(客思), 지나간 뒤에 그 사람을 사모함을 거사(去思), 곰곰이 잘 생각함을 숙사(熟思), 생각이나 느낌이 많음을 다사(多思), 저녁 때의 슬픈 생각을 모사(暮思), 생각이 바르므로 사악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사무사(思無邪), 어떠한 문제를 생각하여 해석이나 구명하는 방식을 일컫는 말을 사고방식(思考方式), 사모해 잊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사모불망(思慕不忘),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생각과 사물을 제 분수대로 각각 나누어서 가름을 일컫는 말을 사려분별(思慮分別), 처지를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을 이르는 말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평안할 때에도 위험과 곤란이 닥칠 것을 생각하며 잊지말고 미리 대비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거안사위(居安思危), 편안한 때일수록 위험이 닥칠 때를 생각하여 미리 대비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안거위사(安居危思),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말을 견리사의(見利思義),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도 없다는 뜻으로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묘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사의(不可思議),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생각을 너무 깊게 함 또는 애쓰면서 속을 태움을 일컫는 말을 노심초사(勞心焦思), 깊이 생각하고 깊이 고찰함 또는 신중을 기하여 곰곰이 생각함을 이르는 말을 심사숙고(深思熟考), 능히 보고도 생각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보통의 이치로는 추측할 수 없는 일을 이르는 말을 능견난사(能見難思), 타향의 생활이 즐거워 고향 생각을 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 또는 눈앞의 즐거움에 겨워 근본을 잊게 될 때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낙이사촉(樂而思蜀), 몹시 뒤섞이고 착잡하여 어수선하게 생각함 또는 그 생각을 일컫는 말을 호사난상(胡思亂想), 즐거움에 젖어 촉 땅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쾌락 또는 향락에 빠져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낙불사촉(樂不思蜀),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리지 못할 생각이나 평범하지 않는 생각을 일컫는 말을 비이소사(匪夷所思), 낮에 생각하고 밤에 헤아린다는 뜻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깊이 생각함을 이르는 말을 주사야탁(晝思夜度), 물을 마실 때 수원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근본을 잊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음수사원(飮水思源), 일을 하면 좋은 생각을 지니고 안일한 생활을 하면 방탕해 진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노사일음(勞思逸淫) 등에 쓰인다.
▶️ 말과 행동에 그릇됨이 없으려면 생각에서부터 그릇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하는 일 없이 바쁘기만 함을 무사분주(無事奔走), 한울님은 간섭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슨 일에나 함부로 다 참여함을 무사불참(無事不參), 즐거움과 편안함에 머물러서 더 뜻 있는 일을 망각한다는 무사안일(無事安逸), 아무 탈없이 편안함을 무사태평(無事泰平), 재미나 취미나 없고 메마르다는 무미건조(無味乾燥) 등에 쓰인다.
▶️ 邪(간사할 사, 그런가 야, 나머지 여, 느릿할 서)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우부방(阝=邑; 마을)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牙(아,사)로 이루어졌다. ❷형성문자로 邪자는 '간사하다'나 '사악하다', '바르지 못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邪자는 牙(어금니 아)자와 邑(고을 읍)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邪자는 '간사하다'고 할 때는 '사'라고 하고 '그런가'라고 할 때는 '야'로 발음한다. 邪자는 본래 고대 중국의 낭야군(琅邪郡)을 지칭하던 지명이었다. 낭야군은 진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존속했던 중국의 옛 행정구역으로 현재는 산둥성(山東省) 임기(臨沂)에 있는 곳이다. 글자에 이빨을 드러낸 모습이 부정적이었는지 邪자는 후에 '바르지 못하다'나 '사악하다'로 뜻으로 가차(假借)되었고 낭야군(琅邪郡)은 낭야군(琅琊郡)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邪(사, 야, 여, 서)는 (1)요사(妖邪) 스러우며 나쁜 기운(氣運). 사기 (2)올바르지 않은 일 (3)사람의 몸에서 병(病)을 일으키게 하는 여러 가지 요인(要因) 따위를 통틀어 일컬음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간사(奸邪)하다(마음이 바르지 않다) ②사악(邪惡)하다 ③기울다, 비스듬하다 ④바르지 아니하다 ⑤사사(私私)롭다 ⑥사기(邪氣) ⑦품행(品行)이 부정(不正)한 사람 ⑧사사(私私)로운 마음, 그리고 ⓐ그런가(야) ⓑ어여차(야) ⓒ어조사(語助辭)(야) ⓓ땅의 이름(야) 그리고 ㉠나머지(여) 그리고 ㊀느릿하다(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간사할 간(奸),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충성 충(忠), 바를 정(正)이 있다. 용례로는 바르지 못한 도리를 사도(邪道), 경솔한 언행이나 점잖지 못한 태도를 사풍(邪風), 도리에 어긋나고 악독함을 사악(邪惡), 도덕적으로 그릇되고 옳지 못한 길을 사로(邪路), 사특한 생각을 사념(邪念), 그릇됨과 올바름 또는 간사함과 올바름을 사정(邪正), 옳지 못한 행실이나 간악한 행위를 사행(邪行), 바르지 않고 사악한 마음을 사심(邪心), 간사스럽고 바르지 못한 욕망을 사욕(邪慾), 부정하고 요사스러운 종교를 사교(邪敎), 올바르지 못하고 여사스러운 의견을 사견(邪見), 요망스럽고 간악한 기운을 사기(邪氣), 그릇되고 간특한 말 또는 올바르지 아니한 논설을 사설(邪說), 곧지 아니한 길 또는 부정한 마음 또는 행위를 사경(邪徑), 마음이 요사스럽고 음탕함을 사음(邪淫), 도리에 어긋나는 의논을 사론(邪論), 요사스럽고 바르지 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사인(邪人), 올바르지 못하며 간교한 수단을 사술(邪術), 마음이 간교하여 행실이 바르지 못함을 간사(姦邪), 사사스러운 마음이 없음을 무사(無邪), 모질고도 간사함 또는 그런 사람을 흉사(凶邪), 간사하고 마음이 바르지 못함 또는 그런 사람을 영사(侫邪), 요망하고 간사스러움을 요사(妖邪), 바른 일과 간사한 일을 정사(正邪), 사악한 마음이 못 일어나게 막음을 한사(閑邪), 요사스럽고 올바르지 못함을 회사(回邪), 좋지 못한 여러 가지 그릇된 생각을 이르는 말을 사사망념(私思妄念), 그릇되고 온당하지 못한 여러 가지 정욕을 이르는 말을 사욕편정(邪慾偏情), 바르지 못한 것은 바른 것을 감히 범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말을 사불범정(邪不犯正), 그릇된 것을 버리고 옳은 길로 돌아섬을 이르는 말을 사사귀정(捨邪歸正), 악한 것을 성토하고 사특한 것을 제거한다는 말을 토악거사(討惡去邪)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