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258/1001]사랑채 툇마루와 풍경風磬소리
오늘은 10월 1일(음력 8월 15일). 추석, 즉 ‘더도 덜도 말라’는 한가위, 가배嘉俳날이다. 어느새 조석朝夕으로 날이 많이 차다. 선선함을 넘어 썰렁썰렁, 반팔·반바지가 무색하다. ‘코로나’라는 악령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空氣를 지배하고 있는 판국에, 나같은 기저환자(고혈압·당뇨병)들은 특히 감기를 조심해야 할 때이다. 하기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추워지는 것은 당연지사.
어제는 몇 달 동안 우리집 숙원사업인 사랑채에 툇마루를 놓았다. 본채 사랑채와 대비가 되어 무척 어울린다. 언젠가 한옥집 툇마루 예찬론(http://www.cnews.co.kr/에서 ‘최영록’을 검색해 보시라)을 펼친 적 있지만, 사랑채에 툇마루가 없었기에 화룡점정畵龍點睛에서 ‘점點 하나’가 빠진 듯했다. 돈은 제법 들어갔지만, 숙변宿便을 해결한 듯 기분이 한결 좋았다. 남향이니만큼 오일스텐 칠이 마르기만 하면 그 위에서 앉아도 보고, 늘어지게 낮잠도 자볼 심산이다. 친구들을 불러 잡담과 19路 수담手談(바둑)도 나눌 것이다.
툇마루는 한옥집의 키포인트라 할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이 얼마나 슬기로웠으면, 유제(이웃) 사람들과 이렇게 멋진 '소통의 공간'을 만들어놓았을까? 할머니들이 노상(늘) 걸레로 닦아냈기에 마루바닥은 반질반질했다. 우리가 어릴 적 불렀던 ‘마룽’이 바로 이 ‘마루’이다. 마룽 아래에는 댓돌이 놓여 있는 ‘뚤방’ 또는 ‘뚜릉’(토방의 사투리)이 있었다. 대청마루가 있으면 사랑방마루도 있어야 하는 법.
나는 왜 마룽, 뚤방, 뚜릉, 실겅(선반), 거섭(채소반찬), 유제, 거솔(거짓말), 더그매(닭장), 정제(부엌), 덕석(짚방석), 실삼스럽다(수선스럽다), 섬닷하다(어설프다) 등 탯말(어머니 자궁에서부터 듣고 자라던 말)을 좋아하는 걸까? 너무 퇴영退嬰적이거나 과거에 집착하는 유형의 인간일까? 사투리 또는 방언謗言과 표준어의 거리는 멀어도 한참 멀다. 표준어는 이상하게 정情이 안갈뿐 아니라 뉘앙스 차이가 상당하다. 서울에서 40년 넘게 살면서도 고칠 생각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어느 후배는 전라도출신 티가 조금도 나지 않게 표준말을 능숙하게 구사한다. 그 친구의 사는 방법이지만, 좀 거시기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충청도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는 막내 여동생은 나보다 더 해 이뼈 죽겠다. 설마 아이들 앞에서는 전북의 탯말을 쏟아내지는 않겠지.
70대 후반에만 해도 서울에서 전라도사투리를 징허게 써부리는 대학생들은 하숙집 구하기가 어려웠다. 경상도 친구들은 차별을 받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그것이 서울생활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나는 “우리 아부지는 농사꾼인지…” 어쩌고 하며 소개를 하는데, 한 친구가 다가왔다. “야, 너 전라도놈이구나. 나하고 친구하자”그 친구도 아마 왕따까지는 아니어도 외로웠던 모양이다. 언젠가 말한 ‘내 친구 공부박사’가 바로 그다.
아무튼, 50여년만에 복원된 우리집 ‘사랑방 문화文化’에 마루가 더해짐으로써 더욱 빛을 발할 게 틀림없다. 나는 요즘 거의 사랑채에서 잠을 잔다. 왜냐하면 처마 밑에 풍경風磬을 하나 달아놓았는데, 바람이 불면 그 소리가 듣기에 너무 좋기 때문이다. 딸랑딸랑이나 뎅그렁 뎅그렁 소리는 아닌데, 그리고 듣기에 참 좋은데 우리말로 딱히 표기하기가 마땅치 않다. 절 대웅전이나 요사채 처마 밑의 ‘풍경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으리라. 바람에 흔들려 소리가 나는 풍경은 절의 전각처마 끝에 달린 조그만 종이다. 가운데에 추를 달고 밑에 물고기 모양의 쇳조각을 매단 쇠종, 북한에서는 ‘바람종’이라 한다 한다. 물고기를 단 뜻이 깊다. 항상 눈을 뜨고 사는 물고기처럼 수행자의 끈을 놓지 말라는 것인데, 산사에서 풍경소리를 들어가며 맑고 투명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스님처럼 살아갈 수는 없지만, 날마다 침잠의 시간을 누려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풍경이야말로 바쁜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렁이는 온갖 잡념과 상념을 가라앉혀주는 소리로, 우리가 언제나 그리워해도 좋을 소리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서너 달 전쯤에 인사동에서 2만5천원을 주고 사와 매단 것도 그런 뜻에서였다. 아버지도 “바람이 부니 꼭 절간같구나”하며 좋아하셨다. 하기야 시골마을은 어디든 ‘절간’에 다름아니다. 하루종일 고샅(골목)에 돌아다니는 것은 도둑고양이들뿐이다. 인적人跡이 드문 시골의 하루는 고적하기가 말로는 못하지만, 나는 이것 역시 즐기는 편이기에 괜찮다. 풍경소리에 잠을 여러 번 깨지만, 그 소리가 또 자장가처럼 들려 금세 잠이 든다. 한번 오셔서 잠을 자보시라. 흐흐. 그때마다 가수 안치환이 노래로도 만들어부른 시인 정호승의 ‘풍경 달다’라는 시구절을 떠올라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잔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밑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가는 줄 알아라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고 짧지만, 의미하는 바는 참으로 깊다. 한번씩 읊어보시라. 알 듯, 모를 듯한 여운餘韻이 얼마나 많이 남는가? 나는 이런 시를 좋아한다. 시인 고은의 ‘그 꽃’은 또 어떤가?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본 /그 꽃>. 아등바등, 헐레벌떡, 천방지축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다. 심호흡을 하고, 하늘 한번 바라보며 가을을 음미하며 살아야 할 일이다. 새우망을 걷다가 하늘을 바라볼 일이다. 산 위에서 땅도 한번 굽어볼 일이다. 하필이면 우리말 시의 ‘달인’인 미당 서정주는 친일파로, 고은은 ‘미투’의 주역이 되었지만, 시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여운 있는 시를 많이 써주었다. 서정주의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라는 시도 이 참에 다시 한번 읊어본다. 나는 왜 이런 시를 보면 눈물이 나는 걸까?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첫댓글 코로나 땜시 아들 손주는 미리 추석을 보내고 갔지만 허전하네 그래도 코로나 때문에 오지않은 자식들도 많다는데 손주들 셋을 데리고 다녀가준 아들네가 고맙다.
두둑히 챙겨준 용돈은 더 고맙고 ㅎ
서울을 떠난게 아니라 태어난 고향을 찾아 맘껏 즐기며 살아가는 친구가 멋있게 보이지만
때론 쓸쓸하겠다 라는 생각도 든다. 할아버지 대접을 받을 나이에 큰할아버지를 모시며 자신의 생활을 접으며 살아가는 효자 친구가 고맙고 착하게만 보인다
난 막내라 아버님이 살아계시면 100살이 훌쩍넘었지만 그래도 우리 나이에 부모님 한분이라도 살아계시면 행복이라는데
그래도 풍경소리 들으며 엄마 생각하고있을 친구여 추석 잘 보내시게
문득
먼산 바라보며 추억에 젖어보네.
무심하게 흘려들었던 풍경소리 들리는 듯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