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신청
보릿길 (박정애)
여권 사용기한이 언젠지도 모르게 만료일이 지나갔다. 나의 여권을 들려다 본 남편은 만료된 여권을 갱신하라고 성화다. 언제 여행을 다녀왔는지도 감감하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노년이 주는 건강악화로 해외여행이란 단어가 마음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서 기한이 만료되었다.
해외여행이란 생소한 단어가 나에게 다가온 것은 퇴직 후 모임에서 의견이 나왔다.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거의가 30년이 넘는 직장생활을 하고 나온 친구들이라 우리도 해외여행 한번 가보자는 의견이 일치되어 연금의 일부분을 과감하게 투자하여 부부여행을 가기로 했다. 특별한 사람들의 호사인 줄만 알았던 해외여행이 평범한 나에게도 퇴직으로 인해 찾아온 계기였다. 50 중반 처음 여권을 손에 쥐던 날 여권은 대한민국이 아닌 꿈의 세계로 날아갈 날개를 단 듯 가기도 전에 맘이 부풀어져있다.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라 여유롭게 돈을 장만해 비싸기만 한 물품들을 세일한다는 면세점에서 친구들과 겁 없이 샀더니 여행경비가 만만찮게 들었다. 첫 경험을 후회하면서 그 후부터는 여행의 취지를 살려 소소한 기념품 몇 점만 사고 여행만 즐기고 왔다. 남편이 은행에서 환전하는 금액을 보고는 은행직원이 짠돌이 여행을 하는 사람인 줄 금방 알아보더라고 했다.
우리나라가 언제 이렇게 잘 살게 되어 소시민인 나도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가? 감격에 벅찼다. 처음 나갔던 곳은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인 미국과 이웃하고 있는 캐나다가 첫 여행지다. 처음 가보는 낯선 땅이라 오랫동안 하루하루 보낸 일정들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후 몇 차례 여행을 다니면서 책에서 배웠던 나라마다 특색적인 자연경관과 역사의 인물들이 이루어놓은 유적지를 일정에 맞춰 바쁘게 돌아다녔다. 영욕의 세월들이 남겨놓은 유적들을 견학하면서 당시 상황을 가이드로부터 설명을 듣고 요점을 메모하고 있으면 역사의 중심에 내가 살고 있는 날들로 착각도 했다. 간혹 내가 다녀왔던 곳을 tv에 비추어주며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고 보니 그때가 그리워진다.
무엇이든지 아끼고만 살았던 내가 모임을 통해 여행을 한 것이 어느 정도 무리는 있었지만 역시 다녀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날 친구들과 함께 세계적인 문화유산들을 둘러보고 동서양의 역사 공부를 책에서 익히던 것을 눈으로 보고 역사의 인물들이 걸었던 그 길을 친구들과 함께 걸으면서 단테도 되어보고 릴케도 되어본다. 세계사 속에 주인공들과 함께 세상을 공유했던 기분, 동서양 대국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화려한 궁전과 쌓아놓은 치적들, 그 속에서 백성들이 겪었던 피나는 고생과 원성은 동서양 인종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지만 지도자의 통치력은 비슷했다. 고생한 조상들 덕분에 후손들은 유적지가 되어 관광객이 몰려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나도 관광객 대열에 끼어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 내가 볼 수 있을 줄이야 꿈만 같았던 지난 세월, 감탄했던 날들의 흔적인 사진 속에 나는 활짝 웃고 있다.
남편은 곧잘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tv프로를 즐겨 시청한다. 가보지 못한 곳은 영상으로 감상하며 즐기고 가본 곳이 나오면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더라도 같이 보자고 다급하게 부른다. 지난 세월을 그리워하면서 행복해 한다. 국내 여행 당일치기도 다녀오면 피로하다는 나를 걱정하면서 가보지 않았던 가까운 동남아에라도 며칠 다녀오잔다. 남편이 내민 나의 여권이 낯설어진다. 나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는 맘 때문인지 여권갱신을 아직은 하지 않고 있다.
2023년 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