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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을 협박하지말라 원문보기 글쓴이: 순동이
막걸리 한잔 먹고 박정희 욕하면 경찰서에 끌려가서 국가보안법으로 처리된다고 해서 막걸리 보안법이란 말이 생겨났던 시대...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주장과 행위는 최고 사형에 처한다는 유신헌법 긴급조치가 발령되어 국민은 입과 눈과 귀를 닫고 살아야했던 암흑의 시대에서.. 인혁당의 희생자들은 유신독재 강화를 위하여 그렇게 희생되어 묻혀갔습니다. 32년이 지난 지금... 인혁당사건의 희생자들은 모두 무죄로 재심판결을 받았지요. 그 사건을 조작한 주범 총책이 박정희임은 말할 것도 없고... 주역을 보통 3인방을 말한니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중앙정보부국장 이용택. 그리고 유신헌법의 법적 수호자 대법원장 민복기가 3인입니다. 이밖에도 황산덕 법무장관, 김치열 검찰총장, 서종철 국방장관 등 60명의 다른 대법관과 판사, 검사, 중정 수사관 등이 사건에 직접 관여했지요. 이들 중 박정희에 대해서는 다 아실 것이고 신직수, 이용택, 민복기 이 3인에 대해서만 조사해보았습니다. ♨ 신직수는 누구냐? 1927년 태어난 신직수는 2001년 사망했습니다. 그는 1963.12-1971.06 제11대 검찰총장, 1971.06-1973.12 제22대 법무부 장관, 1973.12-1976.12 제7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인물이니다. 사망 전에는... 모 법률법인의 대표 변호사를 지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신직수의 장녀 신연균이 바로 중앙일보 홍석현회장의 아내라는 점입니다. 중앙일보에서 인혁당 재심판결에 대한 기사에 소홀한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슬쩍 듭니다.
1963년 12월7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차장 신직수를 검찰총장에 임명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서른여섯. 한마디로 벼락출세를 한 것인데 이 비결은 박정희가 5사단장 시절, 그가 사단 법무참모를 지낸 인연 때문이지요. 신직수는 무려 7년 반을 검찰총장 자리를 차지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장수 총장이 되었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1964년 8월의 제1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한일회담 반대시위인 6·3 사태로 인해 계엄령이 선포된 지 얼마 뒤 중앙정보부는 북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변란하려는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습니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의 각본을 다 짜서 서울지검으로 송치했는데,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 이하 검사들이 아무런 증거도 혐의도 찾을 수 없다며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고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에 법무장관 민복기는 “상명하복의 검찰기강을 세우기 위해 공소장에 서명을 거부한 검사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구요. 그러자 공안부장 이용훈 등 3명의 검사가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몹시 분개했고, 중정 차장으로서 그를 모셨던 신직수가 총장으로 있던 검찰은 이용훈의 사표를 수리했지요. 이 사건을 거치면서 검찰은 박정희 체제에 충실한 시녀로 전락하게 되었고... 신직수는 이후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사법살인으로 악명을 떨친 2차 인혁당 사건을 처리하게 되는... 자리에 서게 되어지요. 참... 신직수의 사위 홍석현의 아버지 홍진기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리고 갑니다. 홍진기는 일제 때 판사를 지낸 인물로 이승만 정권이 전격 발탁하여 4.19 혁명 당시에는 내무부장관을 그 이전에는 법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이승만에게 계엄령을 전격 건의한 인물입니다. 홍진기의 마산발언이라는 것이 있는데... 마산에서 시위 중 발포사건이 일어낫지요. 여론이 나빠지자 홍진기는 “마산 사건의 배후에는 공산당이 있다”는 발언을 했지요. 어째 전두환이 광주항쟁 당시 발언과 똑같지 않습니까? 홍진기가 9대 법무부 장관 재직할 당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경향신문이 폐간되기도 했구요. 그런 인물이 언론자유를 부르짖으면서... 중앙일보를 창간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런데 1970년에는 국민훈장모란장을 1986년에는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받았네요.. 쩝쩝... ♨ 그 다음... 이용택은 누구냐?
대구농림고와 단국대(법학과)를 졸업한 뒤 3공화국 중앙정보부 공안수사 책임자로 명성을 떨친 그는 81년 고향 경북 달성에서 11대 국회의원(민정당), 85년 12대 국회의원(민정당), 97년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특보 등을 역임하며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DJ 사찰'은 물론 재야인사들과 정치인들의 탄압에 앞장섰던 인물을 국민의회에서 받아들이다니... 이들 중정. 안기부 인사들의 이례적인 전향은... DJ의 당선가능성이 높아지자 배를 재빠르게 갈아탄 것이었지만... 들어온다고 다 받아주지 말아야 원칙이 서는데 말이지.. 이건 김 전 대통령이 크게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
정치활동 외에도 그는 ▲87년 자유민주총연맹 부위원장 ▲94년 자유민주민족회의 사무총장 ▲98~2000년 경북관광개발공사장 등을 역임 ▲ 현재 농서장학회 회장 ▲ 자유민주수호국민운동총연합 집행본부장, ▲ 파라우공화국 명예대사를 맡고 있지요. 많이도 맡고 있네요. 이용택 당시 중앙정보부 6국장은 모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고 박정희 대통령도 인혁당 사건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어서 한창 수사가 진행 중일 때에는 신직수 부장과 내가 1주일에 두 번꼴로 청와대에 들어가 직접 보고를 드렸다"고 밝힌 적도 있지요. 이용택은 얼마 전에 호주에 있던 일제 하 징용한인들의 포로수용소를 취재한 적이 있지요. 궁금하시면 아래 기사를 들어가 보세요. 정부도 국민도 ‘심각한 과거사 망각증’을 갖고 있다고 하네요. 남의 눈의 띠끌은 보이고... 제눈의 들보는 보이지 않나 봅니다. 너무 뻔뻔하네요.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67354 ♨ 그 당시 대법원장.. 민복기.. 많이들 아실 겁니다.
민복기가 주역 3인방으로 거론되는데는 군법정에서 날조된 공판조서를 근거로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지어 버린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에게 사형 확정판결을 내린 대법원 판사는 13명입니다. 모두 팔순을 넘겼지요. 이 가운데 6명이 생존해 있으나 변호사로 현역 활동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사건을 재판한 대법원 판사 가운데 이영섭(사망)·이일규(87)씨는 이후 대법원장을 지냈으며, 주재황(89)씨는 헌법위원회 위원장까지 지냈지요. 이밖에 당시 대법원 판사였던 홍순엽·김영세·양병호·김윤행·민문기·이병호씨는 사망했습니다. 임항준(86)·안병수(87)·한환진(91)·이병호(81)씨도 대법원 판사로 이 사건 재판에 관여했지요. 민복기의 부친은 민병석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척족으로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그런 인물의 아들답게 그 역시 일제 강점기인 1937년에 경성제국대학 법과 졸업 후 40년 경성지방법원 판사, 45년 경성복심법원 판사 등 승진을 거듭하며 친일의 대를 이었지요.
박정희 집권 시절에는 1968년 10월부터 78년 12월까지 무려 10여 년 동안 5, 6대 대법원장을 연임하며 박정희 철권통치를 방조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의 대법원장 재임기간을 후대 법조인들은 사법부의 '암흑기'로 기억하고 있지요.
1973년 대법원장 신년사에서는 "나라의 통일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구조가 가장 집중적,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신헌법의 본질인 이상 사법권의 존재양식 또한 이에 발맞춰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다."라며 알아서 기어버렸지요.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자에게는 최고 사형까지 언도할 수 있었던 긴급조치... 대법원은 박 정권이 권력안보의 최후수단으로 사용한 이런 긴급조치에 대해서까지 '무효로 볼만한 근거가 없다'며 합헌 결정을 내리고 독재정권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
이로 인해 수많은 긴급조치 위반자들에 대한 대대적 처벌이 이어졌음은 물론이구요. 1977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피고인 1백16명 가운데 91명에 대해 1년 이상의 징역이 선고됐고 78년에는 1백89명 가운데 1백53명이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대법원장 이임 후에는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고, ▲80~84년 국토통일원 고문, ▲80~88년 국정자문위원, ▲86년 헌정제도연구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지난 2000년에는 '자랑스런 서울법대인'으로 꼽히기도 했지요. 아 물론 국민훈장도 받은 것도 당근이지요. 무궁화장으로 받았네요 .
~~~~~~~~~~~~~~~~~~~~~~~~~~~~~~ 인혁당 조작에 관여한 60여 명중 지금까지 누구도 반성을 하거나 사죄를 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의문사위의 판결이 나온 후 인혁당 사건을 총지휘한 이용택씨는 ‘고문에 의한 조작이 아니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말도 안 된다”며 의문사위가 내린 판정조차 거부했지요. 어제 재심에서 인혁당 희생자들이 무죄임을 판결했습니다. 이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요? 사죄의 말 한마디라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조작진상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야... 곧 북망산천으로 떠날 이들 가해자들이.... 죽어서 희생자의 영혼을 만나게 되면 용서라도 빌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이글은 각 종 기사자료를 모아 쓴 글임을 밝힙니다. |
첫댓글 역시 친일파의 후손들, 그리고 권력에 아부굴종하여 이리저리 역사를 비틀어간 불한당 같은 세력들이 얽히고 섥혀서 만든 합작품이군요. 이런 세력이 오늘도 조선일보 중앙일보 그리고 재벌과 권력 언저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밉니다. 이제는 민중들의 힘으로 역사를 바로세울 때가 왔습니다.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뽑혔다는 민복기..... 서울대 법대출신들 자랑스럽기도 하겠수다 !
꼴값은. 세계 백위안에도 못드는 주제에...
박근혜가 대권 출마한다는 그 자체가 우리나라에 불랙코매디죠,ㅎㅎㅎㅎㅎ
박근혜가 대권에 출마한다는 그 자체가 불법이지요...ㅎㅎㅎ
주범은 근혜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