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で38年間歌手活動 キム・ヨンジャさん「衣装はいつも韓服…私を守る鎧です」
今年は大韓民国樹立75周年。韓国は戦争の廃虚から立ち上がり、世界史においても類を見ない成長を遂げた。その激しい時代の流れを内包する現代史の「宝物」を発掘する。平凡に見えるものにも、個人の思い出と現代史のワンシーンが宿っている。潘基文(パン・ギムン)元国連事務総長、金亨錫(キム・ヒョンソク)延世大学名誉教授、舞台俳優のソン・スクさん、映画俳優・実業家の申栄均(シン・ヨンギュン)さん、漫画家のイ・ヒョンセさん、詩人のシン・ダルジャさん、キム・ジャンファン牧師に続き、歌手キム・ヨンジャさんの「宝物」について聞いた。
白いチマチョゴリの上に赤い花が咲いている。グリーンのレコードジャケットに書かれたデビュー曲のタイトルは『女の一生』。1968年に歌手イ・ミジャさんがリリースした曲の歌詞を日本語にし、1977年に日本で発売した。
「成功したい」と言って外国に一人で渡った娘に、母親は「21歳で『玉のこし』に乗る(幸せな結婚をする)だろう」というある僧侶の言葉を伝え、遠方にいる娘を応援した。威勢良く国を出たものの、寂しくてつらかった。そんな時、歌手キム・ヨンジャさん(64)は母親の言葉を思い出して、大きな花が描かれた韓服(チマチョゴリ)に癒しを感じた。韓服は母親の懐のようだった。圧倒的な声量を調節するための「ブルートゥース唱法」(マイクを口からできるだけ遠く離す歌い方)から華やかな衣装まで、さまざまな姿が思い浮かぶが、それを上回るステージを生み出すキム・ヨンジャさん。1974年にデビューし、今年で歌手人生50年を迎える彼女は、自身の宝物として「韓服」を挙げ、語り始めた。
■日本での活動は38年。ステージ衣装はいつも韓服
日本での活動が最初から成功したわけではない。1977年にトリオ・レコード社のオーディションに合格して日本でデビューした。だが、3年間の活動契約期間が終わって待っていたのは解雇通知。「日本の文化にうまく適応できていなかったようです」。白い韓服姿のレコードは在庫として残り、ジャケットは黄ばんでいた。
デビューから7年以上も無名だった。キム・ヨンジャさんは「韓服の大きな花柄のようにいつかは満開の花が咲くだろう」と自らに言い聞かせた。韓国に戻り、1981年に出したトロット(韓国演歌)メドレー『歌の花束』で人気を集めた。翌年レコーディングした『本当ですか』は最初のヒット曲となった。1984年の『水銀灯』まで相次いでヒットし、KBSの「今年の歌手賞」とMBCの「10大歌手歌謡祭 歌手賞」を受賞した。
そこで、デビューで失敗した日本に再び進出しようと決心し、1988年のソウルオリンピック賛歌『朝の国から』の日本語バージョンをリリースした。ソウルオリンピックの閉会式で歌ったため、日本でもよく知られていた。日本を初めて訪れた時のように韓服をまた着た。「韓服は優雅です。韓国人として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守ってくれる、精神的な鎧(よろい)でもあります」
今度は「大ヒット」だった。1989年には日本歌謡界最大の祭りであり、代表的な年末歌謡祭であるNHK紅白歌合戦に初めて出場した。当然、韓服を着て出た。演歌にも挑戦し、『暗夜行路』『熱い河』などの演歌が1位になった。韓服は日本の観客には称賛され、同胞には慰めと癒しを与えた。
■北朝鮮で公演…金正日総書記「韓服は南朝鮮の方がきれいだ」
「韓服は南朝鮮(韓国)の方がきれいじゃないですか?」。2001年4月、北朝鮮の招待で平壌公演をしたキム・ヨンジャさんに、北朝鮮の金正日(キム・ジョンイル)総書記が話しかけてきた。韓国人歌手としては初めて北朝鮮で単独公演を行ったキム・ヨンジャさんは、金正総書記に会う場へ行く際、韓服を着て行った。北朝鮮の平壌高麗ホテルで手に入れた絹の生地を使い、北朝鮮のデザイナーが仕立ててくれた韓服だった。生地は自分で選んだ。日本での公演では韓国の生地を使って作った韓服を着たが、北朝鮮では配慮して北朝鮮の生地で韓服を作った。「自分たちの所の物なら、いっそう喜んでくれるだろうと思ったんですが、(北朝鮮の人々は)正直に話してくれました。『実は生地が昔の織り方なので、厚いし重いし楽ではなかったんですよ』と」
キム・ヨンジャさんは金正日総書記が一番好きな歌手だそうだ。平壌公演では『七甲山』『旌善アリラン』や、北朝鮮の歌『口笛』『イムジン河』などを歌った。『私たちの願いは統一』も北朝鮮の観客と一緒に歌った。それ以前も訪朝芸術団はあったが、単独で公演した歌手はキム・ヨンジャさんが初めてだった。キム・ヨンジャさんの声量に金正日総書記は驚いたという。翌年も再び単独公演を行った。再度、金正日総書記から招待があったからだ。
キム・ヨンジャさんは韓国の歌手だが、北朝鮮では日本の歌手として、日本では北朝鮮の歌手として紹介されたこともあった。日本では、韓国生まれで北朝鮮に渡った朴世永(パク・セヨン)作詞の『イムジン河』をキム・ヨンジャさんが歌ったため、「北朝鮮の歌手だ」と非難された。「『NHKの番組なのに、なぜ北朝鮮の歌手が出ているのか』と抗議が殺到しました」。歌を歌っただけで日本と北朝鮮の間の政治的な問題に巻き込まれるとは想像もしていなかった。キム・ヨンジャさんはその時も今もこう言う。「私は韓国人のキム・ヨンジャです。これまでも、今も、これからも私は同じです」
朝鮮日報/朝鮮日報日本語版
일본 38년간 가수활동 김연자 의상은 항상 한복. 나를 지키는 갑옷입니다.
올해는 대한민국 수립 75주년.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 세계사에서도 유례없는 성장을 했다.그 치열한 시대 흐름을 내포하는 현대사의 보물을 발굴한다.평범해 보이는 것에도 개인의 추억과 현대사의 한 장면이 담겨 있다.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무대배우 손숙씨, 영화배우·기업인 신영균씨, 만화가 이현세씨, 시인 신달자·김장환 목사에 이어 가수 김연자씨의 '보물'에 대해 들었다.
흰 한복 위에 붉은 꽃이 피어 있다.그린 레코드 재킷에 적힌 데뷔곡 제목은 여자의 일생.1968년 가수 이미자 씨가 발매한 곡의 가사를 일본어로 만들었고 1977년 일본에서 발매했다.
성공하고 싶다며 외국으로 혼자 떠난 딸에게 어머니는 21세에 옥수레를 탈 것이라는 한 스님의 말을 전하며 먼 곳에 있는 딸을 응원했다.위세 좋게 나라를 나섰지만 외롭고 힘들었다.그럴 때 가수 김연자(64) 씨는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큰 꽃이 그려진 한복(한복)에 위안을 느꼈다.한복은 어머니의 품과 같았다.압도적인 성량을 조절하기 위한 블루투스 창법(마이크를 입에서 최대한 멀리 떼는 창법)부터 화려한 의상까지 다양한 모습이 떠오르지만 그 이상의 무대를 만들어내는 김연자 씨.1974년 데뷔해 올해로 가수 인생 50주년을 맞는 그는 자신의 보물로 한복을 꼽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의 활동은 38년.무대 의상은 항상 한복
일본에서의 활동이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다.1977년 트리오 레코드사 오디션에 합격해 일본에서 데뷔했다.하지만 3년간의 활동 계약 기간이 끝나고 기다리던 것은 해고 통보.일본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것 같아요. 흰색 한복 차림의 레코드는 재고로 남았고 재킷은 누렇게 변했다.
데뷔 7년 넘게 무명이었다.김연자 씨는 한복의 큰 꽃무늬처럼 언젠가는 만개한 꽃이 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한국으로 돌아와 1981년 내놓은 트로트 메들리 노래꽃다발로 인기를 끌었다.이듬해 녹음한 '진짜요'는 첫 히트곡이 됐다.1984년 수은등까지 연이어 히트를 치면서 KBS 올해의 가수상과 MBC 10대 가수가요제 가수상을 수상했다.
그래서 데뷔에서 실패한 일본에 다시 진출하기로 결심하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찬가 아침의 나라에서의 일본어 버전을 발매했다.서울올림픽 폐회식에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일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한복을 다시 입었다.한복은 우아합니다.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정신적 갑옷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대박이었다.1989년에는 일본 가요계 최대의 축제이자 대표적인 연말 가요제인 NHK 홍백가합전에 처음 출전하였다.당연히 한복 입고 나왔어.엔카에도 도전해 암야행로 뜨거운 강 등 엔카가 1위를 차지했다.한복은 일본 관객들에게는 칭찬을 받고 동포들에게는 위로와 힐링을 선사했다.
■북한서 공연…김정일 "한복은 남조선이 더 예쁘다"
한복은 남조선이 더 예쁘지 않나요? 2001년 4월 북한 초청으로 평양 공연을 한 김연자 씨에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말을 걸어왔다.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북한에서 단독 공연을 한 김연자 씨는 김정일을 만나는 자리에 갈 때 한복을 입고 갔다.북한 평양 고려호텔에서 구한 비단 원단을 사용해 북한 디자이너가 만들어 준 한복이었다.원단은 내가 골랐어.일본 공연에서는 한국 원단을 사용해 만든 한복을 입었지만 북한에서는 배려해 북한 원단으로 한복을 만들었다.자기네 물건이라면 한결 좋아할 줄 알았는데 (북한 사람들은) 솔직하게 얘기해줬어요.사실 원단이 옛날 짜는 방식이라 두껍고 무겁고 편하지 않았어요라고.
김연자 씨는 김정일 위원장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라고 한다.평양 공연에서는 칠갑산 정선아리랑과 북한 노래 휘파람 임진강 등을 불렀다.우리의 소원은 통일도 북한 관객과 함께 불렀다.그 이전에도 방북 예술단은 있었지만 단독으로 공연한 가수는 김연자 씨가 처음이었다.김연자의 성량에 김정일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이듬해에도 다시 단독 공연을 했다.또다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연자 씨는 한국 가수지만 북한에서는 일본 가수로, 일본에서는 북한 가수로 소개되기도 했다.일본에서는 한국 태생으로 월북한 박세영 작사의 임진강을 김연자 씨가 불러 북한 가수라는 비난을 받았다.NHK 프로그램인데 왜 북한 가수가 나오느냐고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노래만 불렀다고 일본과 북한 사이의 정치적 문제에 휘말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김연자 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말한다.저는 한국인 김연자입니다.지금까지도, 지금도, 앞으로도 저는 똑같습니다.
조선일보/조선일보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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