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시래기
-유종인
초겨울 바람벽에 심자가의 예수보다 자주 시래기가 걸린다 아랫도
리를 칼에 베여 내주고 시퍼런 윗몸만 담벼락에 거니 반그늘에 내걸
린 그 쓸쓸한 유명세가 좋다
욕망이 마르는 게 좋다 몸이 말라 다른 생각이 끼쳐 그는 그 넉넉한
품이 좋다 호주머니가 비는 게 좋다 호주머니에 든 내 손의 가난한 궁
리가 좋다
설핏한 저녁 햇살에 낡은 벽에 드리운 허깨비 같은 그림자의 흔들림
이 좋다 무얼 썼다고 시인입네 하는 나보다 한마디 말도 없이 푹 삶아
지는 네 적멸이 좋다
시는 무어라 잘 안 돼도 시래기는 거울로 마른다 싸락눈 치는 새벽에
혼자 깨어서 벽에다 몸을 비비며 뭐라 적바람하듯 끄적일 때 아침이
물으면, 바스라지는 입마저 꾹 다물고 마르는 네가 좋다
-2024.09.28 문학특강 자료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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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시래기』는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시인이 바람벽에 걸려 말라가는 시래기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몸통이 사라지고 시퍼렇던 욕망마저 비워내다가 바스라지는 입조차 꾹 다물고 있는 작멸이
좋다고 하니 시인의 유명세도 별 게 아니란 생각도 들게 합니다만
여기저기로 특강을 다닐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그럴 듯 합니까?
지방에서 고작 문학단체 연간지에 서너편 시를 발표하며 지내는 시인으로서는 부러울 따름이지요
시인이 강연 도중에 던진 "시를 왜 씁니까?"하는 질문에 청중은 특별한 대답을 못했습니다만
저마다 생각하는 창작 목표나 신념이 있겠지요
내 머리 속에서 '만상에 대한 개인적 혼잣말로 위로를 받기 위해'라는 대답이 맴돌았네요
이제 곧 올해 연간집 원고를 내야하는 동료 문인들이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