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 해 보기나 했는가? 지레 ‘안 된다’ 하지 말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 : 공자가 정주영에게
伐柯伐柯 其則不遠(벌가벌가 기칙불원)
- 도끼자루를 베고 또 벰이여 그 방법이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중용>)
[한자 풀이] 伐 칠 벌, 柯 도끼자루 가, 其 그 기, 則 법 칙, 不 아니 불, 遠 멀 원
학력(學歷)은 학력(學力)을 이길 수 없다.
날로 달로 공부하지 않는다면 학교 졸업장은 한낱 종잇장과 쓰레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쓰레기에서 쓸 얘기 즉, 쓸 수 있는 이야기, 새로운 가치 창출을 찾을 줄 알아야 성공한다.
학력(學歷)에만 선을 긋는다면 더 이상 내 인생의 채움은 오지 않는다. 학력(學歷)이 지식을 키우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라면 학력(學力)은 지혜를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음은 18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 1731~1800)의 말이다.
“지식과 지혜는 하나가 되기에는 멀고, 가끔은 아무런 관련이 없기도 하다.
지식은 타인의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에 머물지만, 지혜는 자신의 생각에 귀 기울이는 마음속에 있다.”
지혜와 실행은 학교 졸업장과 무관하다
지식은 나만 있지 않다. 남들도 갖고 있다. 하지만 지혜는 다르다. 나 외에 남이 가질 수 없어서다.
다음은 <리틀 빅 씽>에 나오는 한 내용이다.
참고로 <리틀 빅 씽>은 세계적인 ‘경영의 구루(guru·뛰어난 스승)’ 톰 피터스가 쓴 책의 제목이다.
"호텔업계에서 힐튼호텔의 창업자 콘래드 힐튼만큼 성공한 사람은 없다 (중략)
그는 환경을 탓하기보다 가치 창출에 노력하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고철 덩어리는 가치는 없지만 이것으로 말발굽을 만들면 10달러를 벌 수 있다.
그리고 명품시계의 부품을 만들면 250만달러를 벌 수 있다.
그는 은행 경비원에 지원했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이유로 취직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환경을 탓하지 않고 환경을 바꾸어서 성공을 일구어냈다.
그는 “내가 만일 글을 읽을 줄 알았다면 지금도 경비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톰 피터스 지음, 최은수·황미리 옮김, <사소함이 만드는 위대한 성공 법칙, 리틀 빅 씽>, 더난출판사 펴냄)
힐튼은 쓰레기(고철 덩어리)에서 쓸 얘기(말발굽, 명품 시계의 부품)를 찾을 줄 아는 지혜로운 인물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는 다행히 글을 읽을 수 있는 학력(學歷)이 없었기에 은행 경비원에 취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덕분에 그는 세계적인 힐튼호텔의 창업자로 새 길을 모색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임자, 한 번 해 봤어?”
학력(學歷)이 짧았던 현대그룹 창업자 고(故) 정주영 회장이 즐겨 썼던 말로 유명하다. 정주영 회장의 주변에는 주로 학력(學歷)이 긴 인물들이 조직의 임원진으로 참여했고 참모가 되어 활동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여의도의 33배나 달하는 서산간척지 방조제 사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이다. 현대에 빨간 불, 즉 비상이 걸렸다. 위기가 닥쳤다.
방조제를 쌓아 바닷물을 가두고 그 물을 빼서 육지를 만드는 간척지 사업의 핵심 기술인 물막이 공사가 최종난관에 부닥친 것이다. 그것은 6.4㎞의 A지구 방조제 공사였는데, 공사의 마지막 남은 270m의 해결 방법이 속수무책이 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조수 간만의 차 9m, 4.5톤이 넘는 자동차만한 바위도 순식간에 휩쓸려가는 초속 8m의 급류가 휘도는 위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정주영 회장을 중심으로 비상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임직원들은 앞 다투어 정주영 회장에게 보고했다. 일테면 이런 식이었다.
“학계에도 문의해 보았고 해외 건설사에도 컨설팅을 의뢰해 보았지만 모두 속수무책입니다.”
“……”
당시 정 회장은 굳게 침묵하고 있었다. 또 다른 보고가 들려왔다.
“최신장비들을 다 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이 공사는 불가능하다는 식의 볼멘 이야기들만 해댔다. 이때였다. 조용히 경청하던 정 회장이 침묵을 깼다. 그러면서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큰 배를 가라 앉히는 것은 어떨까.”
당시 울산에 정박해 있던 23만 톤급 폐유조선 워터베이호를 염두해 두고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를 반대하는 의견이 쏟아졌다.
“회장님, 그게 가능한지 아직 검증된 바가 없습니다.”
“임자 해봤어? 학교에서 배운 이론대로만 따라하면 세상공사를 다 할 수 있겠나? 즉시 유조선을 가라앉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2013년 11월 11일. SBSCNBC 방송, ‘경제 포토에세이 멘토의 유산-정주영’)
1984년 2월 24일의 기록이다. 이렇게 해서 정 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길이 322m의 대형 유조선으로 서서히 그리고 정확하게 못다 이은 방조제 최대 난관 코스의 틈을 막아내는 것에 성공한다. 이른바 ‘정주영 공법’이라고 하는데, 정주영 공법 때문에 세계가 놀랐다.
원래 공사의 계획공기는 45개월이었다. 하지만 현대는 9개월 만에 완공을 마쳤다. 정주영의 지혜를 빌린 덕분에 가능했다. 그렇게 해서 총 공사비 280억원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전 세계의 언론은 찬사를 보냈다. 뉴스위크와 뉴욕타임스에도 자세히 소개가 됐다. 그리하여 수많은 선진국의 세계적인 기업들이 ‘정주영 공법’을 배우고자 문의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힐튼처럼 정주영도 학력(學歷)은 낮았다. 그럼에도 학력(學力)과 지혜는 누구보다도 높았다. 정주영 어록의 압권을 차지하는 “임자, 해봤어?”라는 말은 ‘실행을 중시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의 리더십이다.
탁상토론으로는 아무것도 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실행이 중요하다. 실행을 통해서 ‘되고, 안 되는 것’을 검증해도 때는 늦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물획(勿劃)’에 있다. 물획은 ‘미리 선을 긋지 말라’는 뜻이다.
공자(孔子)가 한 말이다.
공자는 제자들이 해 보지도 않고 중도에 포기하는 것을 아주 꼴 보기 싫어했다.
능력이 모자란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자. 안 된다고 반대만 하지 말자. 이야말로 해보지 않겠다고 미리 금을 긋는 행위이다. 의욕이 없는 것이다. 다르게는 기쁨을 잃은 것이다. 사실 능력이 없는 게 아니다. 더 이상 실행하려고 들지 않는 것이다. 노력하려고 들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항상 시작만이 있다. 늘 끝을 보지 못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맹자가 전국 시대에 주로 활동했다면 이에 앞서 200년 전에 공자는 이미 춘추 시대에 활동했다. 전국 시대의 최고 스타는 사공자, 즉 맹상군·신릉군·춘신군·평원군이었다. 사공자를 따르는 식객이 무려 3000명이었다. 이에 발분하여 상인 출신으로 진나라의 상국이 된 여불위도 식객을 3000명이나 모아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사공자나 여불위의 식객은 권력과 금력을 동원하여 모은 숫자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후(왕)들의 견제가 따르면 하루 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는 달랐다. 비록 ‘상갓집 개’처럼 보였고, 권력이나 금력도 공자에겐 없었지만 자발적으로 문하에 든 제자가 3000명이었다. 사공자나 여불위가 활동하기 이미 200년 전에 말이다.
공자의 3000 제자 중 핵심인물은 얼마였을까. 72명이라는 설도 있고 77명이라는 설도 있다.
77명이라는 설은 중국 전한의 역사가 사마천에 의해 소상히 밝혀진 바 있다(<중니제자열전>). 정확히는 35명의 제자만이 연령과 성명이 드러나 있고, 나머지 42명은 이름만 언급되어 있다.
그 중에 가장 뛰어난 제자를 ‘10철’이라고 한다. 즉, 10명의 수제자를 말한다. 이를 소개하자면, 안연·민자건·염백우·중궁(덕행)이 있었고, 재아·자공(언어)이 있었고, 염유와 계로(정사), 자유와 자하(문학)가 있었다.
10철 중에 공자가 천하주유를 할 적에 끝까지 스승을 따른 인물로는 안연, 자공, 염유, 계로가 단연 중심이었다. 안타깝게도 공자보다 먼저 죽은 제자가 둘 있다. 안연과 계로다. 이 두 사람은 그다지 출세하진 못했다.
하지만 나머지 인물, 자공과 염유는 달랐다. 스승 공자의 이름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정치가로 출세했다. 또 재산도 많이 모았다. 가난하지 않고 부자로 살았다.
자공과 염유는 나이가 비슷한 또래이다. 염유가 두 살 연상이었다. 이 두 사람이 공자 문하에 들기 전에도 자공은 부유했다. 하지만 염유는 그렇지 않았다. 가난했다. 이 때문에 염유는 공자에게 배워서 빨리 출세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현실은 잘 풀리지 않았다. 사방에 벽이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염유는 특히 정사에 뛰어났다. 이런 발군의 재능을 가졌지만 관직 운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할 생각이었다. 정사 과목에 라이벌이었던 계로(자로)가 적극적인 성격이라면 염유는 정반대였다.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이 성격이 학업에 걸림돌이 됐다. 이러한 제자의 심리 상태를 스승은 금방 눈치 챘다. 이 때문에 염유는 공자에게 호되게 질책을 받은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염구왈 비불열자지도 역부족야)
염구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역부족입니다.”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畵.” (자왈 역부족자 중도이폐 금녀획)
공자가 답했다. “역부족자는 중도에 이르러 그만두는 데, 지금 네가 미리 금을 긋는구나.”
(<논어> ‘옹야’편)
질책이 있은 덕분일까. 염유는 다시 마음을 잡는다. 학업에 매진한다. 그리하여 공자의 천하주유(14년)에 동행한 것이다. 안연과 계로, 자공과 함께 스승 공자를 따르는 것을 끝까지 해냈다. 이에 성공했다.
공자의 가장 뛰어난 제자 10명을 일컫는 ‘10철(哲)’ 중 한 명이었던 염유는 본명이 ‘염구’였다. 공자보다 29세 연하로, 자(字)는 자유(子有)이다. 따라서 ‘염유’라는 호칭은 성(姓) 씨에다 자를 붙인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제자 자유(子遊) 언언(言偃)과 구별하기 위해 그리 쓴 것 같다. 그런데 <논어(論語)>본문엔 왜 염구(冉求)라고 표기한 것일까. 그것은 스승(공자)과 대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스승 앞에서는 자를 쓰지 않고 이름을 쓰는 것이 예다. 어쨌든 본문 뜻은 이렇다.
이러한 스승과의 대화 시간을 가진 덕분일까, 염구는 정신을 차린다. 다시 공자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한다. 공자와 함께 천하주유를 마칠 무렵, 제자들 중에 가장 먼저 출세한다. 노나라 계강자(季康子)의 부름을 받는다. 그리하여 계강자 밑에서 재(宰, 관리책임자)로 활동한다. 게다가 큰 공을 세운다.
염구가 공을 세운 덕분에 공자는 쉽게 자신의 고향 땅, 노(魯)나라에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막상 노나라에 돌아온 공자는 염구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고 거리를 두었다.
그 이유가 있다.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염구는 자공과 달랐기 때문이다. 염구는 ‘가난한 이의 재물을 빼앗아 부자들을 돕는 식’의 비도덕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에 스승 공자는 염구에게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자공에겐 그렇지 않았다. 자공은 동시대에 활동했던 중국 최고의 부호인 월(越)나라의 범려와 후대에 활동했던 진나라 상국 여불위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 별 문제가 없었다. 이들은 정상적인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즉, ‘폐거(廢擧)’를 사용했다. 폐거란 ‘낮은 가격에 사서 높은 가격에 파는 상거래 행위’를 말한다. 이 때문에 공자는 제자 자공을 염구처럼 비난하거나 욕하지 못했다.
자공은 당대 최고의 부자였다. 그러면서도 노나라, 위(魏)나라의 재상(정치가)으로도 성공한다. 이에 반해, 염구는 노나라의 실력자가 되는 권세와 부를 누리지만 스승 공자에겐 끝내 인정을 받지 못한 제자로 남아야 했다. 공자학당에서 파문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남에게도 요구하지 말라”
(<논어>, ‘위령공’)
이 팔자(八字)는 자공이 평생 사랑했고 실행했던 글귀이다. 일찍이 자공은 스승 공자에게 물었다.
“평생 동안 실천할 말이 있습니까” 라고. 그러자 공자는 여덟 글자인 ‘己所不欲 勿施於人’로 답을 줬다.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남에게도 요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을 자공은 평생 실천하고 지키고자 했다.
염구는 계강자 밑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았다. 크게 울렸다. 이것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앞장을 섰다. 그래서 그랬는가. 염구는 계강자의 가신으로서 자리를 잡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공자의 제자로는 실패했다. 공자 사후, 공자의 문하와도 왕래가 끊어진다. 더욱이 후배들이 염구를 따르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자공은 노나라, 위나라의 재상으로 계속 출세를 하면서도 공자 사후에도 공자 문하의 후배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조선 양반가 아이들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조선의 양반가는 어떻게 공부했을까. 양반가에 아이가 태어나고 글을 알 나이가 되면 주로 <천자문>, <계몽편>, <추구>, <동몽선습> 등의 글을 배우게 했다고 한다.
남자 아이의 경우, 8세가 되면 ‘人生八歲 皆入小學(인생팔세 개입소학)’이라는 말처럼 모두 <소학>을 떼어야 했다.
연예인을 비롯한 사회 유명인들이 자녀와 함께 1박 2일로 여행을 떠나는 방송 프로그램 <아빠! 어디가?>의 방영분 가운데 충남 공주에 있다는 옛날식 서당이 나온 적 있다. <사자소학>을 공부하는 모습이 잠깐 등장했는데 아빠와 아이들 모두 훈장님의 회초리가 무서워 밤새 익히느라 곤혹스러워했다.
한문에 약하기는 아이나 그 부모나 다를 바 없었다. 당황하고 허둥대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무튼 옛날에는 TV에 나오는 아이(8세 기준)들이 서당에서 <소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5세가 되면 보통 사서삼경(四書三經)에 입문하는 코스가 정석이었다.
사서삼경은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역경(주역)>을 말한다. 이렇게 공부하라고 주희는 얘기했다. 다르게 공부하라는 수순도 있다. 일반적으로 대학→중용→맹자→논어를 마치고 난 다음에 시경→서경→역경 수순이 그것이다. 학습자의 능력이 다 같을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빠르면 10세, 늦으면 20세에 이르러서야 사서삼경을 모두 뗐다고 한다. 그런 다음에 출사(出仕)를 하기 위한 과거 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고 보면 된다.
이로 볼 때, 양반가문의 아이로 태어나서 공부하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니 뒤늦게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해본 적 있다.
공문(孔門)을 잇는 두 가지 필살기, 시를 배워라, 예를 익혀라
3000명의 제자를 키운 공자의 아들 교육은 실상 별 게 없었다. 개인지도라고 할 것이 없었다.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두 가지만 집 마당에서 아들 공리(孔鯉)에게 요구했을 뿐이다. 그 하나는 ‘시를 배우라는 것(學詩)’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예를 배우라는 것(學禮)’이었다. 시를 공부해야 남들과 대화가 가능하고(以言), 예절을 익혀야만 사회에 나아가서 왕따 당하지 않고 남 앞에 설 수 있다(以立)라고 아들에게 귀띔했을 뿐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준 팔자가 성립이 된다. ‘學詩以言 學禮以立(학시이언 학예이립)’이 그것이다.
뒤에 장가를 든 공리는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을 ‘급(伋)’으로 지었다. 급(伋) 자는 ‘움직이는 모양’을 뜻하는 낱말이다. 아버지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공리는 아들 급이 공문의 적통을 잇는 ‘사람(人=亻)’이 되길 바라는 뜻으로 아버지(공자)가 강조한 두 가지(학시, 학예)에 미치는(及) 사람으로 아들이 성장하길 희망했을 것이다. 아들의 이름을 ‘급伋’이라고 지었기 때문이다.
급의 자는 ‘자사(子思)’이다. 맹자(기원전 372~289년)보다 약 100년 전 사람이다. 전국 시대 초기에 활동했다. 아버지 공리는 50세에 죽었으나 자사는 62세로 공문의 사람으로는 비교적 장수 한 편이다.
자사는 공문의 전통에 따라 아버지에게 직접 배우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제자이자 아버지와 비슷한 또래인 증자(曾子)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자사도 성장하고 난 다음 차후에 할아버지처럼 제자를 교육했다. 이랬던 자사의 제자 중 한 사람에게 맹자가 배웠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자사가 ‘나이 62세에 송(宋)에서 곤액(困厄)을 치르면서 <중용>을 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말이다. 전공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해서다. <중용>의 작자가 ‘자사가 아닐 수 있다’는 맥락에서 의심스럽다는 얘기가 계속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중용>의 지은이로 자사를 굳게 믿고 싶다. 이러는 이유가 있다. <중용>은 대개 ‘중니가 말했다, 공자가 말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점과 본문 가운데에 특히, <시경>의 인용이 여럿(12장, 13장, 15장, 16장, 17장, 29장, 33장)이 보여서다. 이 때문에 공자 집안의 필살기라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어서다.
<중용> 13장엔 다음과 같은 여덟 글자가 등장한다. 이 여덟 글자 역시 <시경>에서 따온 거다.
伐柯伐柯 其則不遠(벌가벌가 기칙불원)(<중용>, 13장)
벌(伐)은 ‘친다’라는 뜻이다.
이어서 도끼자루를 뜻하는 ‘가(柯)’가 등장하므로 “도끼자루를 들고 벤다”라고 해석하면 된다.
기(其)는 ‘그’ 라고 풀이한다. ‘도끼자루로 나무를 베는 그것은’의 ‘그’를 의미함이다.
칙(則)은 ‘법칙’이니 ‘방법’으로 풀어도 좋다.
불(不)은 ‘아니다’로, 원(遠)은 ‘멀리’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끼자루를 들고 (나무를) 베고, 또 벰이여 그 방법이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로 해석이 된다.
도끼를 가지고 산으로 올라가 도끼자루를 구하기 위해 적당한 나무를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이 나무, 저 나무를 뒤져 봐도 알맞은 나무를 찾지 못해 아무런 생각 없이 쿵, 쿵 아무 나무나 찍는다. 힘만 든다. 땀이 연신 쏟아진다. 그런데도 답이 보이질 않는다.
도끼자루로 쓸 나무를 가까이서 찾지 못하고 멀리에서만 답을 구하고자 한다. 답은 사실 제 손안에 있는데도 말이다. 제 손안에 도끼자루를 흘겨보지 않고 자세히 보았더라면 그 모양을 보고 적당한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들면 되는 간단한 이치를 놓치고 있는 답답함을 지적하는 여덟 글자다.
답은 항상 가까이에 있다. 멀리 있지 않다. 현장에 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방법을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고 애쓴다. 힘이 빠진다. 뻘뻘 땀만 흘린다. 이런 사람이 많다.
방법을 모르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보다는 ‘잘 하는 것’이 필요하다. ‘열심히 하는 것’은 상식이고 지식에 머문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에 안주해 똑같은 곳에서 답을 얻고자 한다. 연목구어(緣木求魚)를 하는 셈이다. 상식을 파괴해야 한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 기대해야 그 답이 보인다.
현대의 서산간척지 방조제 사업에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임직원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있는 상식을 총동원해서 위기 탈출의 방법을 찾고자 했다. 학계에도 물었다. 심지어는 해외 건설사에다가 컨설팅을 의뢰해보았다. 답을 찾지 못해 모두 속수무책이었다. 기술직 임원들은 최신 장비들을 다 써보았다. 이것도 답이 아니었다. 답은 코 밑에 있었다. 다른 임직원들이 도끼자루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그룹의 회장은 당시 울산에 정박해 있던 23만톤급 폐유조선 워터베이호를 생각했다. 이게 도끼자루감이 될 바로 그 나무였다. 그렇다. 문제의 답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울산에 있었다. 멀리 외국에 있지 않았다.
공자와 정주영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만나고 싶어도 실제로는 만날 수 없는 2000년 전 사람과 2000년 후에 사람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정주영은 공자가 말한 물획(勿劃)을 배운 것일까. 또 어떻게 시경에서 말하고, 중용에서 언급하는 여덟 글자 ‘伐柯伐柯其則不遠’의 참뜻을 받아들인 걸까.
그는 다른 사람이 지식을 구할 때, 지혜를 구한 위대한 경영자다. 지혜로운 경영자는 항상 ‘자신의 생각에 귀 기울이는 마음’을 가지고 논다. 진지한 놀이(serious play)를 한다.
끝까지 도전해 보지도 않고 미리 포기하는 마음으로 금을 긋지 말자. 도끼자루를 만드는 방법은 내가 들고 있는 도끼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명심하자.
공자처럼, 정주영처럼 중도에 포기하는 법 없이, 또 멀리서 답을 찾지 말자.
<대학>,<중용>이 <예기>에 들어 있습니다.
예(禮)를 배운다는 것은 학문을 포함합니다. 그 배운 것이 들어나는 것이 문(文)입니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예의(禮儀)란 그 사람의 학문과 마음 속의 소양이 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양 의(儀)를 씁니다.
단순한 지식만이 있다해서 예의 바르다 할 수는 없는 것이 요즘입니다.
한자를 배운다고 <천자문>부터 가르키려하면 요즘 어렵습니다.
<사자소학>이 좋다 생각합니다.
<소학>을 우습게 보면 안됩니다. 사서삼경, 예기 종합판으로 보면 무리없는데 나오는 한자가 만만치 않습니다. 대개 이해력이 빠르니, 많이 듣고 익힌 <논어>부터 시작해도 좋습니다.
<맹자>는 거의가 정치적인 내용이 많아서 시간 나는대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대학>이 분량도 적고 쉬울 듯 보이나 그렇지 않습니다. <중용>은 소주역이라 합니다. 이 또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대학>을 꼼꼼히 읽어야 합니다.
<주역>은 차후 일입니다.^^
첫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