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 3.4) 말씀/ 요한복음 11: 43-44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지난 주 말씀에서 우리는 장자의 소요유를 들으면서 인생이 일하러 온 것이 아니고 조물로로부터 휴가를 받아 소풍을 왔다고 들었습니다. 소풍 온 사람이라면 마땅히 짐 진 모두 것을 내려놓고,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쉬엄쉬엄 희희낙락(喜喜樂樂) 하면서 즐겁고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풍을 즐기다 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오게 되고, 집으로 돌아가면 반기는 가족들과 함께 더욱 기쁘고 행복하게 지낼 환상적인 시간과 아름다운 세상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장자가 아니더라도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아서 짐을 내려 놓고 쉬라고 하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정말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인생이 길든 짧든 자유를 누리며 하루 하루 춤을 추 둣 행복하게 살다가 아버지 집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 것이 모두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정말 죽음과 질병과 문제 많은 세상에서 이렇게 자유한 존재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아멘!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생각이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4:18-19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 아닙니까? 인생은 생.노.병.사에 묶이고 무거운 짐에 눌려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을 인해 은혜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성령이 예수님께 임하셔서 자유케하는 역사를 시작하셨으니 죄와 죽음에서 자유한 자는 당연히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고 자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이 마리아 마르다의 동생 나사로가 죽을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사흘이 되었습니다. 마리아 마르다는 죽음이란 운명에 묶여서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의 굴을 옮겨놓으라 명하시고 큰 소리로 죽은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죽음의 깊은 잠에 갇혀있던 나사로가 그 음성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죽은 영혼을 깨우고 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음성을 들으면 살아납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이 음성을 듣는 자가 살아나리라."하였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깨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음성은 들었지만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고 멸망한 자들이 많습니다. 삼손은 드릴라의 무덤에서 잠자다가 끝내 나오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롯은 소돔의 멸망의 무덤 속에서 나오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농담으로 여기고 주저하다가 함께 멸망했습니다. 롯의 처는 결국 천사의 손에 끌려서 소돔의 무덤 속에 서 나왔지만 미련의 끈을 풀지 못하고 뒤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계시록18장을 보면 귀신의 처소 음란의 성 바벨론이 멸망당할 때 한 음성이 들립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나오라는 음성을 들었어도 나오지 못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나사로를 나오라 하였을 때, 나사로는 수족을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두 번째 음성이 들렸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우리는 이 두 번째 음성을 계속 주의해야 합니다. 주의 음성을 듣고 살아났어도 그는 아직 수의를 입고 있었고, 수족은 베로 결박되어 있었으며,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살았지만 장사 되었던 그대로 나왔습니다. 살았으나 아직 자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손과 발이 여전히 묶이어 있었습니다. 얼굴이 싸여 있기에 눈이 가려지고 아직 활동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주의 음성을 들음으로 생명을 얻고 무덤에서 살아나왔어도 여전히 묶여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의 생명을 얻었다면 이제 두 번째 음성을 듣고 나를 묶은 이전 끈과 베를 풀어놓아 다니게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어도 자유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은 여전히 세속의 줄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제도에 묶이고, 율법에 묶이고, 사명에 묶이고, 생각에 묶이고...이렇게 나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끈을 다 풀어놔야 비로소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 것도 자유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풀어놓아야할까요? 첫째 먼저 얼굴의 수건을 벗겨야 합니다. 얼굴을 가리운 수건은 생명의 도리를 볼 수 없게 가리운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4절에 보면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 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도 그 심령이 수건으로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도 없고, 진리를 직관할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들 자신의 얼굴을 가리우고 있는 수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을 굳게 만든 율법의 틀과 형식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자유이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4장6절에,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 셨느니 라"하였습니다 나사로는 평소에는 예수의 얼굴에 있는 영광의 광채를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가 무덤 속에서 부활하여 나와 수건이 벗겨질 때 예수의 얼굴에서 생명의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그리스도 영광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서 율법 형식 위선의 수건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진실해야 합니다. 아닌줄 알면서도 살아온 습관 때문에 주저하며 사는 삶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렇게 얼굴에 가면과 수건을 벗으면 시야가 밝아지고 온통 세상이 주의 얼굴로 가득찬 것을 볼 수 있는 환상의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산과 바다와 하늘가 주의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와~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에 수건을 가린채 답답하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요한복음 5장에 날 때부터 보지 못하던 운명적인 소경 거지는 예수님이 그 눈을 뜨게 해주시자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까?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춤추는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얼굴에 수건이 벗겨지고 영의 눈이 떠지면 우리의 걸음 걸음은 춤이 되고, 우리 인생은 시가 될 것입니다. 저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지만 참 답담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 믿었으니 이제는 철저치 안식일을 지켜야되는 줄 알았고, 세상은 포기하고 주님만 사랑해야 하는줄 알았고, 성경이 있으니 세상 책과 지식은 배설물로 버려야되는 줄 알았고, 결혼했으니 자식도 필요없고 정은 끊어야 되는줄 알았고, 산과 바다 둘러볼 시간이 어디있는가 하며 교회와 집만 왔다갔다 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중요하지 않으니 대충하고, 얼굴에 점이 많아도 주님 주신 원형 그대로 만족하고... 생명은 얻었지만 여전히 얼굴에 수건이 덥힌채 딱딱하고 굳은 얼굴을하고 다녔습니다. 껍데기를 잡고 자유화 행복의 본질은 놓친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삶의 운신 폭이 좁고, 사람 눈치를 보게 되고, 정죄 의식에 시달리고 주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떱니까? 얼굴에 점들도 다 뺐습니다. 성경과 더불어 인문 고전과 함께 책을 읽고, 산과 바다가 내 정원이 되고, 색소폰을 연주하고, 믿음의 지체들과 더불어 매주 두 번씩 모여 예배드리고 독서모임을 하는 삶은 누구 말대로 천국 자체입니다. 순간순간이 자유이고, 행복입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말씀과 기도는 더욱 뜨거워지고, 말씀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우주적으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캐나다에 마리아 선교사님이 답글에 저도 소감은 안 쓰지만 목사님 설교와 글과 사진과 음악을 통하여 삶에 풍성함이 더해진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 삶과 사역이 멋지고, 또 바다 정원 마음껏 누리시며 사시는 목사님은 행복자 이시며, 항상 글들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목사님은 시인 이며 예술가라고 하였습니다. 답답항였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얼굴에 수건이 벗겨진 결과입니다. 할렐루야!
둘째, 수족을 묶은 끈을 풀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죽은 나사로는 무덤에서 나왔지만 여전히 수족은 천과 끈으로 묶여 꼼짝 못하고 있었습니다. 얼굴의 수건이 벗겨졌다면 이제 수족을 묶고 있는 끈도 풀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 후에도 여전히 묶인 채 활동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자기 생각의 끈에 묶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와 사망의 줄은 끊고 무덤에서 나올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 보혈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손발을 묶여 있는 끈은 주님이 풀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풀어내야 합니다. 서로 도우면서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별거 아닌데 못 풉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까지 묶여있던 관습 때문입니다. 동남아시아에 코끼리를 기릅니다. 나무에 묶어서 기른 코끼리는 줄을 풀어놓아도 그 주변만 맴돌지 끈 반경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데 묶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줄이었지만 나중에는 생각입니다. 생각에 묶인 것입니다. 치킨 런이라는 에니메이션 영화도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닭장에 갇혀 주는 모이를 먹고 평생 알을 낳다가 나중에 알을 못 낳으면 죽게 됩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닭장에 갇혀 지내지 말고 탈출하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잡히면 통닭이 되는데 가만이 있으면 먹여주고 입혀주는데 그런 위험을 뭐하러 무릎쓰느냐고 반문합니다. “평생을 알만 낳다 나중에 털 뽑혀 먹히고 ...그렇게 살다 죽고싶어요?” "어떻게 해요. 그게 우리의 팔자인데……." "그게 문제예요. 양계장 울타리가 여러분 머릿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닭들의 대화 내용입니다. 수준 낮은 생각에 묶이면 수준 낮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생각만 바뀌면 드넓은 자연의 세계에서 벌래 잡아먹고 질좋은 알을 낳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가 있는데 생각에 갇혀 못 나가는 것입니다. 재중 집사님은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인문 고전! 이것이야 말로 가장 질적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 이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자질구레한 일들을 정리하고, 이번에는 심지어 유튜브 엡까지 차단시켰다고 합니다. 수준 높은 생각을 하고자 함입니다. 결국 이런 생각이 쇼펜하우워, 장자에 이르기까지 수준 높은 삶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곁에 두고 읽는 장자에 보면 우물안 개구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하여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공간의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관한 얘기를 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선비에게 도에 관하여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물가를 벗어나 큰 바다를 보고서야 당신의 추함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이제서야 위대한 도리를 얘기하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재중 집사님 여러 위대한 사상가 철학자들의 글을 읽고 보니 이제 무슨 이야기하는가 이해가 된다는 겁니다. 수준이 낮으면 이해가 안 됩니다. 수준이 올라가고 성장하면 들리고 보이는 것입니다. 우물 안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축하 할 일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갇혀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특히 생각에 갇히고 묶여서 그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편협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편협하게 살고, 바다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바다처럼 넓은 삶을 살아갑니다. 생각에 갇히는 것은 정말 인간을 어리석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생각에 갇히지 않도록 신진대사가 막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필립 얀시가 쓴 어느 글에 헤럴드 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읜 필립 얀시에겐 좋은 놀이 친구입니다. 그 '헤럴드 형'라는 사람이 바로 생각에 갇히 사람입니다. 교회에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아가씨들을 자주 비판하고, 예배에 현락한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 눈에 거슬리고, 자기뜻에 맞는 교회를 찾아 이사를 합니다. 미국 사회의 개방 풍조로 흑백 통합 물결이 거세지자 이는 공산주의 농간이자 말세의 징조라고 확신합니다. 미국은 언젠가 몰락할 것이라고 백인 국가이자 경건한 남아프리카로 이민을 갑니다. 그곳은 인종 간 결혼, 낙태, 도색 잡지 등이 금해진 엄격한 나라였는데 거기서 그는 평신도 설교자가 되어서 공산주의 자와 거짓 정교 젊은이들의 도덕적 타락 등을 쉼없이 질타합니다. 그리고 종종 미국 사는 필립 얀시와 친족들에게 서구문명에 도덕적 각성이 필요하다는 내용들로 편지 보냅니다. 겉으로 보면 정의의 투사 이 시대 세례요한 같은 선자자입니다. 그런데 편지가 뜸하고 소식이 끊겨서 핍립얀시가 남아프리카로 가보았을 때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습니다. ‘음란죄로 체포된 설교자’로 뉴스에 뜨고,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집에 거대한 포르노 센터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광야의 선지자 세례요이, 세상의 타락상을 비판하며 미국을 등졌던 사람이 가장 음란한 죄를 짓고 수감 중이었던 것입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문제였을까? 정말 큰 의문 이었습니다. 헤럴드는 출소 후 다시 필립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회개하고 변회 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표독스레 세상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고 경고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필립 얀시는 그제서야 한가지 생각이 감돌았습니다. 그의 편지는 늘상 세상의 ‘공의’ 문제를 한탄하지만, 정작 본인의 이야기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교훈과 경고, 따끔한 비판은 늘 남 이야기였습니다. 언제나 자신에게만은 예외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의 문제가 바로 의로운 자기 생각에 갇혔던 것입니다. 장자 추수편에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는 바다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삐뚫어진 선비에게는 도를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처럼 눈과 귀를 막는 확고한 마음도 생각을 가두는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그 고집으로 평생을 하찮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갇힌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갇혀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앎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갇힌 줄 아는 것이야말로 생각의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첫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시는 해방자입니다. 죄와 죽음 무덤에서 우리를 살리고 끌어내주신 분입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는 오직 예수님만이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발에 묶인 것은 의지의 문제입니다. 우리 스스로 풀어야 합니다. 정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매일 성실히 큐티를 하고, 수준 높은 책들을 읽어야 합니다. 잘못된 생각을 비추어보고 바로 잡고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게 묶은 줄을 끊고 편견이란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주신 해방의 자유를 누리며 춤을 추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주일 생명 말씀(2024.2. 25) 에베소서 2:8,9 모든 것이 선물 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 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것이아 니요 하나님의 선물 이라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 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하심이라" 지난 주 주일 예배실로 내려와서 인사를 나누는데 낯선 한 분이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일단 새로운 사람이 왔으니 너무나 반갑고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셨는가 했습니다. 스스로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을 한 30분 정도 전하고 내려와서 다시 인사를 하며 점심식사 하고 가시라고 권하는데 다자꼬짜 저를 바라보면서 설교에 인본주의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이가 없었습니다. 신천지 같은 이단이나, 아주 극단적 근본주의자 아니라면 한번 예배드리고 이렇게 무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인본주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본주의란 하나님보다 사람 중심으로 기울어진 생각과 사고를 말합니다. 여기서 ’인본‘과 ’인본주의‘는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죄인의 형상을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본주의 자인가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인본주의 인가요? 당시에 공인된 세리나 죄인들과 식사를 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리김 없이 죄인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인본주의인가요? 선한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비유를 들으실 때 믿음의 사람이 아닌 다시 멸시받는 이방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으셨습니다. 인본주의 인가요? 마태복음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 가다가 다투는 일이 있으면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인본주의 아닌가요? 이것은 인본입니다. 인본주이와 달리 인본은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 됨을 바로 세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은 인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신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오시지 않고 하나님이심을 강조만 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으 것입니다. 형제와 다투며 미워하는 사람보고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하면 참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식탐한다고 비판을 한다면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 레위인 ... 많은 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로운체 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율법을 지키며 살았지만 기득권만 쟁취하려하였지 약하고 병들과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늘 예수님을 책자고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들에게 임하지 않고 오히려 들에 양치는 목동들에게, 그리고 어부요 세리요 열혈당 죄인들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보다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근본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긍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근본 인간이 안 되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흔히 말하기를 먼저 인간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생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고,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고, 의사 판검사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본이 안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아마 교회에 처음 나온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성한 설교에 니체가 등장하고, 교육 심리학자 아들러 이야기를 하고, 레오버스가 글리오, 후안 까를로스 이런 인문고전 철학자들 이름과 글들이 인용되는가? 저 목사님 사도행전에 바울처럼 철학적 설교를 하네 했을 것입니다. 어처구니 없어서 바로 자리를 떴지만 예배 후 혹시라도 이 분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어 다른 때보다 설교를 많이 보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천 권사님을 통해서 피드백의 카톡이 왔습니다. 그러면서 감동받은 이야기를 길게 소감으로 보내오셨습니다. ”와우 감사하네요,“ ”오늘도 실망없이 은혜가 됬나요“ ”실망이라니요. 그 무슨 겸손의 말씀을,, 은혜가 실로 큽니다.“ 30분이 넘어서 혹시 지루하지 않았을까 해서요“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짧다고 느껴졌습니다. 항상 보충 수업 받는 것처럼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말씀을 듣고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요? 지난 메시지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칼로저스라 사람이 한 말입니다. 내가 아는 아는 사실은 단 한 가지 배우려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배우려는 사람은 어떤 모양이든지 배우는데 반대로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어떤 모양이든지 비판하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기분이 좀 언짠고 한 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어떤 표지를 보고 서광호 목사님처럼 우주교회까지 들어오긴했는데 더는 못 나갔습니다. 신앙의 참 본질에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놓쳐버렸그나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인본과 인본주의와 인본을 구분할줄만 알았어도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말입니다. . 제가 인본 고전을 설교에 인용하여 니체 이야기, 연금술사 이야기, 아들러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보다 철학자들의 글들이 더 좋고 아름다워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고상하고 지적인 은유와 비유를 들어서 말씀의 깊은 의미를 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문고전 철학도 사실 은유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들어내시려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고, 씨뿌리는 농부의 이야기, 두 아들의 비유를 예로 드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 맏아들을 본받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의미를 알기 쉽게 들어내려고 비유를 들으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도 저렇게 사랑했는데 너희는 더욱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똑같은 씨라도 받아들이는 밭의 종류에 따라서 저렇게 결과가 다른데 우리 듣는 마음도 얼마나 주요한지 아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니체를 본받으라고 니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 믿지만 세상이 인정하는 위대한 철학자도 우리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함을 말하는데 인간은 어느 누구도 평범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하물며 성경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DNA를 가진 존재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스스로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존귀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있는 모습 그대로 그 사람을 보는 것'이며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알 수 있지만 인간이 자로 되어야 하나님에 대해서도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후 식사를 마치고 교제하는 가운데 서광호 목사님은 이 형제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였습니다. 나중에 왜 그러습니까? 물어보니 어디를 가더라도 저 형제처럼 교만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도 맞습니다. 이왕에 선물에 대해서 생각해보죠. 사실 이 세상에 선물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빛도 선물 어둠도 선물입니다. 하루 하루가 다 선물입니다. 내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다 선물입니다. 산도, 바다도, 눈 앞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다 선물입니다. 아직 산을 타고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는 두 다리도 건강한 것도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선물을 많이 받고 어떤 사람이 적게 받는 것은 인식의 차이일 뿐 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이 다 선물이라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많은 선물을 받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무척아나 굴곡진 고난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삶 속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레치암‘입니다. 삶에 대한 축복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부당하다 생각되어도 삶은 거룩한 것이며 그 자체가 축복돤 것이라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나누며 서로를 위해 건배를 하며 레치암하고 축복을 했습니다. 삶을 위하여라는 듯입니다. 행복한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생명을 비롯하여 이미 많은 것을 선물로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순간순간 감사하며 서로 축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것도 미래가 아니라 지금 내가 행복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깨닫기 때문에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하늘, 바다, 땅 ,바람. 구름 ,맑은 공기, 아름다운 꽃들과 푸른 잎사귀들 다 세어보면 부자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영국 시인 올리버 골드 스미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행복을 스스로 만들고 찾아야 한다. 이미 주어진 것을 찾고 발견하고 창조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모님도 선물이었고, 피덩이 아가로 태어나서 처음 입은 배내 저고리도 선물 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서 태어나서 장성하기까지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준 부보님, 나를 곁에서 도와준 가족 친지들, 이웃, 친구들, 선생님 모든 주변의 사람들 알고 보면 다 당연한 것이 아닌 선물 이었습니다. 우리 독서모임이 다음 주부터 장자를 합니다. 장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정말 대단한 선물입니다. 그의 대표적 사상으로 소요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人生을 바쁘게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늘이 내려준 하루하루의 삶을 그 자체로서 중(重)히 여기고 감사(感謝)하며 살아야지, 하루하루를 마치 무슨 목적(目的)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手段)인 것처럼 소모적(消耗的)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장자(莊子)는 우리에게 人生에 있어서 '일'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소풍(逍風)"을 권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일' 하러 世上에 온 것이 아니고, 成功하려고 世上에 온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다 부차적(副次的)이고 수단적(手段的)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 생(生)에 무엇을 잘 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는 이 삶을 하늘로부터 선물(膳物)로 받아 이렇게 지구에 와 있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 장자는 이 사실을 어떻게 깨달았을까요? .삶을 '수단(手段)'시 하지 마라. '삶' 자체가 '목적'임을 알라.이 '삶'이라는 여행(旅行)은 무슨 목적지(目的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이 여행(旅行) 자체를 즐겨라고 합니다. 장자(莊子)가 말한 소요유(逍遼遊)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인생이란 소풍(消風)이다. 조물주는 우리에게 소풍(消風)을 보내면서 단지 열흘짜리 휴가증을 끊어주셨다. 그러나 조물주가 계시는 중심 우주와 우리가 사는 외각 우주가 서로 흐르는 시간대가 달라 그것이 백 년이 된 것 뿐이다. 장자(莊子)가 말한 '소요유'에는 글자 어디를 뜯어봐도 바쁘고 조급한 흔적(痕迹)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소요유의 "소(逍) 자는 소풍 간다는 뜻이고 "요(遼) 자는 멀리 간다는 뜻이며 "유(遊) 자는 노닌다는 뜻입니다. 즉 "멀리 소풍 가서 노니는 개념"입니다. 그러니 '소요유'를 제대로 하려면 세 번을 쉬어야 한다. -갈 때 쉬고! -올 때 쉬고! -또 중간에 틈나는 대로 쉬고...우리 여생(餘生)의 종착역이 점차 가까와지고 있다. 우리의 人生은 매우 짧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짐 진 자는 모두를 내려놓고, 동심(童心)으로 (어린아이) 돌아가야 한다. 소풍온듯 쉬엄쉬엄 희희낙락(喜喜樂樂) 항상 기뻐하면서 후회(後悔) 없이 즐겁게 살아야 한다. 한 박자 쉬면 삶의 여유(餘裕)는 두 배가 된다. 소풍을 즐기다 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반드시 소풍이 끝났음을 알려주신다. 이 때, 소풍이 끝났다는 것은 단지 귀가를 의미한다.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들이 반기고 가족과 함께 더욱 기쁘고 행복한 시간으로 이어진다. 환상적인 시간과 아름다운 세상이 준비되어 있다... 장자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장자도 어떻게 보면 비유입니다. 짧은 인생 살이가 소풍이라는 것, 끝나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것인데 어떻게 살 것인가? 모두가 성경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삶이니 즐겁게 행복하게 소풍처럼 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소풍 왔다 가는데 싸우지 말고 사랑하며 즐겁게 살다가 아버지께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조정민 목사님 책 두 권을 읽었는데 거기서 이 분은 두가지 선물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선물’ 또 하나는 ‘인생이 선물“ ’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말합니다. “우리 인생은 선물입니다. 인생의 출발점이 내가 아닙니다. 인생은 누군가의 선물로 시작된 것입니다. 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 나 주위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 나와 평생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소중한 선물이고 인생 전체가 내가 받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사실 처음에는 삶들이, 아름다운 세상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알고보니 저에게 보내주신 가까이 사람들이 가장 크고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푸른 초장 식구들은 정말 내 인생에 소중한 선물입니다. 재중, 명남 정미. 지홍, 서광호, 현옥, 경숙, 효주 영미, 선교사님, 최광휴 선교사님, 근호 형제님 천권사님. 모두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입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너무나 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한 분 한 분 내 인생에 베스트의 선물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라고 그리고 행복을 나누며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주어진 인생의 선물을 누리며 살려고 합니까? 남편 아내 자식들 얼마나 소중한 선물 입니까? 선물을 어떻게 써야 하겠습니까? 선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선물이 오고가는 곳에는 요구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행복과 감사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구하지 없으니 대신 자유입니다. 서로 베풀고 주기만 합니다. 이런 삶에는 비록 살아가면서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할 때가 있어도 그 역시 자유 선택이지 매임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다시 요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목자로 세웠고, 너에게 교회를 주었는데 할당량 얼마 몇 명 부흥을 해야하지 않는냐 하신다면 제가 목회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잘 하나 못하나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선물을 줬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자유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선물도 주시고 요구하신 것은 믿음 하나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라는 것뿐입니다. 선물 준 것 믿고 받으라는 것 뿐입니다. 에베소서 2:8,9에서 부과 설명 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 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것이아 니요 하나님의 선물 이라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 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하심이라" 왜 예쁠 것도 없고, 잘 한 것도 하나도 없는, 죄악 된 세상,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물을 주십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에베소서 2:4-5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결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선물로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알고보면 우리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부자입니다. 자유 자이고, 행복 자입니다. 기가 죽을 필요 없습니다. 부자의 여유로움을 갖고 삽시다. 하늘 땅 바다 맑은 공기 아름다운 자연 모든 것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ㄱ만으로도 부자입니다. 주신 하나님 안에서 받은 선물들 퍼서 나누며 삽시다. 구원의 은혜 노래하며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할렐루야 아멘!.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하심이라" 지난 주 주일 예배실로 내려와서 인사를 나누는데 낯선 한 분이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일단 새로운 사람이 왔으니 너무나 반갑고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셨는가 했습니다. 스스로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을 한 30분 정도 전하고 내려와서 다시 인사를 하며 점심식사 하고 가시라고 권하는데 다자꼬짜 저를 바라보면서 설교에 인본주의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이가 없었습니다. 신천지 같은 이단이나, 아주 극단적 근본주의자 아니라면 한번 예배드리고 이렇게 무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인본주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본주의란 하나님보다 사람 중심으로 기울어진 생각과 사고를 말합니다. 여기서 ’인본‘과 ’인본주의‘는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죄인의 형상을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본주의 자인가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인본주의 인가요? 당시에 공인된 세리나 죄인들과 식사를 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리김 없이 죄인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인본주의인가요? 선한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비유를 들으실 때 믿음의 사람이 아닌 다시 멸시받는 이방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으셨습니다. 인본주의 인가요? 마태복음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 가다가 다투는 일이 있으면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인본주의 아닌가요? 이것은 인본입니다. 인본주이와 달리 인본은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 됨을 바로 세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은 인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신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오시지 않고 하나님이심을 강조만 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으 것입니다. 형제와 다투며 미워하는 사람보고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하면 참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식탐한다고 비판을 한다면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 레위인 ... 많은 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로운체 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율법을 지키며 살았지만 기득권만 쟁취하려하였지 약하고 병들과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늘 예수님을 책자고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들에게 임하지 않고 오히려 들에 양치는 목동들에게, 그리고 어부요 세리요 열혈당 죄인들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보다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근본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긍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근본 인간이 안 되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흔히 말하기를 먼저 인간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생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고,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고, 의사 판검사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본이 안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아마 교회에 처음 나온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성한 설교에 니체가 등장하고, 교육 심리학자 아들러 이야기를 하고, 레오버스가 글리오, 후안 까를로스 이런 인문고전 철학자들 이름과 글들이 인용되는가? 저 목사님 사도행전에 바울처럼 철학적 설교를 하네 했을 것입니다. 어처구니 없어서 바로 자리를 떴지만 예배 후 혹시라도 이 분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어 다른 때보다 설교를 많이 보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천 권사님을 통해서 피드백의 카톡이 왔습니다. 그러면서 감동받은 이야기를 길게 소감으로 보내오셨습니다. ”와우 감사하네요,“ ”오늘도 실망없이 은혜가 됬나요“ ”실망이라니요. 그 무슨 겸손의 말씀을,, 은혜가 실로 큽니다.“ 30분이 넘어서 혹시 지루하지 않았을까 해서요“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짧다고 느껴졌습니다. 항상 보충 수업 받는 것처럼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말씀을 듣고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요? 지난 메시지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칼로저스라 사람이 한 말입니다. 내가 아는 아는 사실은 단 한 가지 배우려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배우려는 사람은 어떤 모양이든지 배우는데 반대로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어떤 모양이든지 비판하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기분이 좀 언짠고 한 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어떤 표지를 보고 서광호 목사님처럼 우주교회까지 들어오긴했는데 더는 못 나갔습니다. 신앙의 참 본질에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놓쳐버렸그나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인본과 인본주의와 인본을 구분할줄만 알았어도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말입니다. . 제가 인본 고전을 설교에 인용하여 니체 이야기, 연금술사 이야기, 아들러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보다 철학자들의 글들이 더 좋고 아름다워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고상하고 지적인 은유와 비유를 들어서 말씀의 깊은 의미를 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문고전 철학도 사실 은유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들어내시려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고, 씨뿌리는 농부의 이야기, 두 아들의 비유를 예로 드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 맏아들을 본받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의미를 알기 쉽게 들어내려고 비유를 들으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도 저렇게 사랑했는데 너희는 더욱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똑같은 씨라도 받아들이는 밭의 종류에 따라서 저렇게 결과가 다른데 우리 듣는 마음도 얼마나 주요한지 아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니체를 본받으라고 니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 믿지만 세상이 인정하는 위대한 철학자도 우리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함을 말하는데 인간은 어느 누구도 평범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하물며 성경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DNA를 가진 존재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스스로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존귀히 여기는 것에 대해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있는 모습 그대로 그 사람을 보는 것'이며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알 수 있지만 인간이 자로 되어야 하나님에 대해서도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후 식사를 마치고 교제하는 가운데 서광호 목사님은 이 형제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였습니다. 나중에 왜 그러습니까? 물어보니 어디를 가더라도 저 형제처럼 교만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도 맞습니다. 이왕에 선물에 대해서 생각해보죠. 사실 이 세상에 선물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빛도 선물 어둠도 선물입니다. 하루 하루가 다 선물입니다. 내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다 선물입니다. 산도, 바다도, 눈 앞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다 선물입니다. 아직 산을 타고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는 두 다리도 건강한 것도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선물을 많이 받고 어떤 사람이 적게 받는 것은 인식의 차이일 뿐 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이 다 선물이라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많은 선물을 받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무척아나 굴곡진 고난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삶 속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레치암‘입니다. 삶에 대한 축복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부당하다 생각되어도 삶은 거룩한 것이며 그 자체가 축복돤 것이라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나누며 서로를 위해 건배를 하며 레치암하고 축복을 했습니다. 삶을 위하여라는 듯입니다. 행복한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생명을 비롯하여 이미 많은 것을 선물로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순간순간 감사하며 서로 축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것도 미래가 아니라 지금 내가 행복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깨닫기 때문에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하늘, 바다, 땅 ,바람. 구름 ,맑은 공기, 아름다운 꽃들과 푸른 잎사귀들 다 세어보면 부자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영국 시인 올리버 골드 스미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행복을 스스로 만들고 찾아야 한다. 이미 주어진 것을 찾고 발견하고 창조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모님도 선물이었고, 피덩이 아가로 태어나서 처음 입은 배내 저고리도 선물 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서 태어나서 장성하기까지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준 부보님, 나를 곁에서 도와준 가족 친지들, 이웃, 친구들, 선생님 모든 주변의 사람들 알고 보면 다 당연한 것이 아닌 선물 이었습니다. 우리 독서모임이 다음 주부터 장자를 합니다. 장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정말 대단한 선물입니다. 그의 대표적 사상으로 소요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人生을 바쁘게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늘이 내려준 하루하루의 삶을 그 자체로서 중(重)히 여기고 감사(感謝)하며 살아야지, 하루하루를 마치 무슨 목적(目的)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手段)인 것처럼 소모적(消耗的)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장자(莊子)는 우리에게 人生에 있어서 '일'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소풍(逍風)"을 권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일' 하러 世上에 온 것이 아니고, 成功하려고 世上에 온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다 부차적(副次的)이고 수단적(手段的)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 생(生)에 무엇을 잘 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는 이 삶을 하늘로부터 선물(膳物)로 받아 이렇게 지구에 와 있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 장자는 이 사실을 어떻게 깨달았을까요? .삶을 '수단(手段)'시 하지 마라. '삶' 자체가 '목적'임을 알라.이 '삶'이라는 여행(旅行)은 무슨 목적지(目的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이 여행(旅行) 자체를 즐겨라고 합니다. 장자(莊子)가 말한 소요유(逍遼遊)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인생이란 소풍(消風)이다. 조물주는 우리에게 소풍(消風)을 보내면서 단지 열흘짜리 휴가증을 끊어주셨다. 그러나 조물주가 계시는 중심 우주와 우리가 사는 외각 우주가 서로 흐르는 시간대가 달라 그것이 백 년이 된 것 뿐이다. 장자(莊子)가 말한 '소요유'에는 글자 어디를 뜯어봐도 바쁘고 조급한 흔적(痕迹)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소요유의 "소(逍) 자는 소풍 간다는 뜻이고 "요(遼) 자는 멀리 간다는 뜻이며 "유(遊) 자는 노닌다는 뜻입니다. 즉 "멀리 소풍 가서 노니는 개념"입니다. 그러니 '소요유'를 제대로 하려면 세 번을 쉬어야 한다. -갈 때 쉬고! -올 때 쉬고! -또 중간에 틈나는 대로 쉬고...우리 여생(餘生)의 종착역이 점차 가까와지고 있다. 우리의 人生은 매우 짧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짐 진 자는 모두를 내려놓고, 동심(童心)으로 (어린아이) 돌아가야 한다. 소풍온듯 쉬엄쉬엄 희희낙락(喜喜樂樂) 항상 기뻐하면서 후회(後悔) 없이 즐겁게 살아야 한다. 한 박자 쉬면 삶의 여유(餘裕)는 두 배가 된다. 소풍을 즐기다 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반드시 소풍이 끝났음을 알려주신다. 이 때, 소풍이 끝났다는 것은 단지 귀가를 의미한다.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들이 반기고 가족과 함께 더욱 기쁘고 행복한 시간으로 이어진다. 환상적인 시간과 아름다운 세상이 준비되어 있다... 장자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장자도 어떻게 보면 비유입니다. 짧은 인생 살이가 소풍이라는 것, 끝나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것인데 어떻게 살 것인가? 모두가 성경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삶이니 즐겁게 행복하게 소풍처럼 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소풍 왔다 가는데 싸우지 말고 사랑하며 즐겁게 살다가 아버지께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조정민 목사님 책 두 권을 읽었는데 거기서 이 분은 두가지 선물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선물’ 또 하나는 ‘인생이 선물“ ’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말합니다. “우리 인생은 선물입니다. 인생의 출발점이 내가 아닙니다. 인생은 누군가의 선물로 시작된 것입니다. 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 나 주위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 나와 평생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소중한 선물이고 인생 전체가 내가 받은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사실 처음에는 삶들이, 아름다운 세상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알고보니 저에게 보내주신 가까이 사람들이 가장 크고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푸른 초장 식구들은 정말 내 인생에 소중한 선물입니다. 재중, 명남 정미. 지홍, 서광호, 현옥, 경숙, 효주 영미, 선교사님, 최광휴 선교사님, 근호 형제님 천권사님. 모두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입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너무나 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한 분 한 분 내 인생에 베스트의 선물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라고 그리고 행복을 나누며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주어진 인생의 선물을 누리며 살려고 합니까? 남편 아내 자식들 얼마나 소중한 선물 입니까? 선물을 어떻게 써야 하겠습니까? 선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선물이 오고가는 곳에는 요구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행복과 감사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구하지 없으니 대신 자유입니다. 서로 베풀고 주기만 합니다. 이런 삶에는 비록 살아가면서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할 때가 있어도 그 역시 자유 선택이지 매임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다시 요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목자로 세웠고, 너에게 교회를 주었는데 할당량 얼마 몇 명 부흥을 해야하지 않는냐 하신다면 제가 목회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잘 하나 못하나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선물을 줬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자유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선물도 주시고 요구하신 것은 믿음 하나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라는 것뿐입니다. 선물 준 것 믿고 받으라는 것 뿐입니다. 에베소서 2:8,9에서 부과 설명 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 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것이아 니요 하나님의 선물 이라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 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하심이라" 왜 예쁠 것도 없고, 잘 한 것도 하나도 없는, 죄악 된 세상,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물을 주십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에베소서 2:4-5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결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선물로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알고보면 우리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부자입니다. 자유 자이고, 행복 자입니다. 기가 죽을 필요 없습니다. 부자의 여유로움을 갖고 삽시다. 하늘 땅 바다 맑은 공기 아름다운 자연 모든 것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ㄱ만으로도 부자입니다. 주신 하나님 안에서 받은 선물들 퍼서 나누며 삽시다. 구원의 은혜 노래하며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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