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937) - 주된 일과가 된 걷기를 즐기며
싱그러운 5월의 한 복판을 지나는 한 주, 그 시작인 월요일아침에 이 땅의 어두운 역사를 회상하며 더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였다. 그 첫날(월요일)은 한참 꽃피우려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총칼로 무지른 1961년의 5.16 쿠데타 61주년, 화요일은 5.16의 변종이랄 수 있는 전두환 일당의 1980년의 5‧17(5월 17일) 비상계엄확대, 수요일은 광주 5.18민중항쟁(1980년 5월 18일)의 도화선이 된 날 등 안타까운 역사의 기억이 어찌 한데 모였을까. 이번 주 주목할 행사는 내일로 박두한 5‧18기념식과 주말로 예정된 바이든 대통령의 방한일정, 내치와 외교에서 통합과 안보의 기틀을 공고히 하는 지도력이 잘 발휘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모내기가 한창인 들판
(사)한국체육진흥회는 지난 13일부터 열흘 간 제20회 언택트 서울국제걷기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참가자가 원하는 곳, 전국 어디서나 걷고 싶은 자신의 코스를 정하여 걷는 행사다. 평소에도 꾸준히 걷고 있지만 특별행사를 맞아 더 열심히 걷는 중, 요즘은 걷기가 주된 일과다. 금년 들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15km 내외를 걷다가 이벤트 기간에는 이를 20km 이상으로 늘렸다. 마무리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걷는 코스를 다양하게 변경하고 여러 번 걸었던 곳도 자세히 살피니 그냥 지나쳤던 경관이나 기록이 새삼 눈에 띠기도. 그중 하나, 늘 걷는 무심천 중심부의 청주시 생활체육공원에 세워진 무심천 유래비를 일별하였다. 그 내용, 무심천은 남석천(南石川, 통일신라) - 심천(沁川, 고려) - 석교천, 대교천(石橋川, 大橋川, 조선) - 무성뚝(일본강점시기)에서 오늘의 무심천으로 불려왔다. 이 무심천에는 확인키 어려운 몇 설화가 전해오는 바 그 중 다음과 같은 사연이 길손의 발길을 멎게 한다.
'청주고을 양지바른 곳에 오두막이 있었네.
그 집에 한 여인 다섯 살짜리 아들과 살았네.
집 뒤로 맑은 물 사철 흐르고 통나무다리 놓여 있었네.
어느 날 행인이 하나 찾아들자 여인은 아이를 부탁하고 일보러 나갔고 아이를 돌보던 행인은 그만 깜박 잠이 들고 말았네.
꿈결인 듯 여인의 통곡소리에 눈을 뜨니 이게 웬일인고.
아이 주검 되어 그 여인에게 들려 있네.
사연을 알아보니 행인이 잠든 사이 통나무다리 건너다 물에 빠져 죽었다네.
여인은 아이의 잿가루를 그 물에 뿌리고 삭발 후 산으로 갔다네.
이 소식 인근 사찰에 전해지자 모든 승려 크게 불쌍히 여겨 아이의 명복을 빌기로 했다네.
그들은 백일만에 통나무다리 대신 돌다리를 세웠네.
그 다리 이름은 남석교(南石橋), 이 같은 사연 알 바 없이 무심히 흐르는 이 냇물을 무심천이라 하였네.’
평소 무심하게 지나쳤던 무심천변 청주농업기술센터 경내에는 때마침 화려한 꽃 잔치가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입간판을 살피니 ‘이벤트정원은 전체면적 3,960평방미터의 규모로 유채, 코스모스, 꽃양귀비, 라벤더 등 계절별로 다양한 초화류와 청보리, 밀, 메밀 등 경관작물을 식재하여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도록 조성된 공간으로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산책의 여유로움과 힐링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정원’이라고 적혀 있다. 진홍색 양귀비꽃과 샛노란 유채꽃이 활짝 핀 이벤트정원을 한 바퀴 돌고 나니 걷느라 피곤하던 몸에 새로운 기운이 솟아오르네. 지인에게 보낸 메시지, ‘걷다가 화사한 꽃밭을 지나니 피곤한 기색이 사라지고 힘이 솟아오르는 느낌, 새벽 산책에 만난 보름달의 충만함과 찬란하게 솟아오르는 햇빛은 또 다른 영감을 안겨주네요.’
양귀비꽃과 유채꽃이 화사한 꽃밭
글 쓰는 중 선상규 한국체육진흥회장의 전화, 지난 3월에 함께 걸었던 ‘명량해전 승리의 길 완보증’을 우송하였는데 잘 받았는지 확인 후 앞으로 가질 몇 차례 걷기행사계획을 알려준다. 열심히 걸으며 기행록까지 작성한 노정인데 증서로 받으니 감회가 더 새롭다, 앞으로의 행사에도 가능한 한 참석하겠다고 답하였다. 은퇴 후 활력과 건강을 증진하는 걷기에 주력한 것, 잘 한 선택이다. 노년의 발걸음이 사색하고 꿈꾸며 행동하는 삶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명량해전 승리의 길 완보증
* 걷기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향유하는 사례들이 많다. 얼마 전에 접한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한다.
1099일, 비단길 1만2000km를 두 다리로 건너며
‘나는 아직도 머나먼 초원과 얼굴에 쏟아지는 비바람과 느낌이 다른 태양빛 아래 몸을 맡기는 것을 꿈꾼다.’
광활한 자연과 미지의 세계에 몸을 내던지고자 하는 갈망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위 문장을 적은 이는 무엇에든 도전할 준비가 돼 있는 건장한 청춘이 아니다. 직장에서 은퇴하고, 아내와는 사별한 예순 살의 전직 기자 겸 칼럼니스트가 주인공이다. 30여 년간 프랑스 유수의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일하며 바쁘게 살아온 그는 은퇴 후 내 나이에 장미나 키우며 살아야 하는데 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불현듯 떠났던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잊지 못하고, 다시 길 위에 섰다.
저자는 1999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2002년 중국 시안에 도달하기까지 1만2000km를 걸은 1099일의 여정을 담아 세 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4년간 네 차례에 나눠 걸었다. 저자는 걸으면서 짐을 도둑맞고, 짐승의 위협을 받았으며, 발의 피부가 떨어져 나가고 배 속이 뒤틀리는 듯한 복통과 싸운다. 책은 저자가 실크로드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자세한 일화로 가득하다. 그가 길을 걷기 전 ‘내 박물관은 길들과 거기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고, 마을의 광장이며, 모르는 사람들과 식탁에 마주 앉아 마시는 수프인 것’이라고 밝혔듯, 저자는 실크로드에 살고 있는 소시민의 삶을 관찰하고 그들의 호의에 기꺼이 몸을 맡긴다. 숙소가 보이지 않아 어두컴컴한 골목을 헤매던 그에게 양갈비를 구워 주고 침대를 내어준 이부터, 친구들에게 여정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며 저자의 손을 끌고 학교로 향한 초등학생까지. 신기하다는 듯 이방인인 그를 관찰하는 눈길도 그저 반갑다. 그는 말한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복인가!’
4년간의 고된 걸음은 예순이 넘은 그에게 질병도 안겼다. 탈수증과 전립선염이 겹쳐 배가 부풀어 오르고 소변을 볼 수 없었다. 발톱이 살을 파고들어 발가락 살이 너덜너덜해지는 게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걷는다. 이를 통한 그의 통찰이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사회가 얽어맨 줄을 끊고, 안락의자와 편한 침대를 외면한다. 행동하고 생각하고 꿈꾸고 걸으므로 살아있는 것이다.’(동아일보 2022. 5. 7 ‘책의 향기,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에서)
1099일, 비단길 1만2000km 행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