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숙 申貞淑(1910 - 1997)】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 독립운동 전개"
1910년 5월 12일 평안북도 의주(義州)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신봉빈(申鳳彬)이다. 신정숙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지어줬다고 전해진다. 평북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신조준(申肇峻)의 딸로, 19세 때 충청북도 음성(陰城)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현근(張鉉瑾)과 결혼하였다. 산둥성 중국유격대에 포로가 되었다가 조선의용대로 배속되어 훈련받았으며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제2지대 제2구대 제3분대에 배속되었고 이후 군무부 산하에 설치된 제3분처 위원 겸 회계조장,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제8구당 집행위원, 광복군 제2지대 3구대 3분대 대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대 일본군 정보 수집, 대적방송공작, 선전활동, 유격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무장항일운동의 주역이었던 한국독립군은 1930년대 중반까지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항일전을 지속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근거지를 옮긴 끝에 중경(重慶)에 정착하여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광복군은 중국 화북(華北) 지역에서 병력 모집 및 훈련, 선전과 정보 수집, 적정정찰, 유격전 수행 등을 통해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여기에 한인 여성들도 입대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광복군의 여성 군인들은 주로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 혹은 독립운동가와 결혼하거나 국내에서 민족운동에 투신하다 망명을 하는 등 다양했고, 초모활동, 교육 및 훈련, 선전활동, 한미군사 합작과 전략첩보활동, 국내진입작전과 정진대 활동 등에 참가하면서 세탁, 재봉, 구호대 등의 일도 수행하였다.
남편 장현근 지사가 애국청년단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중, 1932년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중국 훙커우 공원 의열 투쟁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게 붙잡히고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과 동지인 김덕근(金德根)과 함께 경기도 경찰부로 이송되자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한편 춘원 이광수(李光秀)의 비밀연락문을 냉면 그릇에 숨겨 안창호에게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1년 장현근 지사가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자 중국 만주로 떠났다. 중국 광서성(廣西省) 계림(桂林)에 있는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대(婦女服務隊)에서 1년 반의 특무 교육을 받았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창설 되자 1941년 광복군 제2지대로 배속되었고 이후 징모 제3분처 위원 겸 회계조장으로 파견되어 연락망을 구축한 징모와 선전 공작, 지하 첩보활동을 수행하였다. 이후 1941년 4월 29일 임시정부 군사위원회로부터 중국 중앙군 제3전구 사령부에서 유격작전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수행하였으며, 한국독립당 제8구당 집행위원을 맡으며 정보 수집, 대적 방송공작, 선전활동 등을 수행하였다. 1941년 11월 중경에서 열렸던 임시정부 34차 의회에서 당시 주석이었던 김구와 조소앙(趙素昻)으로부터 공로 표창을 받았고, 중국 장개석(藏介石) 총통(總統)으로부터 “한 명의 한국 여자가 중국 장병 1천명보다 강하다”라는 찬사를 듣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1942년 10월 중국 남평(南平) 광복군 제2지대 3구대 3분대로 편성되어 광복군 징모 제3분처 주임을 역임하였던 김문호(金文鎬)를 대장으로 하고 대원 이지일(李志一), 안악신(安岳信) 20여 명과 함께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일본군 후방 교란작전 및 정보 수집, 비밀 연락 임무를 수행하였다.
해방 이후 환국한 이후 대전시(大田市)에서 고려산업(高麗産業)이라는 간장 및 된장 공장과 양계업을 운영하면서,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부모를 잃은 아이들 20여 명을 조력하거나 고학생들의 학비를 부담하는 등 육영 및 교육, 장학 사업에 힘을 보탰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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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위원 환송 기념사진(1941. 3. 6, 가운데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신정숙) [판형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