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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대구 지하철 가스폭발사고
대구시 상인동 70번지 영남중고교 앞 네거리 지하철1호선 제1∼2구간 공사장
에서 일어난 가스폭발 사건이다.인근 대
구백화점 상인점 신축 공사장에서 지반을 다지기 위한 천공작업 중 그 부근을 지나던 지름 100mm의 가스관을 파손해 이 가스
관으로부터 새어 나온 가스가 하수관을 타
고 지하철 공사장으로 흘러들어 괴었다가 폭발하였다
▶2014년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
회, <세월 호참사재발방지법'>.<수학여행
안전법'> 등을 통과.
▶2014년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선박 의 입항 및 출항 등에 관한 법률 제정
안 의결.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인권변호사 아호메드 알기지위의 구속과 관련된 항의 시위가 일어나자 시위 장소인 이집트주재 사우디아라비 아 대사관을 폐쇄.
▶2011 년 미국 중남부 일대에 강력한 토네이도 발생 (270여 명사망).
▶2009년'러시아 발레의 전설' 막시모바 타계
▶2008년 2006년 8월 4일 베트남 하노
이에서 김의기 주베트남 대한민국대사 명
의로 보낸 각서 에 대하여 2008년 4월 28
일 베트남 외교부에서 회답각서를 통보함
으로써 "대한민국 정부와 베트 남사회주의
공화국 정부 간의 항공협정 개정을 위 한 교환각서"가 2008년 4월 28일자로 발효
되었 다.
▶2006년 북한산 국립공원에서 화재 발생
으로7천 평이 연소되고4시간 반만에 진화
▶2004년과학전문지 네이처, 범고래 신호음 선박소음으로 70~80년대 보다 약 15% 길어졌다고 보도
▶2004년 이라크 주둔 미군들이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이라크인 포로들을 학대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미국CBS 방송에 공개되어 파문.
▶2004년 광주광역시 지하철 개통
👉🏿광주 지하철 1호선 1구간이 2004년 4월 28일 오전 10시 광주 서구 마륵동 상무역에서 개통식을 갖고 운행에 들어갔다.
2004년 4월 28일, 광주광역시에 지하철 1호선이 착공 7년 8개월여 만에 부분(1구간) 개통돼 광주에도 본격적인 지하철시대의 막이 올랐다. 1구간은 차량기지 1개(용산)와 정거장 13개를 포함하고 있으며, 차량은 1편성에 4량씩 모두 13편성(52량)이 운행한다. 지난 1996년 8월 착공돼 1조 443억원을 들여 7년 4개월여 만인 지난 해 말 토목과 기전분야 공사가 마무리됐다.
광주 지하철은 쾌적한 지하환경을 위해 모든 역사에 냉방시설을 갖췄다. 또한 모든 역사에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지하철 내에 화재 등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자동으로 운전사령에게 통보되며, 환기설비가 제연모드로 자동 전환되도록 했다. 객실 내장재와 바닥재는 국제 수준의 난연성 내장재를 사용했다. 도청역과 금남로4가역에는 국내 처음으로 스크린도어를 설치, 고객의 안전을 확보하고 소음과 열차풍·분진 등을 차단해 쾌적성을 높일 수 있도록 했다.
광주 지하철 전동차는 (주)로템과 조달계약을 맺어 주요 핵심장치를 100% 국산화해 설계·제작했다. 이에 따라 고장 발생 때 신속한 대응과 조치가 가능하며, 외국의 기술과 고가의 부품에 의존해야 했던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또 전동차 차체를 국내 최초로 알루미늄합금으로 제작, 타도시의 기존 전동차보다 중량을 20% 가량 줄였다. 이에 따라 승차감과 소음차단 효과를 향상시키고 운행동력비도 절감할 수 있게 됐다. 열차 사이에 문이 없는 ‘일체형 통로(Gangway)’는 방음·단열효과가 우수하며, 4량의 전동차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만약의 사태 발생 시 신속한 대응과 대피가 가능하다.
▶2003년 전두환 전 대통령, 법정에서 자신 명의 재산이 30여 만 원 정도라고 주장.
▶2003년박세리, 미국 LPGA투어 통산 20승
▶2003년한국ㆍ미국ㆍ프랑스 공동개발한 우주망원경 갤렉스 우주공간에 발사
👉🏿 국내 연구진이 참여해 만든 최초의 우주망원경이 2003년 4월 28일 우주공간에 발사됐다. 연세대학교 자외선우주망원경연구단(단장 이영욱)은 미 항공우주국(NASA), 프랑스 우주천문연구소(LAS) 등과 함께 개발한 자외선 우주망원경 갤렉스(GALEX ·Galaxy Evolution Explorer)를 이날 오후 9시(한국시각)쯤 미국 플로리다의 케네디우주센터에서 페가수스 XL 로켓에 실어 발사했다고 밝혔다.
갤렉스는 당시 세계에서 유일한 자외선 우주망원경으로, 우주의 역사를 탐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갤렉스는 지구 대기권의 오존층의 방해를 받지 않아 70억~80억광년 이상 떨어진 고온의 별에서 나오는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시야도 허블 망원경 등 기존의 가시광선 우주망원경의 수백 배에 달한다.
갤렉스는 앞으로 28개월 동안 지구 상공 690km 궤도에서 지름 50cm의 반사경을 사용해 주로 먼 외부 은하의 별들을 관측할 예정이다. 관측 결과를 처리할 자료센터는 캘리포니아공대, 존스홉킨스대학, 연세대학교 등 세 곳에 설치된다. 자외선우주망원경연구단은 갤렉스의 관측자료를 국내 학계와 공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갤렉스 망원경은 1998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공대를 주축으로 미국·프랑스·한국 3개국 연구팀이 함께 참여해 제작했으며, 한국은 15명의 과학자가 개발에 참여했다.
▶2003년자오쯔양(趙紫陽) 중국 전 총서기 사망
▶2003년 애플, '아이륜즈 스토어' 출시.
▶2003년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이라크 1 차 의료봉사단 파견.
▶2003년남해 5개섬 잇는 ‘연륙연도교’ 개통
▶2002년제4차 이산가족 상봉
👉🏿 2002년 4월 28일 북한 금강산에서는 전해 2월의 서울·평양에 이어 남과 북의 부모·자녀, 형제들이 부둥켜안고 반세기 이산의 한(恨)을 풀었다.
이산가족 상봉은 동년 4월 3일 임동원 특사 방북을 통해 이루어졌다. 장소가 협소해 남북한 이산가족들이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상대측 가족들을 만났다. 남쪽 이산가족 100명이 먼저 금강산에 가서 2박3일 동안 북한의 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북쪽 이산가족 100명을 만날 남한의 가족들이 다시 금강산으로 가서 상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날 오후 금강산여관에선 이틀전인 26일 숨진 어머니 어병선(93)씨 대신 상봉단에 포함된 이부자(62)씨를 비롯해 남측 이산가족 99명이 북한의 가족 183명과 단체상봉을 가졌다. 남북 이산가족들은 이날 저녁 북한 적십자회 주최로 금강산여관에서 만찬을 가진 뒤 금강산에서의 첫 밤을 보낸 후 30일 오전 금강산여관에서 북측 가족·친척 183명과의 작별상봉을 끝으로 2박3일간의 짧은 상봉일정을 마치고, 장전항을 떠나 속초로 돌아왔다. 또 5월 1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북측 이산가족 100명을 만날 남측 가족·친척 468명이 금강산으로 떠났다가 3일 돌아왔다.
▶2001년 미국의 백만장자 데니스 앤서니 티토 DennisAnthonyTito 세계 우주
여행 시작.
▶2001년미국 억만장자 데니스 티토, 세계 최초로 우주 관광
👉🏿 미국의 억만장자 기업인 데니스 티토(60)가 2001년 4월 28일 세계에서 최초로 우주관광객이 됐다. 티토를 태운 러시아 우주선 ‘소유즈-TM32’호는 이날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바이코누르 우주선 기지에서 발사됐으며, 30일 국제우주정거장(ISS)과 도킹에 성공했다.
미 항공우주국 엔지니어 출신으로 캘리포니아주에서 투자금융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티토는 5월 6일까지 8박9일간 우주여행을 위해 무려 2000만 달러(약 260억원)를 지불했다. 사상 첫 우주관광객이 된 티토는 발사 전날인 27일 기자회견에서 “우주여행을 향한 내 필생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감격해 했으며, 28일 우주를 향해 날아오른 뒤 첫 마디로 ‘좋다’는 뜻의 러시아어 “하라쇼”를 연발했다.
10대 때인 1957년 소련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가 처음으로 우주비행에 성공했을 때 이미 우주여행을 꿈꾸기 시작했다는 티토는 10년 전부터 모스크바 당국에 우주정거장 ‘미르’호로의 우주여행을 허락해달라고 졸라왔으며, 미르가 2001년 3월에 폐기돼 남태평양에 수장되자 ISS 여행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탈리아 이민 후손인 그는 키 164cm에 체중 63kg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의지와 각고의 노력으로 꿈을 이루었다. 티토는 우주여행 전에 900시간의 훈련을 받았다.
▶2000년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
▶1999년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22년 만에 새단장 공개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작 `최후의 만찬`이 22년간의 복원 작업을 마치고 1999년 4월 28일 일반에 공개됐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홀 벽면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12제자와 식사를 하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 최고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다빈치가 1494년~1498년에 걸쳐 완성한 이 그림은 수백년이 지나면서 습기와 먼지등으로 손상돼 왔으며 이에 따라 수백년간 걸쳐 수차례 작업을 했다. 그러나 보수 작업에도 불구하고 작품 색상이 어두워지고 표면이 떨어져 나가는 등 오히려 훼손이 심해지자 1977년부터 전문가들을 동원, 본격적인 복원 작업을 시작해 이번에 완성을 보게됐다.
반면 복원 작업으로 원작품의 예술성이 손상을 입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비평가들은 이번 복원 작업은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복원된 그림 자체의 예술성은 인정할 수 있을지라도 복원 작품에서 다빈치의 흔적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1999년레이저 발명가 아서 숄로 사망
▶1995년대구 지하철 가스폭발사고
▶1994년불교 태고종 우백암 종정 입적
▶1993년`천상의 시인` 천상병씨 별세
👉🏿 1930년, 천상병은 경남 마산시 진동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8년 마산 상북초등학교에 입학, 1939년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 2학년을 다니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 이후 마산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1947년, 마산중학교에 3년으로 편입학하였다. 재학시절 국어교사는 시인 '김춘수'였는데, 그는 소년의 재능을 눈여겨봤다. 1년간 혹독한 습작의 시간을 보내고, 1949년 마산중학교 5학년 시절 <죽순>에 시「피리」「空想」을 발표하였다.
1951년, 전시중 부산에서 서울상과에 입학, 송영택 김재섭 등과 동인지 <處女>를 발간하였다.
1952년, <문예>지 1월호에 시「강물」이 유치환에 의해 추천되고 , 5∼6월 합본호에 시「갈매기」가 모윤숙에 의해 추천이 완료되어 문단에 나왔다.
1953년, 전쟁은 감수성 여린 소년에게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선물하였다. <문예>지 신춘호에「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발표하고, 11월호에「寫實의 限界-허윤석 論」이 조연현에 의해 추천 완료됨에 따라 본격적인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는 지금도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글이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한국은행에 입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시인은 배가 고파야 한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홀연히 대학을 떠났다. 그 시절 목순옥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그녀의 오빠가 그의 친구였다. 가끔 커피숍에서 만나는 그는 그녀의 우상이었다.
1967년, 시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대학동기에게 술값을 빌린 게 간첩으로 몰린 이유였다. 중앙정보부에서 전기고문을 세번 받고 풀려났다.
1971년. 시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잦은 폭음도 그의 건강을 해쳤다. 부산 형님댁에 내려갔다 1년만에 서울에 돌아온 그는 친구 동생 목순옥을 찾아갔다. 커피숍에서 문학 이야길 하다 내일 보자며 헤어졌다.
그리고 그날 시인은 길에 쓰러졌다. 술에 취해서였다.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실려간 천재 시인은 행려병자로 바뀌었다. 시인의 친구들이 그를 찾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들은 울면서 친구의 유고시집 <새>를 발간했다. 그의 죽음은 신문에도 실렸다. 병원장이 놀라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상병이 살아있다고..
목순옥은 매일 병문안을 갔다. 그녀의 뒷바라지 덕분에 시인의 몸무게는 40㎏에서 60㎏으로 불었다. 병원장이 그녀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글을 쓰고 못쓰고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면 어떨까요?”
1972년, 천상병과 목순옥은 부부가 되었다. 가진 것은 병과 가난 뿐인 남자, 그런 시인과의 결혼생활은 힘들었다. 그래도 아내는 좋았다. 특히 시인의 아내만 즐길 수 있는 특권에 마냥 기꺼워했다.
시인은 가끔 다 써놓은 시를 베게 옆에 가지런히 놓고 잠든 척 했다. 아내는 가장 먼저 시인의 글을 읽는 사람이 된 것이 너무 좋았다. 그녀는 시인에게 동생이고, 친구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동시에 스승이며 어머니였다.
1988년, 시인은 만성간경화증으로 고생했다. 친구가 의사로 있던 춘천의료원에 입원했다. 복수가 차서 배가 산처럼 불렀다. 친구인 정원석이 야단쳤다. "야, 이 놈아. 배가 왜 이리 불렀냐?" 시인이 받아쳤어요. "내가 임신을 했다, 임신을 했어." 일반인이라면 죽음을 앞두고 많이 두려웠을 텐데, 시인은 여전히 유쾌하였다.
아내는 병원에서 아침을 먹이고 서울로 돌아와 카페 문을 열었다. 일을 마치면 다시 춘천으로 향했다. 그녀는 춘천으로 가는 길에 차 안에서 매일 기도를 했다.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딱 5년만 살게 해달라고. 시인은 거짓말처럼 병을 털고 일어났다.
1993년 4월 28일, 시인은 5년만에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2007년, 아내 나이가 어느덧 72세가 되었다. 그녀는 추억을 먹고 산다. 매년 의정부 산청 등지에선 천상병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리고, 시비(詩碑)도 세워졌다. 그녀가 운영하는 인사동 작은 카페엔 여전히 남편친구와 팬들이 찾아왔다.
아내는 남편의 기념관을 세우고 억울하게 고문을 받은 간첩사건의 진실을 찾는데 여생을 보냈다. 그녀에게 의지했던 남편은 세상을 등지고도 아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목순옥씨는 말힌다. "제게 남겨진 일, 모두 마무리하고 저도 떠나야죠. 하늘에서 다시 만나면 큰 소리를 칠 거예요. 제가 다 처리하고 왔다고.” 그들 부부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은 여느 청춘의 사랑에 못지 않다.
2010년 8월 26일,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별세하였다. 남편의 그리움은 '시'가 되었고, 아내의 그리움은 아름다운 '별'이 되었다.
▶1986년서울대생 김세진군 신림4거리에서 분신자살(5월 3일 사망)
👉🏿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면서 김세진은 학생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84년 자연대 학생회 부학생회장이 되었고 86년에는 자연대 학생회 학생회장 및 서울대학교 단과대학 학생회장단 대표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김세진은 학생운동에 깊숙하게 빠져들었고, 반전운동과 반핵운동 등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이재호와 함께 반미시위에도 참여했는데 특히 전방입소훈련에 대한 반대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4월 28일로 시위날짜는 잡혔다. 김세진은 이 시위의 모든 책임을 지기로 했다. 그래서 주변의 운동권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일종의 '정리'를 했다.
4월 28일[1] 시너를 준비한[2] 그는 이재호와 함께 신림사거리 부근의 한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곧 400여명의 학생들이 전방입소를 반대하는 시위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진압을 위해 몰려왔다. 그러자 둘은 접근하지 말라며 시너를 몸에 뿌리고 경고했다. 허나 경찰이 무시하고 달려들자 결국 몸에 불을 질렀다.
그는 분신 후 한강성심병원으로 후송되어 입원했다. 소식을 들은 부모가 중환자실로 달려가니 몸은 온통 붕대로 감겨져 있었으며 새까맣게 탄지라 형체조차 알기 힘들었다. 그의 몸은 60% 이상이 3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의사는 "분신한 채로 구호를 외치며 팔을 강하게 흔들어서 그렇게 되었다"며 부모에게 일러주었다.김세진은 부모에게 미안하다고 한 후 곧바로 친구 이재호의 상태를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 날 밤 그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3일 오후 5시30분에 세상을 떠났다.
▶1986년서울대생 이재호군 신림동 4거리에서 분신자살(5월 26일 사망)
👉🏿 그가 사회현실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였다. 그 때가 바로 1980년이었고 그가 살던 광주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했다. 이재호는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5.18 당시의 광주를 겪어야 했다. 이후 그는 고등학교 공부를 마치고 1983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반미운동에 참여했다. 3월 경에는 '반전반핵 평화옹호투쟁위원회'에 참여해 위원장 직을 맡으며 반미 시위를 주도했다. 또 당시에는 대학생 2학년들을 대상으로 최전방 부대에 입소하여 군사훈련을 받는 '전방입소교육'이라는 교과 과정이 존재했는데,[2] 이재호는 이를 '미제의 용병 교육'이라고 규정하고 '전방입소훈련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전방입소거부특위)'의 부위원장의 직위로 전방입소교육 거부투쟁[3]에 나섰다. 전방입소거부특위는 4월 28일[4]에 서울대학교중앙도서관에서 농성을 벌일 계획이었지만, 학교 측은 이를 눈치채고 문을 닫아걸었다. 이에 서울대학교/연건캠퍼스 도서관으로 농성장소를 바꿨지만, 이 또한 경찰의 압력으로 27일 해산되었다.
1986년 4월 28일[5], 400여명의 학생이 신림도서관으로 모였고, 그는 김세진과 함께 근처의 건물 옥상에 올라가 유인물을 뿌리고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라고 외쳤다. 경찰들이 몰려와 학생들을 때리며 진압하자, 둘은 폭력진압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이 이를 무시하자 이들은 결국 분신했다. 이재호는 분신 직후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몸 전체 중 80%가 3도 화상을 입은 처참한 상태였다. 그는 1달 후인 5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1982년영국, 포클랜드 봉쇄 발표
▶1981년한국평생교육기구 창립
▶1981년국무회의, 노인-장애자 복지법안 결의
▶1980년아프리카 통일기구(OAL), 아프리카 공동시장 창설을 결의
▶1978년싱글러브 소장,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반대로 인책 퇴역
▶1976년보사부, 임신중절을 합법화하는 모건복지법안 결의
▶1976년그레나다의 에릭 매튜 게이리 수상 내한
▶1974년유진산 신민당 총재 사망
▶1973년전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 징역
▶1969년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 사임
👉🏿프랑스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샤를 드골이 1969년 4월 28일 사임했다. 이날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그가 제안한 지방자치제 개혁과 상원 개혁안을 52.42%의 국민들이 반대한 것이 사임 이유였다. 부결이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보장된 대통령직의 사임을 강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10여일전 한 TV인터뷰에서 "그의 제안이 국민투표에서 거부된다면 사임하겠다"는 공언이 그를 사임하게 했다.
상원의장 알랭포에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잠시 수행했으나 그해 6월 16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조르주 퐁피두가 프랑스 제5공화국의 두 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890년에 태어나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드골은 1차 대전 때 일선 장교로 참전했다 부상당해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2차 대전때는 기갑사단장, 국방차관직을 수행하다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자 런던으로 망명, 그곳에서 대독항전을 독려하며 레지스탕스를 조직했다.
1958년 6월 총리가 된 드골은 그 해 9월 28일 마침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킨 제5공화국을 발족시켰다. 1958년과 1965년 연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드골은 NATO 탈퇴 등 `위대한 프랑스`를 기치로 내걸며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섰고, 캐나다에서는 퀴벡의 독립을 부추겼다. 사임 1년뒤인 1970년 11월 9일 세상을 떠났다.
▶1969년현충사 중건 준공
▶1969년미군 전면 개혁
▶1967년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 징병 거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쏴라
가장 힘들었던 싸움은 첫 번째 아내와의 싸움이었다.
멋진 답이 떠로르지 않을 때는 침묵이 금이다.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도전하길 두려워하는 바, 나는 스스로를 믿는다.
무엇을 하든 최고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위험을 무릎 쓸 용기가 없으면 인생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상상력이 없는 자는 날개도 없다.
나는 훈련하는 모든 시간이 힘들지만, 나는 그때마다 말했다.
포기하지말라!! 지금은 고통이지만 나는 일생을 챔피언으로 살 것이다.
나는 챔피언이다. 나는 이긴다.
나는 위대하다! 나는 왕이다! 세상의 왕이다!
나는 세상은 놀라게 할 것이다.
자신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소망, 꿈 그리고 이상이 진짜 챔피언을 만든다.
▶1965년라만 말레이시아 수상 내한
▶1960년이기붕 일가 자살
▶1955년독립운동가 이창용 사망
▶1954년동남아시아 5개국 수상회의(콜롬보회의) 개최
▶1952년휴전회담 본회담 재개. 중립국 감시단 구성에 합의
▶1952년대일강화조약-미일안보조약 발효
▶1950년풀브라이트 한국장학재단(한미교육위원단 KAEC) 창립
▶1950년북한비행사 이건순 귀순
▶ 1947년 토르 헤이에르달의 뗏목 콘티키호, 페루의 카야오 항을 떠나 항해 시작
👉🏿 중세의 잉카제국에서 사용한 뗏목을 본뜬 콘티키(Kon-Tiki)호로 1947년 4월 28일 페루의 카야오항을 출발하여 같은 해 8월 7일 동폴리네시아 군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태평양의 아메리카 인디언 American Indians in the Pacific》(1952)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폴리네시아인이 동남 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는 종래의 학설에 대하여 폴리네시아 문화의 페루 발상설(發祥說)을 주장하였으며, 또한 폴리네시아인의 티키(Tiki 태양신) 숭배는 잉카의 신(新)콘티키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였다. 그 후 갈라파고스제도·이스터섬 등을 탐험 ·조사하였고, 1969년에는 고대 이집트인의 중남미 도항의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파피루스선(Papirus 船) 라(Ra)호로 모로코를 출발하여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였다.
콘티키호 [Kon-Tiki]
노르웨이 탐험가 T.헤위에르달이 잉카 시대의 제조법으로 만든 뗏목.
남태평양제도에 사는 폴리네시아인(人)의 기원을 조사하기 위해 헤위에르달(Thor Heyerdahl) 일행이 1947년 페루에서 폴리네시아의 라로이아 환초(環礁)로 가는 항해에 사용한 뗏목의 이름이다. 콘티키란 페루어로 ‘태양신’을 의미한다. 콘티키호는 바람과 해류를 따라 표류하여, 4월 28일~8월 7일까지 4,300해리(약 7,964 km)를 항해하였다. 뗏목의 바닥은 갈대로 엮었고 선실은 가벼운 대나무를 사용하였으며 돛을 달았다. 가벼운 선체로 인해 왠만한 파도에도 잘 견뎠으며 항해를 시작한지 97일 만에 폴리네시아 앙가타우 섬에 도착했다.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항해를 계속했고 100일만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헤위에르달의 항해목적은 남아메리카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섬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을 실증하는 것이었다. 이후 남아메리카의 문명이 태평양 여러 섬의 주민과 문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학설이 채택되었다.
▶1926년송학선, 제등(사이토) 조선총독 암살 미수
▶1924년잠비아의 초대 대통령 케네드 카운다 출생 - 잠비아 독립운동을 주도
▶1922년프랑스 대통령 폴 데샤넬 사망
▶1920년영친왕, 일왕족 마사코와 정략결혼
👉🏿 1920년 4월 28일, 조선조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이 일본 왕족 나시모토(梨宮)의 장녀 마사코(方子)와 일본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일제가 왕실규정을 고쳐가면서까지 둘의 결혼을 고집한 것은 양국간 잡혼(雜婚)을 통한 내선융합(內鮮融合)
정책 때문이었다.
고종과 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친왕 이은(李垠)은 조선조 마지막 왕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1900년에 영왕(英王)으로 봉해지고 1907년에 황태자로 책봉됐으나 그해 말 이토(伊藤) 조선 통감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가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왕세제로 격하됐다.
마사코는 원래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裕仁)의 비로 간택됐으나 임신불능 판정을 받아 조선 왕실의 절손(絶孫)을 노린 일제에 의해 조선 왕족의 세자비로 자리바꿈했다.
히로히토는 4년 뒤 마사코의 사촌인 나가코(良子)와 결혼한다.
영친왕이 결혼한 이날, 서울에서는 한 여인이 눈물짓고 있었다. 1904년에 영친왕의 비로 간택됐으나 일제의 회유와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1918년에 강제파혼당한 민갑완이라는 여인이었다. ‘왕세자의 약혼녀’로 정절을 지키던 민씨는 영친왕이 서거(1970년)한 뒤 못다 이룬 사랑의 한을 품고 1973년 쓸쓸히 생을 마쳤다.
영친왕의 정략 결혼은 1920년 3월 5일 창간 직후의 조선일보에도 뜻밖의 피해를 안겼다. 결혼식 날 조선일보는 영친왕의 결혼소식과 함께 민씨의 강제파혼 전말을 소개했는데 이 기사가 조선총독부 눈에 거슬려 압수됐던 것. 창간 50여일 만에 이뤄진,
일제 치하 조선일보 최초의 압수기사였다.
▶1916년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대각(大覺)`
▶1906년수학자 쿠르트 괴델 출생
▶1900년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 출생
▶ 1896년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출생
▶ 1894년 동학군 전주 점령
▶ 1886년 미국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튼, 여성교육기관 설립
▶ 1886년 독일의 사진작가 잘로몬 출생
▶ 1884년 한-영 수호통상조약 비준서 교환
▶ 1876년 영국 의회,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황제 칭호를 줌
▶ 1871년 대원군 전국 서원 철폐
▶ 1813년 러시아의 장군 미하일 쿠투조프(Kutuzov, Mikhail) 사망
쿠투조프 [Kutuzov, Mikhail Illarionovich, 1745.9.16~1813.4.28] 러시아의 군사령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1812)을 격퇴했다(→ 나폴레옹 전쟁). 14세 때 하사로 러시아군에 입대해 폴란드(1764~69) 및 투르크(1770~74)와의 전쟁에서 전투경험을 쌓았다. 크림에서 6년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 밑에서 복무하면서 전략과 전술을 배우고 1784년에는 소장이 되었다. 1774년 심한 머리 부상을 입고 한쪽 눈을 잃었지만 1787~91년의 러시아 - 투르크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이 전쟁 이후 여러 가지 외교·행정직을 맡았으나 1802년 불신을 받게 되자 고향으로 은퇴했다. 그러나 3년 후 러시아가 나폴레옹에 대항한 제3차 동맹에 가담하면서 알렉산드르 1세는 그를 다시 불렀다. 1805년 11월 11일 뒤렌슈타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나 알렉산드르의 압력으로 아우스터리츠 전투(12. 2)에 가담해 참패를 당하고 사령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곧 그를 몰다비아 주둔군 사령관으로 복귀시켰다. 투르크에 몇 차례 패배를 안겨준 뒤 1812년 5월 28일에는 러시아측에 유리한 조건으로 러시아 - 투르크 평화협정을 체결했다(부던레부쿠레슈티 조약).
6월에 나폴레옹군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8월 9일 당시 육군원수였던 그는 전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다음날 공작작위를 받았다. 그는 러시아 군사력을 아껴두기로 결심하고 프랑스군 앞에서는 후퇴하면서 소규모 전투만 치르면서 전투를 제한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지만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9월 7일 보로디노에서 큰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전투는 우열을 가릴 수 없었으나 쿠투조프는 병력의 반 이상을 잃고 남동쪽으로 후퇴, 결국 프랑스군의 모스크바 입성을 허락했다(→ 보로디노 전투). 그러나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협상하는 데 실패하고,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나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에 10월에 모스크바를 떠났다. 쿠투조프는 나폴레옹군이 비옥한 남쪽 행로로 가지 못하게 차단했고(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10. 24), 와해 지경에 있던 프랑스군을 침입 당시 그들이 폐허로 만들었던 길로 도주하게 함으로써 큰 전투를 치르지 않고 적을 몰락시켰다. 나폴레옹군이 베레지나 강을 건넌 뒤(11. 26~28) 그는 폴란드와 프로이센까지 추격해들어갔고 프로이센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1758년 제임스 먼로 미국 대통령 출생
▶ 1686년 뉴튼, 만유인력 법칙 발표
▶ 1545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 출생
▶ 1467년 원각사 13층탑 완성
▶ 1406년 덕수궁 준공(태종 6년)
https://youtu.be/szAexFqgR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