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의 창설자요 고아들의 자부(慈父)인 성 예로니모는 1481년 이딸리아 베네치아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을 여윈 후는 모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중지하고 군대에 입대하였다.
1511년 국경선에 위치한 퀘르의 까스뗄 누오보 성이 적의 침략을 받자 성주는 도망치고 그가 성을 사수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이 방어전에 패하여 성은 함락되고 그는 적군의 포로가 되고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유폐되었다. 인간적인 모든 희망이 사라지자 비로소 자신의 생애를 반성하게 되었고, 자유로운 몸이 된다면 새로운 삶을 살겠노라고 약속드리면서 성모님께 열심히 기도하였다. 간청이 이루어져 기적적으로 탈주하게 된 그는 트레비소 시에 있는 성모상 앞에, 손발에 채워졌던 수갑과 쇠사슬을 바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벌써 과거와는 다른 사람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전투욕에 불탔던 그는 이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었다.
전쟁도 끝나고 그는 후에 까스뗄 누오보 성의 성주가 되었으나 이미 세속의 부귀영화와 명예는 그의 안중에 없었다. 1528년 경북 이딸리아는 대흉년으로 굶어 죽는 이가 속출하였고 부모를 앓은 어린이들의 부랑 생활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성주라는 지위를 버리고 구제 사업에 헌신하였다. 즉 어려운 자를 돕고 병든 자를 간호하며 임종자를 위로해 주었다. 특히 부랑 고아들을 위하여 고아원을 세우고 이들의 종교 교육과 사회 및 기술 교육을 하였으며 문답식으로 된 가톨릭 교리도 가르쳤다. 많은 유지들의 협조로 그의 사업은 파도바 베로나, 꼬모, 밀라노, 베르가모까지 확대되었다.
그의 빛나는 덕을 본받아 많은 추종자들이 생기자 이 사업을 위해 “가난한 이들의 종”이란 회를 창립하였다. 후에 그 본부 소재지 이름을 따서 “소마스카 회”로 부르게 되었으며 1568년 비오 5세에 의해 공식 수도 단체로 승인되었다.
그 후 수도회가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혔을 때 그는 산속에 들어가 오로지 기도와 보속으로 수덕에 힘썼다. 그의 영성은 자선을 통한 사랑과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고아들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에 대한 신심 및 호수 천사에 대한 신심이었다. 그가 제자들을 떠나 은둔 생활을 자청한 것은 제자들이 하느님만을 더욱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이보다 당신만을 더욱 신뢰하기를 원하시며, 당신께만 온갖 신뢰와 기대를 두는 자에게 당신 사랑을 충만히 주시고 그들 안에서 놀라운 업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1537년 베르가모에 퍼진 무서운 전염병 페스트로 말미암아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자비심을 가진 그는 이를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은둔 생활을 포기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내려온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옷에 입맞추며 강복받길 원했다. 세상의 명예를 피해 은둔했었던 겸손한 창시자는 이렇게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산에서 내려온 그는 침식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환자들의 간호에만 열중하다가 급기야는 자신도 그 병에 감염되어 1537년 2월 8일 하느님 나라로 가게 되니, 그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1747년 베네딕또 l4세에 의해 시복되고 1767년 7월 16일 끌레멘스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편으로 1928년 3월 14일 비오 11세에 의해 고아와 무의탁 청소년의 온 세상 주보 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축일은 2월 8일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글...경향잡지,배문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