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동참하고 그 생명을 섭취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궁극이며 하나님의 작정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깨우치지 못해 육체의 선의 의지를 사용하는 율법적인 신앙이나 자의적인 선행에 머물러 있습니다. 에덴에서 부터 먹는 것이 죄와 연관이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보통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죄요, 하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죄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을 먹으면 죄요, 먹으라고 하는 것을 먹지 않으면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죄인들이 거듭나게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먹으라고 하신 그리스도를 먹으므로 다시 살고 의롭게 됩니다. 그게 바로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게 되는 길입니다.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먹고 죽은 죄인은 먹으라고 한 그리스도를 먹으므로 의롭게 되고 다시 살아 그 분과 같은 영생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5장은 주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말씀합니다. 38년 된 환자가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일어납니다.(요 5:8-9)
이 사건은 여러분들이 거듭나서 계시가 있는 신앙인가 아닌가를 점검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만약 이 병자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아직 거듭남과 주의 말씀에 의한 계시가 없는 분입니다.
반면에 38년을 물이 끓는 표적을 기다리고 다른 사람이 물에 넣어 주기를 바라고, 또 사람들 때문에 자신이 먼저 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푸념을 하며 자포자기 상태로 드러누워 있는 사람에게 주의 말씀이 임하니 그 말씀에 의해 그 환자가 일어나서 걷게 되었구나 하는 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거의 죽은 자와 다름없는 이 환자에게 주의 말씀이 임하니 그 환자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듯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이 죽은 자들에게 임할 때에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주의 말씀에 무덤에 있는 송장들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먹지 말아야 할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고 죄를 지어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납니다.(요 5:25)
이게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니 하나님의 그를 의롭다 하신 것과 같은 믿음의 맥락입니다(롬 4:3) 또 다윗이 불법을 사함 받고 그의 죄가 가리어진 것도 하나님의 제사의 제물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되어진 사건입니다.(롬 4:6-8)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한 말씀이 있는데 그건 롬4:25절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말씀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예수를 믿고 의를 얻는다는 말은 바로 그 분이 이룩하신 이 대속의 역사를 믿는 것입니다. 그 살아계신 주께서 우리에게 내가 네 죄를 위하여 죽었다. 그리고 네 안에 내가 있고 넌 내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아멘’하고 믿어집니다. 그게 바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신다, 나는 의롭게 되었다,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시인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소급적용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믿는 순간에 그 동안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그 경륜을 따라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룩하신 은총이 한꺼번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단 번에 몽땅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주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신 사실을 믿으면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창조와 구속과 의롭게 하심과 영화롭게 하신 구원의 은총입니다. 이와 같은 구원의 은총은 주의 말씀을 들으므로 얻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믿으므로 성령의 인침을 받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행위조차 필요 없는 오직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안에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사는데 까지는 아무런 우리의 수고나 공로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5장은 주의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말씀인데 요6장은 살았으니 이제부터 나를 먹으라, 입니다. 사는 것 까지는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산 자가 주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먹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기도문에 의해 ‘오늘 날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그 양식을 먹는 훈련을 반복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먹는다고 하는데 사실은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겁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을 섭취하는 것입니다. 그 먹는 만큼 주님을 닮아가고 그 먹는 만큼 주님의 성분이 나타납니다. 양식이 체질을 바꾼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는 것 까지는 철저히 피동이지만 일단 태어난 순간부터는 반응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젖을 물리면 젖을 빨아야 하고 우유병을 대면 꼭지를 빨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곧 하나님께로 난 자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 생명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십니다. 주님을 받아들여 그 분과 더불어 먹고 마십니다.(계 3:20) 사람의 몸도 양식과 물이 아니면 어찌 자라나며 먹지 않고 어떻게 신진대사가 이루어져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아직 성경공부를 한답시고 지식을 좇고 있다면 자의적은 선행이나 친절과 상냥한 말씨까지는 연습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 곧 그리스도의 성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먹지 않곤 체질을 바꿀 수 없고 먹지 않고는 그 분처럼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밥과 지식의 힘으로 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먹으며 사신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령으로 기도하시고 성령으로 병과 죽은 자를 고치시고 성령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성경기자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성령에 의해 태어나시고 성령에 의해 죽으시고 성령의 의해 다시 사시고 성령의 의해 승천하시고 성령의 의해 우리 안에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신이 살았다는 확신이 서 있다면 이젠 그리스도를 많이 잡수세요. 묵상을 많이 하세요. 주님의 성찬을 날마다 시간마다 마음속에 두고 먹으세요. 우리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대속으로 살리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산 떡이 되시고 생명의 음료가 되십니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가정과 사회와 한국교회를 변화시키는 비결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핏대를 올리는 일이 아니라 주님을 먹는 일입니다.
주님의 행적을 믿고 따르면 내가 살았다는 인식과 함께 의가 나타나고 그 분을 먹고 마시면 내가 변화가 됩니다. 나도 모르게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섬김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먹으면 주님과 같이 살고 주님에 의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를 먹는 일, 주를 마시는 일을 사모하십시오. 육신도 먹고 살고 무병장수하는 것이 싸움입니다. 마귀는 항상 선악의 지식의 열매를 향하도록 합니다. 생명과로 가는 길을 가립니다. 지금도 마귀의 후예들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가르쳐 자신들의 교회나 사역에 맞는 제자(?)를 만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양식을 제시합니다. 형이상학입니다. 허공에 떤 구름을 잡는 이야깁니다. 그렇지만 진리의 성령께서 그 길을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십니다. 선악의 지식, 자신을 달아보고 남을 달아보는 지식의 저울에서 자신을 그리스도 화시키는 생명의 양식으로 나아가는 길은 마귀와 그 후예들과 큰 싸움이 있다는 사실을 꼭 유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