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4:11~19)
‘그들의 마실 것이 다 떨어졌지만
그들은 계속해 음란한 짓을 한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수치스러운 짓을
사랑하고 있다.
바람이 그의 날개로 그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그들이 바친 희생제물 때문에
그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다.’(18~19절)
단순한 접근법으로는
계속해서 설득하고, 말을 건네고,
위험을 경고하고, 호소하는 것이
상대방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음행과 우상을 놓지 않는
북이스라엘을 내버려 둔다.
위에서 발췌한 본문처럼,
그들을 쓸어버릴 것을 예언하신다.
쓸어버려지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이다.
어떤 악함의 정도는
설득, 경고, 호소가 통하지 않는다.
그 때는 어쩔 수 없다.
바닥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악행에 대한 합당한 보응이다.
한치도 허술함이 없는 원리가
우주에 살아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톱니바퀴가
오차 없이 돌 듯
매정하고 건조하게 여겨지지만
이런 원리의 배후에는
결국 그 보응의 시간을 지나서
비뚤어지고 어그러진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창조의 원리로
회복되는 정상화 과정이 있고
다시 생명이 움트게 하려는 뜻이 있다.
그 일체의 과정은 ‘사랑’이 동력이다.
다만,
그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도
끝끝내 하나님의 품을 거부하는 이에게는
영원히 회복의 기회가 사라질 순간이 도래한다.
북이스라엘의 당대 사람들 중에 많은 이가
그 궁극적 불행에 포함될 것이다.
그 불행한 결말을 반면교사로
후대의 또 많은 이들은 회개와 회심을 선택할 것이다.
나와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하는 인생이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기를 소원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아야만
얕은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오늘 주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을 기대하게 된다.
매주 그랬듯이.
빈 마음, 가난한 마음, 겸손의 마음을 놓지 않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행복에 겨운 나날입니다.
영원을 염두하며 현재에 충실하게 하소서.
영원을 염두할 때 닥칠 수 있는 불확실하거나
불행할 수 있는 미래를 한 점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정민이가 집에 왔는데
함께 드리는 예배에서 은혜를 누리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수도통합병원에 있는 정환이도 같은 주일의 은혜를
누리게 해 주십시오.
엄마가 몸이 자주 불편합니다.
엄마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평안함과 견뎌낼 힘을 주십시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