浩然之氣와 용렬한 마음
사람은 身分 이라는 게 있다.
불교 공부를 뒤바꾸어 공부해 놓으면 신분도 없고
또한 신분에 걸릴 것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생각이야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생각은 떠돌아다니는 것 이여서
智慧가 결여된 생각은 믿을 수가 없어서
하나의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서로 간에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信을 基本으로 해야 그 대화는 가능하다.
서로 간의 대화 중에 이 信이 배제 되어 버리면
말은 휘날리며 잡다함으로 변하여 지게 돼
말의 공해가 되면
인간과 인간의 생활 속에 不信만 더한 결과를 남긴다.
특히나 인터넷상에서 상대의 신분을
전혀 알 수 없는 곳에서는 자기표현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 낼 수 있어 좋은 점도 있지만
사람 안에 있는 信 의 德을 일으키는 데는
지극히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허수아비와 같은 소박한 작은 신분이라도
서로 알고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최소한의 근신하는 마음이 따를 수 있어서
자신의 깊은 내면에 있는 信의 덕을 저버리지 않을 수가 있다.
옛 어른들의 교훈을 가져와 보면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앉아 있더라도
귀한 손님하고 같이 있는 것처럼 해야 된다고 "
마음의 방일함을 경계 하는 뜻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홀로 있어도 그러 할진데
서로 간에 대화에 있어 서랴!
혹자는 시대가 컴퓨터 시대인데
여러 이론스러운 말로 위로할 수도 있지만
이 세상은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이지 ......
결코 사람 떠나있는 세상은 유령의 세상일 뿐이다.
유령은 없는 것을 있다고 믿어서
혼란에 빠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느 곳 어떤 때라도 이 믿음
곧 "信 "은 근본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람 안에는 5德이 있다.
仁 .義, 禮 .智 .信.이 조화로워 떳떳할 때 중용을 이룬다.
이 5德 중에 信 은 나머지 4덕을
한곳으로 모이게 하는 덕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역에서도 비, 위장을 중앙 오십 土 라고 한다.)
이 土 가 信을 의미한다.
이 흙은 땅에 있으며 만물을 길러내는 성질을 갖추고 있다.
이 中庸을 의지해 있을 때라야 호연지기가 나오는 것이다.
가끔 이런 창에서 일어나는 일 들을 보면
떳떳함과 용렬함을 구별 못 하는 사람을 본다.
신분도 노출되지도 않고 익명의 얼굴 없는 곳 이여서
쉽게 그런 용렬함에 빠질 수가 있다.
이 용렬함은 信의 뿌리를 잃고 나온 것 이여서 中을 상실했다.
이런 것은 정신건강에 지극히 해롭다.
자기 자신을 허탈 한 곳으로 인도하는 결과만 온다.
이런 살아 있는 사람이 안 보이는
인터넷 창속에서 유령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일찍이 있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접하거나 이미 중독 증상이 있는 사람들은
심히 경계해야 할 새로운 문명병이라고 본다.
그 결과로 일반 신문 일간지에
인터넷 앞에서 "폐인들" 이라는 기사가 등장하고 있다.
이런 곳에서 좋은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편리 하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채팅이나 인터넷에서의
법거량 같은 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 되기 쉬우며
상호간에 작은 믿음마저도 바닥나게 해버리는 결과만 초래 한다.
불교는 어느 한 쪽으로 의식을 개발하는 공부가 아니다.
무명으로 가려버린 지혜를 경험하는 공부이다.
이 意識 이라는 것은 무명에 속해 있는 識 작용중의 하나이다.
智慧 하고는 영판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창에서의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느 곳 보다도 身分은 서로 나눔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기계화된 문명 속에서도
그나마 최소한의 도움은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육조사 玄雄스님
출처: 무진장 -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