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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시편68편1~10절
제목 :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출애굽 이후 광야의 여정을 회고하며 이스라엘을 찬양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면 악인은 흩어지고 의인은 기뻐하며 가난한 자는 흡족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기뻐하며 높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3절 하나님의 일어나심
4~6절 하나님이 함께하심
7~10절 하나님이 행진하심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역적의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이 일어나시니(1~3절)-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1)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합니다(1절)
“[1]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본시는 다윗이 전쟁에서의 승리, 혹은 위기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을 체험한 후 이러한 역사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를 앞세워 진군하기 시작하던 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와 동일합니다(민 10:35).
*민10:35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따라서 본기도도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와 함께 암몬 족속과 싸우기 위하여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 드려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때 이러한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원수들과 싸워 주시기를 소원하였습니다.
특히 다윗은 군사적인 행동 혹은 중대한 행동을 취하기에 앞선 마음의 결단(삼하 18:32;렘 49:14)을 촉구하는 표현인 '일어나사'를 사용하여, 원수들을 진멸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적 개입이 속히 있어야함을 기원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소원을 아뢰는 단순한 기도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시편의 대개의 기도 속에는 그 기도들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저자들의 강한 확신이 담겨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편, '원수'(오예바이우)는 문자적으로 '그분의 원수들'입니다.
사실 이 원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던 암몬족속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곧 하나님의 원수들이라는 사실은 우리 성도들에게 대단한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이 핍박을 받을 때 마치 당신이 핍박받으시는 것으로 간주하시어(행9:4) 그들에게 중한 보응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9:4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2) 악한 원수들에 대한 징벌을 재촉하는 기도입니다(2절).
“[2]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1) 연기가 몰려감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연기'는 바람에 의해서 신속히, 그리고 용이하게 이리저리 흩어지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37:20;102:3;호13:3참조).
(2) 불 앞에서 밀이 녹음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 상반절과 동일한 뜻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밀'(도나그)은 그 어원이 불확실한 단어로서 양초의 원료인 파라핀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이것은 섭씨 50도가 용해점(溶解點)인 만큼 불에 조금만 가까이 대기만 해도 즉시 녹아내리며 심지어는 웬만큼 뜨거운 물에 집어넣어도 완전히 녹아 없어집니다(97:5;미1:4 참조).
이처럼 그 원수들은 인간적 안목으로 보면 막강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는 지극히 연약하고 하찮은 존재인 것입니다.
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3절)
“[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의인들의 이 같은 반응은 악인들이 멸망당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의인들은,
(1) 자신들이 악인의 위험에서 구원받았으며,
(2)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벌하시고 선한 자들을 구원하심으로써 공의를 밝히 드러내셨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실, 크나큰 환난이나 위경에 직면해 있는 동안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악
인들의 준동(蠢動)을 모른 체 하신다고 생각하여 낙심에 이를 뻔했을 것입니다(73:2, 3).
그러나 드디어 악인들이 징벌 당하자, 의인들은 그분의 살아계심과 공의로우심을 확인하면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52:6;58:10;64:7-10).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 '뛰놀며'(알라츠)는 원래 '기뻐 날뛰다'의 뜻으로서 대개 승리로 인한 기쁨 혹은 그 기쁨의 외부적 표출 행위를 가리킵니다(25:2).
그리고 '앞에서'(리프네)는 '얼굴을 향하여', '얼굴 쪽으로'의 뜻으로서,
'얼굴로부터'라는 의미인 2절의 '앞에서'(미프네)와는 반대의 뜻입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거룩한 용사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인에게 심판을 주시는 심판의 하나님을 묘사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의인은 단순히 악인의 반대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들을 지칭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기뻐하는 자들을 돌보아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심판이 의인에게 소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의인에게 하나님의 일어남은 희망이며,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어나심을 통해 운명은 역전되는 것입니다.
시61:3을 보면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시는 바꾸시는 분이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어떠한 부분에서 낙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역전의 하나님,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사 슬픔을 찬양으로 반듯이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시니(4~6절)-하나님은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4절)
“[4]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 여기서 '광야'(아라보트)는 암몬 족속의 용병(傭兵)이었던 아람 사람들이 진을 쳤던 모압의 초원 지대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습니다(삼하 10:8, Keil).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마치 마차나 병거를 타고서 당신의 백성들 대신 그 원수들과 싸우기 위하여 백성들보다 앞서 나아가시는 것을 연상시킵니다(Keil).
그러나 '아라보트'를 '하늘' 혹은 '구름'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특히 33절과의 병행 관계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Kidner).
하나님께서는 하늘 병거를 타시고 당신의 백성에게는 보호와 축복을,
그리고 그 대적들에게는 징벌과 저주를 내리기 위해 두루 다니시는 분으로 묘사된 적이 종종 있습니다(18:10;104:3).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 '여호와'는 '스스로 계신 자',혹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을 나타냅니다(출 3:14).
그러므로 이는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 의해서 조작된 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우월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분만이 인간의 궁극적 신뢰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본문은 '그의 이름은 여호와 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는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겠습니다(Anderson).
2)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십니다(5절).
“[5]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은 악행자들을 바람이 연기를 흩뜨리듯이 진멸시키시지만(2절),
억울하게 압제 당하는 사죄적 약자들은 보호하십니다.
우가릿 문서(예컨대, '케레트의 전설'이나 '아카트의 이야기' 등)에도 과부와 고아를 보호하는 것은 이상적인 왕에게 부여된 특별한 임무로 나와 있습니다.
성경 역시 고아와 과부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의 대상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10:14;신 10:18;사1:17;약 1:27등).
이는 사람의 외모를 따라 부한 자와 높은 자를 더 중시하고 비천한 자들은 멸시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경향과 너무나도 대조됩니다.
3)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십니다(6절)
“[6]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1)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고독한 자'(예히딤)에 대해서는 신부를 맞을 지참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Albright).
그러나 그보다는 어떤 이유로 인해 자신을 의탁할 가족이나 친족도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무난합니다.
아마 이들 역시 고아나 과부처럼 공동체내에서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2)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수금된자'는 감옥 생활(창 39:20) 및 포로 생활을 하는자(69:33;사 14:17;애 3:34;슥 9:11)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어쨌든 본문은 이들이 부자유스러운 상황속에서 고역과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보호로 말미암아 예전의 자유와 번영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형통하게 하시느니라'(바코솨로트)는 '정당하고 적절하다' 혹은 '번영하다'를 뜻하는 동사 '카쉐르'에서 파생된 명사 '코솨라'와 '함께'로 번역될 수 있는 전치사 '베'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3)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거역하는 자'(소라림)는 '완고하다' 혹은 '반항적이다'를 뜻하는 동사 '사라르'에서 파생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제 고집대로 행하는 자를 가리킵니다(사 65:2;렘 5:23;슥 7:11).
그리고 '메마른땅'(체히하)은 '눈부시다'를 뜻하는동사 '차하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지극히 건조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는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입니다.
그렇다면 본 문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완고한 사람은 사막과 같은 불모지(不毛地)에서 죽음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민14:29-35).
*4~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말합니다.
고아와 과부는 대표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돕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어려워서 돕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려움과 고통에 있으면서도 복음을 기다리기 때문에 돕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를 외면치 않으십니다.
반듯이 돌아보시고, 찾아가 주십니다.
세상은 강한자에게 주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인내하는 자를 찾습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듯이 건지십니다.
뿐만 아니라 악인들의 형편을 초라하게 만들 것입니다.
3. 하나님이 행진하시니(7~10절)-예비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인도하신 일을 회고하고있습니다(7절).
“[7]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 (셀라)”
앞서 나가사. -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언약궤(레 16:2)가 가나안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선두에 위치했던 사실(민 10:33)을 상기시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서 나아가시면서,
그들을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고(출13:21, 22),
또한 원수들을 물리치신 사실도 아울러 연관됩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십자가 군병들인 당신의 백성들의 앞에 서서 우리를 대신하여 용감하게 싸우며 나아가시는 일선 사령관이시므로(수 5:13-15),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믿음의 행진을 담대히 계속할 수 있습니다(딤후 4:7).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광야(예쉬몬). 지극히 부적절한 자연적 조건으로 인하여 사람이 전혀 살 수 없는 곳을 가리킵니다(신 32:10).
기자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보고 있던 '광야'의 황량함과 하나님이 인도하신 이후의 축복된 상태를 날카롭게 대조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Keil).
1)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어지며 시내 산도 진동합니다(8절)
“[8]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1)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기 위해 시내 산에 임재하셨을 때에 나타났던 현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출 19:16-25).
그런데 '하늘이...떨어지며'는 어두운 천둥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시내산을 덮은 것을 가리킵니다(신 5:22).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저 시내산'은 원어상
(1)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저 시내산'
(2) '시내산 자체'(even Sinai itself, KJV),
(3) '시내산의 그분'(the One of Sinai, NIV)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중 (3)의 번역은 '저 시내 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이해한 것이며 '시내 산의 주님'이라는 의미로 파악한 것입니다(Albright).
이스라엘의 하나님. - '시내 산의 하나님'이 계시 수여와 주로 연관된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관계를 맺으셨던 사실을 상기시키는 이름입니다(VanGemeren).
2) 하나님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기업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9절)
“[9] 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 이에 대해서는
(1)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에 들어가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농사를 위한 비를 풍족히 내리셨던 사실을 가리킨다는 해석(Calvin, Keil,박윤선), (2)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던 일을 가리킨다는 해석(Rawlinson, C.B. Moll) 등의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 11절 내용이 주로 출애굽 직후 광야에서 있었던 일이므로 본절도 광야에서 받은 축복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자연스러우며,
둘째, 출애굽기 등은 만나를 '비'로 말하고 있다(78:23, 24;출 16:4)는 점을 미루어 볼 때, (2)의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습니다.
한편, '흡족한'(네다보트)의 어근인 '나다브'는 '자원하다' 혹은 '즐거이 드리다'(출 35:21 대상 29:9)의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근거한 아낌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낌없이 내려주신 만나를 먹고 배부르기에 충분하였습니다(출16:12).
주의 기업이 곤핍(困乏)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주의 산업'(나할라트카)은 '나누다'나 '차지하다' 혹은 '상속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나할'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여기서는 '주님에 의해서 차지된 백성'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백성 곧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신7:6).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산업'혹은 '기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쉽게 발견됩니다(출34:9;신4:20;9:26,29;왕하 21;14).
한편, '곤핍할때에'(닐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회로한 상태를 가리키는 동사 '라아'의 수동형으로서, 주변 여건 혹은 환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하게 지쳐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잠 26:15;사 16:12).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먼 길을 걸었고 또한 먹지 못하여 극도로 지친 상태에 있었습니다.
또한 '견고하게 하셨고'(아타 코난타)는 문자적으로 '당신께서 견고하게 하셨고'입니다.
이처럼 본 문구에는, 동사에 이미 2인칭 단수 주어 어미(語尾)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별도로 2인칭 단수 인칭대명사 '아타'가 있습니다.
이것은 '견고하게 하신' 행동의 행위 주체자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한편, '견고하게 하셨고'의 기본형인 '쿤'은 '준비하다' 혹은 '세우다'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 튼튼히하고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신 일을 가리킵니다(Keil, NIV).
3)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10절)
“[10]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주의 회중(會衆)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 '주의 회중'(하야트카)의 '회중'(하야)은 '살다' 혹은 '강하게 되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 '하야이'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살아있는 것', '사람들' 혹은 '군대'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삼하 23:11에서 처럼 '군대'보다는, 차라리 보다 일반적인 의미인 '무리', '집단'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Keil).
한편, '그 가운데'(바)는 문자적으로 '그녀의 가운데'의 뜻이며, '그녀'가 지칭하는 바에 대해서는 가나안 땅과 광야 중 하나를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만일 '주의 산업'(9절)이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면,
여기의 '그녀'는 틀림없이 '가나안 땅'일 것입니다.
하지만 9절 주석에서 이미 '주의 산업'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고 '가나안 땅'이 아님을 확인했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그 가운데'는 '광야 가운데'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7절).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핍하였던 곳(9절)입니다.
그리고 '거하게 하셨나이다'(야쉬부)는 '쉬다' 혹은 '거주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본 문구는 걷기만 하고 먹지 못하여 곤핍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양식을 공급받은 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쉬다'의 뜻을 갖는다고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만 하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마 11:28-30).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 '가난한 자'(아니)는
'괴롭히다', '자기를 낮추다' 혹은 '억지로...을 시키다'의 뜻이 있는 동사 '아나'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1) '압제당하는 자'(욥 36:6;사 49:13),
(2)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가난한 자'(신 24:14, 15),
(3) '겸손한 자'(잠16:19),
(4) '피곤한 자'(습3:12) 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핍'했었음을 말하는 9절에 근거해 볼 때, (4)의 뜻이 가장 합당한 듯합니다.
한편 '준비하셨나이다'(타킨)는 9절 후미의 '견고하게 하셨고'와 어근이 동일하다.
본시의 기자가 이같이 동일한 동사를 사용한 까닭은 동일한 내용을 언어 유희(wordplay)적 표현으로써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7~10을 보면 하나님의 인도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특시 9절 말씀에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께서라는 표현은 바라 당신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당신이 나를 인도 했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오늘 두려움이 있다면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앞서 걸으십니다.
내가 처음 걸는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걸으시는 길입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담대히 믿음으로 살아내는 모든 성도님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하나님이 거룩한 용사로 일어나시면 의인과 악인의 운명은 역전될 것입니다(1~3절).
그분의 일어나심은 악인에게는 심판이요 의인에게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바람 앞의 연기처럼, 불 앞의 양초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춤을 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내 사정이 기막히지라도 하나님마저 무력하고 무정한 분으로 만들지 맙시다.
오늘의 신음을 내일의 찬양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기대합시다.
2) 이스라엘을 바로의 압제에서 건지고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입니다(4~6a).
기댈 곳 없고 힘도 없는, 압제받는 이들의 편에 서십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신 것도, 구름 타고 거침없이 광야를 행진하시는 것도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강자와 승자만이 살아남는 전쟁터로 우리를 몰아가는 이 세상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약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불의와 악한 구조에 저항하여 그들의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 까요?
3) 메마른 땅을 악인들의 거처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6b절).
순종을 거부하다가 광야에서 죽은 자들처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들먹거리던 자들은 거친 광야가 그들의 거처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선망의 자리라 해도 결국 그곳은 생기도 온기도 없는 황량한 땅일 뿐입니다.
4) 하나님이 거룩한 용사로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서서 나아가실 때, 땅은 진동하고 하늘은 폭우를 내렸습니다(7~10절).
흡족한 비로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풍족한 양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셨습니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세심히 살피고 인도하셨습니다.
어떤 열악한 상황이나 조건도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도구로 만드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현재의 암담한 형편도 능히 구원의 현장으로 바꾸실 것을 믿읍시다.
올 한 해도 두둑한 소유에서 안전을 찾지 말고, 우리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