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22:29-40, 변장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변경할 수없다.
한국교회는 숫자에 민감합니다. 숫자로 각종 기준을 삼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봅니다.
조금이라도 큰 교회다니면 큰 신앙이라는 환각증세를 보입니다. 그래서 진리도 숫자에 영향을 받습니다. 숫자가 적은 것은 가치도 적다는 인식이 다수입니다. 한국교회는 숫자가 진리입니다. 자본주의가 피와 살이 되어있기에 바꾸기가 쉽지않습니다. 그래서 쇠퇴기를 서서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성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합과 여호사밧은 아람의 길르앗 라못을 가져오는 전쟁에 동맹을 맺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묻습니다. 아합은 400명의 거짓 선지자를 부릅니다. 이들은 전쟁에서 승리할것이니 참여할것을 독려합니다. 그러나 아합이 미워하는 참 선지자인 미가야는 다른 목소리를 냅니다.
전쟁은 패하고 왕은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이에 아합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물을 먹이게 합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것은 아합과 백성들에게 선포합니다.
아합과 여호사밧은 400명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찜찜하니까 아합에게 전쟁에 나갈 때 변장하자고 작전을 세웁니다. 이 작전은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아람군대는 아합을 죽이고자 모든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변장한 아합을 찾지 못하고 여호사밧을 아합으로 오인합니다. 그런데 아람의 한 병사가 무심코 쏜 화살에 변장한 아합이 맞고 전사합니다.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입니다.
아합이 죽자 병사들을 흩어집니다. 죽은 아합은 사마리아에서 장례를 치릅니다. 그리고 아합의 피가 묻은 병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사마리아 연못에서 씻습니다. 그러자 개들이 그의 피를 핥습니다(왕상21:19).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욕망의 장소인 길르앗 라못에서 이뤄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였던 아합의 최후는 참으로 처참합니다. 변장했다고 주님의 계획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그 길을 인도합니다. 말씀을 순종함이 사는 길입니다. 주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죄의 경향성은 진리를 따르지 않고 욕망을 따릅니다. 죄는 죽어야 끝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자본과 숫자가 아니라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말씀대로 심판의 자리에 이른 아합을 기억하면서 믿음의 길에 서는 것이 얼마나 종요한지 다시 고백합니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