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대 학생이 2008년 2학기에 '인간의 삶과 죽음' 강의를 들으면서 제출한 레포트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수업을 접하기 전까지, 「자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죽음」이라는 책을 읽기 전까지 나에게 있어 ‘자살’ 이라는 것은, 자신이 원한다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 했었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살을 하고 싶다는 충동만 8차례 이상이나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자살은 해서도 안되고, 생각조차 해도 안되는 비인간적인 선택이라는 이미지로 굳혀져 버렸다. 오진탁 교수님의 강의'인간의 삶과 죽음', 교수님의 저서 「자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죽음」,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 이다.
11월6일 새벽, 한밤중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었다. 나는 ‘알람이 잘못울렸나’ 라고 생각하며 잠결에 핸드폰을 그냥 꺼버렸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있고 있었다. 그 다음날 11월 7일 연락이 뜸했던 고등학교 친구에게 전화가 왔었다. ‘웬일로 전화를 다했지?’ 라는 생각과 함께 전화를 받고 나의 표정은 한순간 굳어져 버렸다.
○○가 11월 6일 새벽 15층 높이의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을 했다는 소식 이였다. 불과 1주전에 단둘이 만나 술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그리고 다음에 만날 약속까지 잡아놨었는데...멍한 상황에서 자취방으로 내려가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집인 원주로 향했다.
원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친구와 있었던 지난날의 추억과, 일주일 전에 만나 가졌던 술자리에서 했던 이야기와, 그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스쳐갔다. 그런 상황 속에서, 문뜩 11월6일 새벽에 알람이 울렸던 그 상황이 떠올라 통화목록을 조회해 보았다. 친구의 전화였다. 순간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친구의 시신이 안치 되어있는 장례식장에 들어가 밝게 웃고 있는 영정사진과, 망연자실하게 앉아계신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조심히 영정으로 다가가 발을 딛는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친구에게 절을 하고, 부모님께 위로의 말씀을 드릴 때 너무 슬퍼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런 친구의 부모님은 나를 끌어안으시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나도 그 순간부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20~30분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구석자리에서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며, 자살 경위를 듣게 되었다.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쳤다고 한다. 군대에서 전역한 후 사회와 학교에 대한 부적응, 3년간 사귀어왔던 여자친구의 변심, 그 때문에 술을 마시고 음주운전을 하다가 음주단속에 걸려 이틀을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졌었다고 한다.
경찰서에서 나온 그날 밤. 그는 집에서 불과 300미터 정도 떨어진 15층 높이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소주 3병을 마신 뒤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여 미안하다는 말, 자신처럼 살지 말라는 말,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전해달라는 말과 함께, 부모님께 드리는 유서 한통을 남긴채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불과 일주일 전 만났던 그 당시 서로 주고받았던 대화에서 그 이틀 전 여자친구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자신이 잘못했으니 마음을 돌릴 때 까지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이야기와, 군대에서 전역 후 두달이 지났는데도 전공수업이 적성에 맞지 않아 힘들지만, 1년 반을 다녔기 때문에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며, 어떻게 해서든 열심히 해 보아야겠다며 긍정적인 대처 방법을 모색했었다.
1병 2병 빈 술병이 늘어가면서 이런 이야기는 더욱 진지해 졌고, 어느 순간 그는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 ‘아...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이런 고민 같은건 안했을 텐데... 그렇지 않냐?’ 라는 자포자기식의 말을 내뱉었었다. 진지한 이야기 속에서 그의 그런 자포자기식의 말은 그때 당시 의아스러웠지만, 농담으로 넘기고는 그렇게 한시간을 더 이야기 하고는 헤어졌었다.
그렇게 헤어진 지 이틀 후 음주운전을 하였고, 그 이튿날 그는 세상과의 이별을 선택했던 것이다. 발인을 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그 친구의 옆을 지키던 중에 하루에 한두번씩은 경찰이 와서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자살의 경위를 밝히기 위해 조사를 하였고, 경찰이 올 때마다 부모님은 넋이 나간듯한 표정만으로 침묵을 일관하시다가 흐느껴 울기 시작하셨다.
그 후에는 눈물까지 말라 우는 게 우는 것이 아니셨다. 이틀 후 발인을 하 였고, 원주 외곽에 위치한 화장장으로 이동하였다. 화로 속에 들어가는 친구의 시신을 보면서, 삼베로 온몸을 감쌌다고는 하지만, 머리 부분이 푹 패여 피가 멱목에 스며든 친구의 시신을 보자 다시 한번 눈물이 흘렀고, 부모님은 혼절하셨다.
그리고 정말 짧은 시간 만에 나온 그 친구의 유골을 본 순간 너무 슬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24년간의삶을 마감하였고,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남긴 것은 크나큰 슬픔과 정신적인 스트레스 뿐이였다.
나는 친구의 자살로 인해 책에서 언급한 생사학의 관점에서 자살을 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뼈저리게 느끼고, 완전히 공감하게 되었다. 남겨진 가족들과 친지들은 그의 자살로 인해 커다란 슬픔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머님은 현재 정신쇠약으로 병원에 입원중이시라고 하며, 아버지 역시 사업체를 돌보느랴, 어머님의 병수발을 하느랴 집에도 못들어 가시고 회사와 병원을 전전하신다고 한다. 더욱이 이러한 현실을 위로해 드리고 힘이 되어줄 다른 자식 또한 없다. 친구가 외아들인 까닭이다. 이로 인해 한가정의 행복은 송두리째 날아갔다.
하늘에서 이러한 부모님을 보고있는 친구의 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다. 자살은 더 큰 고통을 부르는 것 이며, 자살은 사랑하는 이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남기는 것이다. 또한 3년간 사귀여온 여자친구는 미국으로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더욱이 여자친구의 가족들도 미국으로의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헤어짐은 당연히 받아들어져야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사귀는 과정을 보아도 남자가 여자에게 모든 정을 주는, 친구의 일방적인 사랑 이였다. 고인이 된 친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3년간을 사귀여 온 것이 신기할 뿐이였다.
또 전공과목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재수는 힘들다고 해도, 자신이 조금 더 노력해서 적성에 맞는 과로 전과 하거나, 편입을 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자살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정확히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두 가지 경우를 가지고 보았을 때 자살은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심한 여자친구는 돌아오지 않고,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과목이 자살로 인해 적성에 맞아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수만가지 상황을 가지고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 자살로써 해결되는 것은 없다. 이렇기 때문에 자살은 끝이 아닌 것이다.
자살은 자신의 생명을 끊는 것이다.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은 자살의 자기 결정권, 자살의 권리를 주장하는 장 아메리(Jean Am'ery)의 자살옹호론을 자살의 자기합리화의 근거라고 주장 할 것이다. 장 아메리의 주장대로 인간에게 자살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살이든 살인이든 다만 대상이 다를 뿐, 생명을 훼손한다는 의미에서는 똑같은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적으로 두 권리가 인정된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더 이상 입에 올릴 수 없을 것이고 나아가 ‘사회’는 성립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살을 합리화하려고 한다면 인간이란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동물과 다를 게 무엇이 있겠는가?
따라서 자살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살할 수 있는 ‘권리’란 없는 것이다. 친구가 생전에 「자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죽음」이나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강의를 접했다면,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식으로 자살을 비인간적인 죽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죽음으로 인식하게 되어 씁쓸하지만, 자살은 나쁜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키게 되었고, 자살만을 생각하면 그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은 말 그대로 ‘각계각층’에서 ‘각양각색’의 동기로 벌어지고 있다. 이 자살의 공통점은 올바른 죽음관이 부재함으로써 자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나 자각이 전무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남긴 유서를 보거나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심각한 오해로 인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나만 고통을 당하는가”, “자살을 하면 현재의 고통에서 단숨에 벗어날 수 있다.”,“이 세상과 사회가 나를 자살하게 만든다.”, “자살하면 세상과 완전히 결별할 수 있다.” 라는 등의 대표적인 4가지 오해가 있다고 한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크고 작은 고통과 고난의 순간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또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전혀 고려해본 적이 없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으며,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들을 사회적 불평등이나 구조적 모순이 가져온 결과로 생각해 자신의 극단적인 선택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사회적 존재인 한 사회구조적 문제의 피해자일 수 있다.’ 라는 생각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삶의 고난이야말로 우리의 인격과 영혼을 성장시키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또한 사회가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도 사회가 대신 자신의 삶을 살아줄 수는 없으며 자기 죽음을 죽어줄 수는 없는 것이며, 더욱이 죽음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결국 분명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죽음을 알면 왜 자살할 수 없는지’, ‘자살해서는 안되는 이유’등을 다양한 연령의 눈높이에 맞게 제시하는 교육에 있다.
자살에 대한 대처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자살은 줄어들기는커녕 증가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초, 중, 고등학교에서 자살교육을 위해 전문 상담사를 양성시키는 교육을 실시하며, 학생들에게 형식적으로 자살예방교육을 실시하고는 있지만, 부족한 예산과 전문인력들의 부재는 커다란 문제이다.
정부의 예산 증원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또한 사회적 자살예방의 교육의 일환으로 회사 내 자살예방교육에 대한 프로그램 구성과 이에 따른 지원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살예방을 위한 교육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문뜩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금 한림대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인간의 삶과 죽음' '자살예방교육' '죽음의 철학적 접근' 같은 교육을 통해 평소 타부시 하는 죽음을 준비하는 교육과 생명의 중요성을 일깨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