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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 그리운 명절(3)
삼 년 만에 우러러 보는 고향의 하늘! 그러나 영신은 아침볕이 벌겋게 불들어오는 동녘 하늘을 빡빡한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이렇다 할 감상이 일어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일 분 일 초가 바쁘게 집으로 가고는 싶건만, 바다와는 반대 방향으로 오 리나 되는 언덕 밑까지 타박타박 걸어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점방의 문도 열지 않은 길거리를 도망꾼처럼, 바스켓 하나를 들고 줄달음질을 쳐서 수산조함까지 왔다. 그러나 외삼촌이 다니는 사무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지 않은가.
영신은 문을 흔들어보다가 돌쳐서서 언덕길로 올라가다가, 뿡뿡 하고 달려드는 버스와 마주쳤다.
‘참, 그동안 버스가 댕기게 됐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었네.’
하고 혼잔말을 하고는, 되돌아오면 타고 갈 양으로 정류장 앞에 가 비켜서는데, 등 뒤에서,
“영신 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영신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홱 돌렸다.
버스가 미처 정거를 하기도 전에, 허둥지둥 뛰어내리는 사내 —그는 틀림없는 김정근이었다.
“아, 웬일이서요?”
영신은 창졸간[미처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작스러운 사이] 부르짖듯 하였다. 여기서 만나기는 천만뜻밖이면서도, 얼떨김에 정근이가 반갑기도 하였다.
“………..”
검정 세루 신사 양복을 입은 정근은, 모자를 벗고 은근히 인사를 하면서도, 우물쭈물하고 얼핏 말대답을 못한다.
“언제 이리루 오셨세요?”
영신은 정근이가 그동안 이곳의 금융조합으로 전근이나 해온 줄 알고 채우쳐 물었다. 정근은 여자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면서, 지난봄에 결혼 문제를 해결 지어달라고 청석골까지 갔을 때보다도, 더 여윈 얼굴에 아침볕을 모로 받으며,
“저….지금 마중을 나가는 길인데요, 버스가 고장이 나서……”
하고는 계집애처럼 머리를 숙이고 말끝을 맺지 못한다.
“마중을 나오시다뇨? 누굴요?”
영신은 더욱 이상스러워서 연거푸 묻는다.
“영신 씨가 오실 줄 알구…….”
“아아니, 내가 올 줄 어떻게 아셨서요?”
영신은 한길에서 정근에게 불심검문이나 하듯 한다.
“얘긴 차차 허구 집으루 가시지요.”
정근은 영신의 집 방향으로 돌아서며 무슨 죄나 지은 사람처럼 비실비실 걷기를 시작한다.
영신은 그 뒤를 바싹 대서며,
“그럼, 우리 집엘 가보셨겠군요.”
하고 조급히 물었다. 정근은 어려서부터 이웃집에서 자라나서, 영신의 어머니를 ‘아주망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터이라, 무슨 일로든지 여기까지 왔으면야, 저의 집에를 들렀을 듯해서 물어본 것이다.
정근은 여전히 선선하게 대답을 못 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듯이 연방 정거장 편만 돌려다 본다.
“아, 어머니가 위독하시단 전보를 받고 오는 길인데요, 왜 말씀을 못 허셔요?”
영신은 갑갑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발을 멈추며 정근을 돌려다 보았다. 정근은 그제야.
“아무튼 같이 갑시다. 대단친 않으시니 안심허시구요.”
한다. 다년 책상 앞에 꼬부리고 앉아서 주판질을 하고 철필 끝만 달리느라고, 워낙 잔졸하게[몹시 약하고 옹졸하다] 생긴 사람이 허리까지 구부정해졌는데, 팔꿈치와 양복바지 꽁무니는 책상과 의자에 반질반질하게 닳아서, 걸음을 걷는 대로 번쩍거린다. 영신은 한 걸음 다가서며,
“정말 대단치 않으셔요?”
하고 정근의 말을 흉내 내듯 하였다. 어머니가 그동안 돌아가지 않으신 것만은 확실해서, 우선 마음이 놓이면서도,
‘그럼, 어째서 전보까지 쳐서 바쁜 사람을 불러 내렸을까?’ 하는 의증이 더럭 났다.
“대체, 전본 누가 쳤어요?” 하고 의심에 빛나는 눈초리로 정근의 옆얼굴을 노려보는데, 등 뒤에서 버스가 달려왔다. 정근은 대답할 것을 모면하고 손을 들어 버스를 세우더니,
“타구 가십시다.”
하고 저부터 뛰어오른다. 영신은 잠자코 그 뒤를 따라 올랐다.
영신은 멀찌감치 떨어져 외면을 하고 앉았다. 어머니의 소식을 대강이나마 안 담에야, 여러 사람 틈에서 이 말 저 말 묻기도 싫어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얼마나 이상이 맞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갖은 복록을 다 누리며 사나 두고 보자.’고 저주까지 하던 남자가, 어쩌면 저다지도 떡심이 풀린 것처럼 풀기가 없을까? 왜 말대답도 시원히 못할까? 대관절 여기는 무얼 하러 와서 나를 마중까지 나왔을까? 하니 눈앞에 앉은 정근이가 점점 더 의심스러워졌다.
어려서부터 학교에 다닐 때 보아오던 거리에는, 초가집이 거진 다 헐리고, 얄따란 함석지붕에 낯선 문패가 뭍었다. 무슨 양조장이니, 조선 요리 무슨 관(館)이니 하는 커다란 간판만 눈에 띄는데, 어머니가 생선을 받아가지고 다니던 수산조합 도매장을 지날 때에, 생선 비린내만은 여전히 코에 끼쳤다.
‘아하, 우리 고향두 어지간히 변했구나!’
영신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금할 수 없었다.
영신을 불러 내린 것은 정근의 조화였다. 영신이가,
“어머니!” 하고 집으로 뛰어들어가 보니, 어머니는 병들어 눕기는커녕 정지에서 아침 반찬을 할 것인지 생선을 다루고 섰지 않은가.
“아이 우리 영싱이!” 하고 반색을 하며 마당의 아침볕을 받으며 내닫는 어머니의, 눈물이 글썽글썽해진 얼굴은, 지난봄에 보았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영신은 어머니가 반가운 것보다도, 정근에게 속은 것이 몹시 불쾌해서, 어머니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며 바스켓을 마루 끝에다 내던지고는,
“난 어머이가 돌아가신 줄 알았구료!” 하고, 저의 뒤를 따라와서 구두끈을 끄르는, 정근을 돌려다 보고 눈을 흘렸다.
“어미래 숨으 몬다구나 해야 집에 오지비.”
딸의 성미를 잘 아는 어머니는, 눈 하나를 찌긋하고 심상치 않은 영신의 기색을 살피면서,
“어서 구둘루 들어가자야.”
하고 어름어름 한다.
“자네두 들어오랑이.”
어머니는 정근이가 정말 사위나 되는 듯이 불러들였다. 정근이가 슬금슬금 곁눈으로 저의 눈치를 보며 들어와 윗목에 가 앉는 것을 보자, 영신은 발딱 일어서고 싶도록 불쾌해졋다. 양회 포대로 바른 장판만 들여다보고,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어째 저리 실룩해 썼소? 너 멫 해 만에 집에 온 줄 아능야? 그러다간 과연 에미래 죽어두 모르지 앙켕이.” 하고 흥분한 딸의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앙이 어째 저러구 앉었기만 하오?” 하고 정근이더러 무슨 말이라도 꺼내라고, 재촉 비슷이 한다. 그래도 정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넥타이만 만지작거리고 앉았는데, 영신은 무릎을 세우며,
“어머니가 저렇게 정정허신데, 전보를 친 사람이 누구야요?” 하고 반쯤은 정근을 향해서 새되게 쏘아붙인다. 속고 온 것보다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나보아, 애절초절[비길 데 없이 애가 탐]을 하던 것이 몹시 분하였다. 그보다도 어머니를 살살 꾀고, 어수룩한 늙은이와 짬짜미[남모르게 자기들끼리만 하는 약속이나 수작]를 해가지고 거짓말 전보를 친 정근의 비열한 태도가, 주먹으로 그 핏기 없는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도록 밉살스러웠다.
“그거사 차차루 알지비. 아척[‘아침’의 방언]이나 먹으면서 천청이 얘기하지비….” 하고 어머니는 정지로 내려가서 수산조합에 다니는 동생의 댁과 아침상을 차린다.
조금 있자 생선 굽는 냄새가 풍겨 들어오건만, 방 안의 두 사람은 피차에 쓰디쓴 얼굴을 하고, 말은커녕 마주 쳐다보지도 않는다. 밤새도록 기차 속에서 시달리면서, 불안과 초조에 지지리 졸아붙은 듯하던 영신은 신경은, 다시금 불쾌한 흥분으로 옥죄어드는 것 같다.
정근은 양복 앞자락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튀기고 있다가,
“너무 불쾌허게 생각은 마세요. 전보는 어머니가 치라구 하셔서, 치긴 내가 쳤지만…..” 하고 간신히 한마디를 꺼낸다.
“알았어요!”
영신의 대답은 얼음같이 차다.
“지낸 봄의 그 편지 한 장으루는…….”
“단념을 헐 수 없단 말씀이죠?”
“네……..”
“그래서 어머니를 꼬득여서, 말짱헌 노인이 돌아가신다구 가짓말 전보를 쳤군요?”
영신의 눈초리는 마주 쳐다보기가 매섭도록 날카롭다.
방 안의 공기는 찢어질 듯이 빡빡한데, 어머니는 손수 딸의 아침상을 들고 들어왔다.
밥상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영신은 발딱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세수를 하고 들어왔다. 잠시 자리도 피할 겸 머리를 식히기 위함이었다.
오래간만에 모녀가 겸상을 하고, 정근은 산지기 모양으로 윗목에 가 외상을 받았다. 영신은 어머니가 그동안 지낸 일과 수다스레 늘어놓는 잔사설을 귀 밖으로 흘리며, 입맛이 깔깔해서 밥은 두어 술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물러앉았다.
어머니는, 정근이가 너를 불러 내린 것이 아니라는 발뺌을 뿌옇게 하고는,
“여러 말 할 거 없당이. 이번에사 귀정[그릇되었던 일이 바른길로 돌아옴]으 내야지 어찌겠능야. 앙이 몇몇 해르 두구서리, 너만 고대한 사람으 무쉴에 마다능야. 그건 죄 앙이 되갠? 난 이전 저 사람이 안심치 않아 못 보겠다.”
하고는 연방 딸의 눈치를 살핀다. 영신은 속아서 내려온 분도 채 꺼지지 않았는데, 들어단짝[들이대고 다짜고짜] 그런 말ㅇ르 꺼내는 어머니의 태도가, 뚜쟁이만치나 비열한 것 같아서, 입술만 자근이 깨물고 있다가,
‘직접으로 담판을 하고 말리라.’ 하고 입속으로 양치질을 하고 있는 정근의 편짝으로 반쯤 돌아앉았다.
“날 좀 보서요!”
여자의 말에 따라 정근은 뇌란 얼굴을 쳐들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다시 무릎 위로 떨어졌다.
“아무튼 위조 전보까지 쳐서 날 불러 내리신 건 비겁한 행동이야요. 더군다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구 속구 온 게 몹시 불쾌허지만, 될 수 있는 대루 냉정허게 얘길 허겠어요.” 하고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원체 사랑이라는 건요. 한편 짝에서 강제헐 수도 없는 거구요, 또는 상대자의 사정을 봐서 제 몸을 바칠 수두 없는 줄 알어요. 그건 동정이지 진정헌 사랑은 아니니까요.” 하고 설교를 시작하듯 한다. 정근은 그제야 영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만치 용기를 내었다.
“나두 그만 걸 모르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어려서버텀 단단히 믿어오던 터에, 편지 한 장으루야 첫 번 사랑허든 사람을 단념헐 수가 있어요? 그런데 집에선 결혼 문제루 너무나 귀찮게 구니까, 좌우간 탁방[어떤 일 따위의 결말을 이르는 말]을 내려구, 일테면 비상수단을 쓴 겐데……”
하고는 바늘방석에나 앉은 것처럼 불안해한다.
영신은 남자의 앞으로 조금 몸을 다그며[물건 따위를 어떤 방향으로 가까이 옮기다] 눈을 아래로 깔고,
“나 역시 정근 씨헌테 미안헌 생각이 없진 않어요.” 하고 진심으로 동정하는 빛을 보이더니,
“허지만,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첨버텀 나뻤어요. 당자의 장래는 어떻게 될는지 모르구, 부모들이 덮어놓고 혼인을 정했다는 건 다시 비판할 여지두 없지만, 개성에 눈을 뜬 우리가, 옛날 어른들의 약속을 지켜야만 헐 의무는 손톱 끝만치두 없어요. 그렇지 않어요?” 하고 억지로 평화스러운 얼굴빛을 짓는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야요?”
“난 오늘날까지두 여신 씨 한 사람만을 사랑허구 있는데…….”
“………….”
이번에는 영신이가 대답에 궁한 듯, 입을 뾰족이 다물고 있다가,
“나 같은 여자를 그다지 꾸준허게 사랑해주신다는 데는, 고맙다구 해야헐지, 미안스럽다구 해야 헐지 모르겠어요.” 하고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목소리 보드러이,
“정근 씨!” 하고 손톱 여물을 썰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런데 두 사람 중에 한 편의 짝사랑만으로, 결혼이 성립될 수가 있을까요?”
그 말에 신경질인 정근의 눈초리는 샐쭉해졌다.
“그야 성립될 수가 없겠지요.”
하고 영신의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이 똑바로 노려보다니,
“도대체 어째서 뭣 때문에 나를 사랑헐 수 없다는 거야요? 그 까닭이나 똑똑히 말해주세요.”
하고 바싹 다가앉는다.
단둘이서만 이야기할 기회를 주려고 어머니는 자리를 피해서, 영신과 정근은 피차에 최구의 담판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는 어리석은 듯하고 거북한 질문에는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영신은 잠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인력으룬 억지루 못 허는 거야요. 허지만 난 인간적으룬 정근 씨를 싫어허지 않어요.”
“그럼요?”
정근은 약빠릴 말끝을 채뜨린다.
“일이 기왕 이렇게 됐으니 솔직허게 말씀허지요.” 하고 영신은 무슨 셈을 따지듯 엄지손을 꼽는다.
“첫째, 돈을 모아서 저 한 사람의 생활안정이나 꾀하려는, 정근 씨의 이기주의가 싫어요!”
“이기주의가 싫다구요? 우리에겐 경제생활의 토대가 없으니까, 따라서 문화두 없는 게지요. 그러니까, 우린 첫째 돈을 모아가지구 모든 걸 사야만 해요. 결국은 모든 걸 돈이 지배허구 해결을 짓는 게니까요.”
“그건 퍽 영리허구두 아주 현실적인 사상인진 모르지만요, 제 목구녁이나 금전밖에 모르는, 호인이나 유태 사람은 되구 싶지 않어요! 저라는 개인 이외에 사회두 있구, 민족두 있으니까요.”
“암만 사회를 위허느니 민족을 위허느니 허구 떠들어두, 위선 돈을 안가지군 무슨 일이든지 손두 대볼 수 없는 게 엄연한 사실인 데야 어떡거나요?”
“물론 돈이 필요허지요. 그렇지만 우린 필요한 것과 귀한 걸 구별헐 줄 알어야겠어요. 더군다나 계몽운동이나 농촌운동은 다른 사업과 달러서, 오직 정성으로 혈성[짐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허는 게지, 돈을 가지구 허는 건 아니니까요. 실상 우리 같은 새빨간 무산자가, 꿈에 광맥이나 발견허기 전엔, 돈을 모아가지구 사업을 헌다는 건, 참 정말 공상이지요. 사실 남의 고혈을 착취허지 않구서, 돈을 몬다는 건 얄미운 자기 변호에 지나지 못허는 줄 알아요.”
이 말에 정근은 불복인 듯이 상체를 뒤흔들며,
“천만에, 그렇지 않…..”
하는데, 영신은 급작이 손을 들어, 정근의 말문을 막으며,
“여러 말슴 헐 게 없어요. 누가 무슨 말을 허든지, 내 신념만은 굽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구 둘째는요……”
하고 바로 정근의 턱밑에서,
“난 지금 연애니 결혼이니 허는 문제를, 생각헐 겨를이 없어요! 오해허지면 안 됩니다. 이것두 핑계가 아니구 사실이야요. 내가 청석골다가 이 일 저 일 벌여논 걸 직접 보셨지만, 지금 학원 집을 엉터리루 지어놓구 허리가 휘두룩 빚을 졌는데요, 바루 낼 모레가 낙성식을 헐 날이야요. 한눈을 팔기는커녕 죽을래야 죽을 틈이 없는 터에, 연애는 뭐구 결혼은 다 뭐야요.”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부드럽던 영신의 말씨는 점점 여무져가고, 잠 한 숨도 못 자서 흐릿하던 눈에서는 영채가 돈다.
정근은 질문할 말도 대답할 말도 궁해서, 과식한 사람처럼 어깨로 숨만 가쁘게 쉬고 있다가,
“그럼 모든 게 안정된 장래까지두, 생각을 다시 고칠 수가 없을까요?” 하고 은근히 후일을 기약하자는 뜻을 보인다. 영신은 그 말대답도 서슴지 않았다.
“장래까지두 다시 생각헐 여유가 없어요! 난 내 맘대루 약혼헌 남자가 있으니까요.”
“네? 정말요?”
정근은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몸을 반쯤이나 일으켰다. 영신이가 약혼을 하였다는 것을, 여태까지 한낱 핑계로만 여겼던 것이다.
“박동혁이라구 저어 ‘한곡리’라는 데서 농촌운동을 허는 사람인데요. 돈은 한푼두 없어두 황소처럼 튼튼허구 건실헌 동지입니다. 올봄에 그의의 일터루 찾아가서 앞으로 삼 년 계획을 세우구 왓어요. 그래서 정근 씨한테 단념해달라는 편지를 헌 거야요.” 하고는 ,
“마지막으루 한마디 해두구 싶은 말이 있어요.”
하고 목소리를 흠씬 낮추어가지고,
“어려서버텀 한고장에서 자라났구, 또는 여러 해 동안 나 같은 여자를 유념해주신 정분으로 충고를 허는 건데요. 정근 씨가 지금 같은 개인주의를 버리구, 어느 기회에든지 농촌이 아니면 어촌이나 산촌으로 들어가서, 동족이나 같은 계급을 위헌 일을 해주서요! 우리 같은 청년 남녀가 이면, 뉘 손으루 그네들을 구원해냅니까?”
영신의 목소리에는 정근의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들 만한 열과 저력이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묵묵하였다. 그러다가 영신은 인제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난 좀 자야겠어요.” 하고 일어서더니, 윗간으로 올라가 턱 누워버린다.
점심때가 훨씬 겨워서, 영신은 동혁이가 청석골로 와서 기다리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쳐 깨었다. 눈을 부비며 아랫방으로 내려가 보니, 정근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데, 어머니 홀로 벽을 향해서 훌쩍훌쩍 울고 누웠다.
“어머니, 그이 어디 갔수?”
하고 딸은 어머니의 어깨를 흔들었다.
“뉘 아능야. 내게두 말없이 가방으 들구 나갔당이. “
어머니는 돌아누운 채 울음 반죽으로 대답을 한다. 영신은 그 곁에 한참이나 잠자코 앉았으려니, 저에게 너무나 매정스러이 퇴짜를 맞고, 다시 머나먼 길을 인사도 아니 하고 떠나간 정근이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차차 그이헌테두 좋은 베필이 생기겠지.’
하고 눈을 내리감고는 그의 장래를 마음속으로 축복해주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뼈만 남은 손을 잡으며,
“어머니!” 하고 불렀다.
“어째 그리능야?”
어머니는 그제야 반쯤 돌아눕는다.
“너무 그렇게 섭섭해허지 마슈. 그 사람버덤 더 잘나구 튼튼한 사윗감을 보여드릴게. 응. “
하고 영신은 응석조로, 늙은 어머니를 위로한다.
“사윗감이사 어디 없겡이. 그러나 정긍이만치 어려서부터 정이 들구 얌전스리 구는 사람이, 그리 쉬운 줄 아능야.” 하더니,
“네 그럴 줄이사 몰랐지. 에미 마지막 소원두 끊어지구……” 하고 어머니의 눈은 또 질금질금해진다.
“글쎄 그렇게 안짢어허지 마시라니깐. 어느새 무슨 소망이 끊겼다구 그러슈? 몇 해만 눈 꿈쩍허구 기다려주시면. 내가 잘 뫼시구 살 텐데…..”
“듣기 싫다야. 내사 하두 여러 번 속았다. 이전 금방석으 태운대두, 곧이 들리지 않는당이.”
하고 한숨만 들이쉬고 내쉬고 한다. 영신은 동혁이와 약혼을 하기까지의 자세한 경과와, 청석학원을 짓느라고 죽을 힘을 다 들인 이야기를 좌악하고 나서,
“나는 물론 어머니가 낳어서 길러주신 어머니의 딸이지만, 어머니 한 분의 딸 노릇만은 헐 수가 없다우. 알아들으시겠수? 어머니 한 분헌텐 불효허지만, 내 딴엔 수천수만이나 되는 장래의 어머니들을 위하여 일을 허려구 이 한 몸을 바쳤으니까요. 그러는 게 김정근이 하나헌테만 이 살덩이를 맡기는 것버덤 얼마나 거룩하구 뜻있는 일인지 몰라요. 네 그렇죠? 어너니!”
어머니는 일어나 앉으며, 파뿌리 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올리더니,
“모르겠다. 내사 평생으 이렇게 혼자 살란 팔자지비…..”
하고는 다시 말이 없다.
“어머니, 그럼 우리 청석골루 갑시다. 아무럭허문 어머니 한 분이야 굶겨드리겠수.”
“싫당이, 싫어!”
어머니는 그것도 생각해보았다는 듯이, ㅊ머리[머리가 저절로 흔들리는 병적 현상, 또는 그런 현상을 보이는 머리]를 앓는 사람처럼 머리를 흔든다.
“밥술으 놓는 날꺼지는, 내 앙이 벌어먹으리. 네 입 하나 감당으 하게두 어려운데, 이까지 쓸데없는 늙응이, 무쉴에 쫓아가겡이? 네 출가하는 날꺼지 살기나 하문, 그제나 구경으 가지비.”
그 말에 영신은 참았던 눈물이 핑 돌았다. 얼핏 저고리 고름으로 눈두덩을 누르고, 온몸의 용기를 내어,
“아무튼 내가 없인, 낙성식을 못 헐 테니깐, 저녁 차루 떠나야겠수.”
하고 차마 하기 어려운 말을 꺼냈다.
“앙이, 오늘 나조루 떠나? 정말잉야? 어미허구 하룻나조 자보지두 앙이하구….”
마르고 주름 잡힌 어머니의 얼굴은, 무한한 고독과 섭섭한 빛에 뒤덮인다. 딸은 그 얼굴을 마주 쳐다보다가,
“그럼 어떡허우! 어머니! 그럼 난 어떡허우!”
하고 목소리를 떨다가 어머니의 무릎에 이마를 들부비며 느껴 느껴 울었다.
……..어머니는 정거장까지 전송을 나왔다.
호각 소리가 들리고 기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는데, 치맛자락을 들추어 다 떨어진 주머니를 끄르며 따라오더니, 딸이 얼굴을 내민 차창으로 그 주머니를 들여트리고는, 잠자코 돌아섰다.
그 주머니 속에는, 생선 광주리를 이고 다니면서 푼푼이 모아 넣은 돈이, 묵직하게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