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0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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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소피아(Sofia),천상 지혜
성녀 피스티스(Pistis),믿음
성녀 엘피스(Elpis), 희망
성녀 아가페(Agape) 사랑
축일: 9월 30일
순교자. 성녀 소피아는 어머니이고
나머지 세 성녀는 자녀들이다. 세 자녀들은
트라이아노 로마 황제때, 순교하였으며,
성녀 소피아는 사흘 뒤에 자연사하였다.
성녀 소피아와 그 자녀들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성녀 소피아에게 봉헌된
성당이 여러 있다.
소피아(Sofia)는 천상 지혜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피스티스(Pistis)는 믿음의 뜻을 지니며,
엘피스(Elpis)는 희망을 가리키고,
아가페(Agape)는 사랑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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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의하면 성녀 소피아는 동정 순교자
성녀 피데스(Fides)와 성녀 스페스(Spes) 그리고
성녀 카리타스(Caritas, 이상 8월 1일)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자신의 세 딸의 순교한 지 3일 후에
그들의 무덤에서 기도하던 중에 평화롭게 선종하였다.
지혜라는 의미를 지닌 성녀 소피아의 생애와
관련이 있는 전설적인 이야기는, 동방 지역에서
세 가지 신학적인 덕목들 즉 피데스(신덕),
스페스(망덕), 카리타스(애덕)의 원천인
신적인 지혜를 숭배하던 관례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치 신학적인 덕목들을 의인화해서 우화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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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그레고리오 계몽주의자
(Gregory the Enlightener)
축일 9월 30일
계몽주의자로 불리는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르메니아(Armenia)의
코스로프 1세(Khosrov I)를 제거했던 아나크(Anak)의
아들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부친과 함께
카이사레아(Caesarea)로 피신하여 살았는데,
그는 여기서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코스로프의 아들 티리다테스(Tiridates)가 즉위하면서
개종하고, 그리스도교가 아르메니아의 국교임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아쉬티샷의 주교로 축성되면서부터 아르메니아
교회를 제도화시켰고, 이방인 성직자를 양성하여
복음화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아르메니아의 사도요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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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레오파르도(Leopardus)
축일 9월 30일
성 레오파르두스(또는 레오파르도)는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노예이거나 부하였다.
그는 로마(Rome)에서 순교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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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빅토르(Victor)
성 우르수스(Ursus)
축일 9월 30일
성 빅토르와 성 우르수스(Ursus)는
테반 군단과 관련된 순교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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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토니노(ANTONINUS)
축일 : 9월 30일
테반 군단의 군인이었는데 성 안토니누스
(또는 안토니노)는 이탈리아 피아첸차(Piacenza)
근교에서 신앙 때문에 사형을 당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피는 오랜 동안 살아 있는
그대로였고, 샘솟는 듯한 것이 마치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경우와
같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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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예로니모 (Hieronymus)
축일 9월 30일
우리가 성인들을 생각할 때 대부분은
그들의 뛰어난 미덕이나 또는 그들이 실천한
헌신적인 봉사 등을 기억하지만, 예로니모는
그의 나쁜 성질 때문에 기억되고 있다.
그가 아주 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신랄한 비평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
은 너무도 열렬했으며, 그에게 오류를
가르치는 사람은 하느님과 진리에 대한 적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예로니모는 그의
강력하고도 때로는 풍자적인 글로써 그들을
공격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히브리어로 된 구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서 학자였다.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정신적
영감의 큰 근원이 된 주석들을 쓰기도 했다.
그는 열심한 학생이었고 완벽한 학자, 비범한
서간문의 작가였으며, 수도자,주교,교황
등의 상담자이기도 했다. 성아우구스티누스는
"예로니모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일찍이 안
사람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예로니모는 특히 불가타라고 불리는 성서를
번역한 인물이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성서는 아니지만,
교회에 받아들여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떤 현대 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예로니모 이전이나 그와 동시대 사람 가운데는
아무도 그 일에 적격인 사람이 없었으며
예로니모 이후 몇세기 동안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 데 적격이었을 뿐이다."
트렌트 공의회는 새롭고 정확한 불가타 성서의
출판을 요구했으며, 그것이 교회에서 사용될
진정한 성서임을 공표했다.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는 스스로 훌륭한 준비를 했다.
그는 라틴어뿐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와
칼데아어까지 능통한 대가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달마티아에 있는
스트리돈-지금의 유고슬라비아-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예비 교육을 마친 후 그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로마로 갔다가 독일의
트리어로 갔는데, 그곳에는 학자가 눈에 띄게
많았다. 그는 가장 훌륭한 스승을 찾기위하여
매우 애쓰면서 가는 곳마다 몇 해씩 머물렀다.
이렇게 공부를 위한 준비를 한 후, 그는 진정한
공경심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던 흔적을
살피면서 팔레스티나를 두루 여행했다.
그는 신비주의자였으며, 기도,참회,연구에
자신을 맡기고자 칼키스 사막에서 5년을 보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지로 믿어지는
동굴이 있는 베들레헴에 정착해서 살았다.
예로니모는 420년 9월 30일, 베들레헴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그의 유해는 로마에 있는
성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설명 ; 예로니모는 강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덕성과 더블어 대담 무쌍한 비평가가 지닌
단점과 인간이 지니는 일상적인윤리 문제를
가진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그는
덕이나 악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든
중간 입장을 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빨리 화를 내는 반면 빨리 후회하는 성격
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결점보다 자신의 결점에
더욱더 가혹했다. 돌로 가슴을 치는 예로니모의
초상화를 보면서 한 교황이 말하기를
"당신이 그 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잘 하신 일입니다.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교회가 결코 당신을
성인으로 추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버틀러, '성인전')
인용 ; "황량하고 돌투성이인 사막의 가장
외진 곳, 그곳에는 수도자조차도 두려워하는
뜨거운 태양열이 불타고 있었는데, 나는
나 자신이 기쁨 가운데 그리고 로마 군중
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지옥의 두려움 때문에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처벌한 이 추방과
감옥에서, 나는 여러번 눈앞에 로마 처녀들의
춤추는 광경을 마치 내가 그들 가운데
있는 것처럼 상상을 했다.
그것은 나의 차가운 육신 안에서 그리고 나의
바짝 마른 근육 속에서 죽은 것 같았으며,
열정만이 살아 있었다. 이 열정의 원수와 함께
나는 혼자서 예수의 발 아래 몸을 던졌으며
나의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그리고 나는
몇 주일 단식함으로써 나의 육체를 길들였다.
나는 내가 받은 유혹을 폭로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슬퍼한다."
(성유스토키움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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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티아(Dalmatia)의 아퀼레이아(Aquileia) 근처
스트리도니아(Stridonia)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한
성 히에로니무스 소프로니우스(Hieronymus Sophronius,
또는 예로니모)는 12세 때 로마(Rome)에서 당시의
저명한 문법학자인 도나투스(Aelius Donatus)의
문하생으로 수사학과 라틴어 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지식은 물론 고대 학자들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연구 업적으로 명성을 날리다가
19세 때 교황 리베리우스(Liberius)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프랑스 지방을 여행하다가 트리어(Trier)에
정착하여 정부 관리로 일하였는데, 이때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는 370년경 고향인 아퀼레이아로 돌아와
발레리아누스 주교의 지도하에 같은 뜻을 갖고 있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복음적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373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후 안티오키아(Antiochia)에
머물면서 라오디케아(Laodicea)의 아폴리나리우스
(Apollinarius) 주교로부터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공부하였으며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기도 했다.
그 후 칼치스 사막에서 375-377년까지 은수생활을 하면서
그리스어를 익히고 어느 랍비로부터 히브리어를 새로
배웠으며, 사막의 은수자인 테베(Thebes, 오늘날의
룩소르 Luxor 근방)의 “성 바오로(Paulus) 전기”를 썼다.
그런데 은수자들 사이에 아리우스(Arius) 이단 문제로
대립하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379년 안티오키아로 갔을 때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바울리누스(Paulinus)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38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그곳의 총대주교인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1월 2일)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Origenes)의
성서 주석 방법에 매료되었으며,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3월 9일) 주교와 교류를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382년에 로마로 왔는데,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는 그를
비서로 임명하고 신구약성서 모두를 라틴어로 새로이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 교회에서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서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히에로니무스에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서본을 만들도록 위촉한 것이다.
그 당시 그는 헬비디우스(Helvidius)의 이론을 반박하는
“헬비디우스 논박, 복되신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대하여”
(383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는 헬비디우스가 마리아는 예수 외에도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성 히에로니무스는 성녀 마르첼라(Marcella, 1월 31일)와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 등이 주축인 상류층의
미망인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수도생활의 이상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켰다. 그런데 그의 후원자이던
다마수스 교황이 서거하자 그의 재능을 시기한
일부 적대자들이 여자들의 집에 들락거리는
히에로니무스를 의심하고 비난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안티오키아로 가서 성녀 바울라와 그녀의
둘째 딸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 및
일단의 로마 그룹과 합류하여 이집트로 갔다가,
386년 여름부터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귀족 부인 성녀 바울라가 따라와서 자신의 돈으로
세 개의 남자 수도원과 한 개의 여자 수도원을 세우는 데
경제적 뒷받침을 하였다.
그리고 성녀 바울라는 여자 수도원의 원장을,
성 히에로니무스는 남자 수도원의 원장을 맡았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를 맡았다.
그 후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 동안 성서 번역 활동에
몰두하면서 당시 몇몇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한 반박글을
발표하였다. 예를 들어
요비아누스(Jovianus)의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부인과
사제의 독신 그리고 성인들의 유해 공경 반대에 대해서
명확한 근거로 반박하였다.
그러나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큰 논쟁은 자신의
옛 친구이자 오리게네스의 지지자이며 성서 번역에도
공이 있던 루피누스(Rufinus)와의 사건이었다.
그는 오리게네스주의 논쟁과 관련하여 루피누스를
반박하는 호교론을 썼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계속된 성서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391년부터 신약성서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고, 구약성서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70인역”(Septuaginta)을 배척하는 유대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새로이 번역하였다.
406년까지 계속된 이 엄청난 작업으로 번역된 라틴어
성서에 ‘불가타’(Vulgata, 대중적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성 히에로니무스 당시가 아니라
13세기 때였다. 그 이유는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서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 트렌토(Trento)
공의회에서 이를 공식적인 성서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406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그는 수많은 성서 주석서를
남겼고, 그의 번역 사업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을 남겼다.
415년에 펠라기우스주의자(Pelagianos)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가 이듬해인 416년 펠라기우스주의자인
폭도들이 베들레헴 수도원을 불태우고 그를 해치려
하였으나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 후 성 히에로니무스는 419년 9월 30일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아마도 라틴 교부들 가운데에서 가장 박학한
학자였고, 동 시대인들 중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중 한 사람으로,
신학교의 수호성인 또는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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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호노리오(Honorius)
축일 : 9월 30일
이탈리아 로마(Rome) 태생인
성 호노리우스(또는 호노리오)는 베네딕토회의
수도자가 된 후, 캔터베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5월 27일) 주교의 요청에 응답한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의
명을 받고 영국 잉글랜드(England) 선교 길에 올랐다.
그는 627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된 후
약 4반세기 동안 교구를 지혜롭게 다스렸다.
그러나 개인적인 신상이나 성품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던위치(Dunwich)의
성 펠릭스(Felix, 3월 8일)를 이스트앵글리아
(East Anglia)로 파견하여 선교하도록 명하였고,
또 644년에는 처음으로 영국인을 주교로 승품시켰는데,
이 주교는 후에 캔터베리의 첫 영국인 대주교가 된
로체스터(Rochester)의 성 이타마르
(Ithamar, 6월 1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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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시몬(simon)
축일 : 9월 30일
발로와의 크리피 백작인 시몬은
정복자 윌리암의 아내인 마틸다와 친척이다.
그는 윌리암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를 도와서
프랑스와 싸우기도 하였으나, 수도자 되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나 윌리암의 딸 아델라와
결혼해야할 입장에 처했는데, 그는 윌리암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여 거부당할까 두려워
한 나머지 몰래 로마로 피신해버렸다.
그는 유라의 콘다트에 있는 쌩-끌로드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된 것이다. 그후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교회 전체를 위하여 일하다가 선종하였다.